네 이웃은 누구인가

2004 노동만화전 '들꽃 - 내 이웃 사람들' 전시중
평범하면서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의 인물 열전

만화전 이틀째인 오늘 오전 11시, 남산 밑에 있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1층 전시장은 산뜻한 분위기였다. 전날 개막 행사 탓인지 한편으로는 어수선하면서도, 전시장을 찾는 사람을 차분히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그림들, 만화마다 특색은 달랐지만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은 모습이었다.

"2004년 전시의 주제는 '내 이웃 사람들', 즉 우리 삶 속에 치열하게, 또는 평범하면서도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물 열전입니다" 2004 노동만화전 '들꽃'의 여는 말이다.

이번 만화전에는 강우근, 김지찬, 도단이, 문동호, 배영미, 신성식, 오영진, 오종연, 장진영, 전선봉, 정재훈, 채경환, 최정규, 황우 등이 참여하였다. 참여한 만화가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도무지 공통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만화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 교사, 주부, 농민, 노조활동가, 엔지니어... 그러나 기획 집행을 총괄하고 있는 도단이 씨는 '노동만화전'에 출품하고 함께 활동하는 데 있어서는 색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강우근 씨의 '지렁이 할머니'는 오늘날 먹고 마시고 버리고 소비하는 현실을 폭로하고, 그 왜곡된 현실을 어떤 '이웃'이 똑바로 잡아나가는지를 보여준다. 두 쪽 짜리 만화에서 강우근 씨는 내 이웃 지렁이 할머니의 삶의 경건함을 보여줌으로써 지렁이할머니를 무시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심지어 시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조차 낯부끄럽게 만든다. 이번 만화전에서 가장 돋보인 '이웃'으로 꼽을 만 하다.

부산에서 활동중인 김지찬 씨의 '이 땅에 살기 위하여'는 빈곤한 어느 집안 식구들이 겪는 고단한 삶을 웰빙을 풍자해서 그린 만화이다. 두 남매의 마지막 멘트가 최저생계비조차 보장되지 않는 사회적 빈곤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하다.

도단이 씨는 노동만화전 '들꽃'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맡고 있어 많은 작품을 출품하지 못했다고 했다. 평소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를 많이 그린다고 한다. 작품 '농담이 아니라'는 2015년 어느 날 정규직 노동자가 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현장 취재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세상에 아직도 정규직이 있다니~"라고 놀라워 하는 시민들의 눈 동그란 표정이 재미있다.

문동호 씨의 '내 이웃 아닌 사람들'은 '내 이웃 사람들'의 프레임을 그대로 가져와 부시와 미군, 그리고 파병안을 통과시킨 구더기들을 등장시킨다. 내 이웃 사람들과 내 이웃 아닌 사람들을 한 눈에 대비시켜 시원한 느낌을 준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배영미 씨의 '樂동심 1,2,3' 세 편은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1편은 산만동자의 연기력을 소재로, 2편은 없어진 500원짜리 동전을 소재로, 3편은 맘에 안 드는 짝꿍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담고 있다. 3편의 빼빼로와 함께 만나는 마지막 컷에서의 반전이 상쾌하다. 어린이들도 당당한 우리 이웃이다.

평소 노동자의힘 기관지에 '00씨의 하루'를 연재하고 있는 신성식 씨는 '앉아 있는 남자'를 내놓았다. 무늬만 나무인 시멘트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특유의 화체로 담아냈다. 실업청년, 순찰중인 경찰, 밴처 사장, 노인, 노동자를 차례대로 보여준다.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신성식 씨의 그림은 늘 대사보다 그림이 더 많은 걸 이야기한다. 작품 마지막에 "왜 여성은 한 명도 안 나왔냐구요? 그게.. 저에겐 '서 잇는' 이미지가 강해서..."라며 다음 편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기도 하였다.

육아전문 아줌마로 소개가 된 오영진 씨의 '일하고 싶어요'는 아이 키우는 두 아줌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자리 구하기, 물가, 육아, 교육비 등등 두 아줌마의 수다 속에 오늘 이땅의 아줌마들이 겪고 있는 삭막한 현실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떡볶이 먹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아줌마의 표정이 안쓰럽기만 하다.

오종연 씨의 네 컷 만화 '방돌이'는 노보에 잘 어울리는 친숙한 그림이고, 만평으로 내놓은 '결국 우리는', '울고 싶은 놈'은 임단협 등 노동조합의 일상 투쟁에서 쉽게 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 일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현재 강화도에서 건달 농사를 짓고 있다는 장진영 씨는 상명대 만화학과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FTA, 추석 풍경, 12월19일 분노의 함성, 난장판 국회 등 '풍경 넷'을 출품했다. 'FTA 자유무역협정'에서는 국제 경쟁에서 이기려면 체질이 강해야 한다며 수혈받고 있는 대기업, 그 아래로 농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그려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끌어낸다. '추석 풍경'에서 시름하는 농부의 표정과 시큰둥한 대보름달이 조화를 이뤄 가슴을 애태운다.

전선봉 씨의 '연탄불 추억'은 오랫동안 붙들어두는 그림이다. 구멍 하나하나마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그려넣었다. 맨 가운데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구멍이 눈에 띤다. 걱정어린 표정, 놀라는 표정, 시큰둥한 표정, 화내는 표정... 우리 이웃의 표정을 연탄 한 개에 다 모아놓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연탄 구멍은 열아홉 개였던 것 같은데, 아홉 개짜리 구공탄도 있었고...) 또 다른 작품 '막걸리 BAR'를 보면 시원한 막걸리 생각이 간절해진다.

정재훈 씨의 '희망'은 오늘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우리 이웃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그림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공부해서 골든벨을 울렸다는 파주 문산여고 3학년 지관순의 이야기를 그렸다. 뒤에서 골든벨을 축하하는 사람들 중에는 강의석 군과 지율 스님도 보인다.

금속노조신문 금속노동자에 만 3년째 만평을 기고중인 채경환 씨의 작품은 금속노동자라면 누구한테나 익숙하다. 쉽게 쉽게 그리는 그림 같지만 노동자의 투쟁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있어 시원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최정규 씨의 '곰씨 이야기'는 아이들의 생활을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그려내기 어려운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 형이 유치원에 가고 없는 동안 동생이 형의 유희왕 카드를 찾아내서 형을 난처하게 만드는 이야기, 나쁜 말을 소재로 아빠와 대화하며 생긴 해프닝 등을 내놓았다.

황우 씨의 잠수함 속에서 호흡 곤란을 느끼는 토끼 이야기를 반영한 '잠수함 속의 토끼'는 박제화된 학교 안에서 신선한 공기를 제공해 주는 교사의 상을 그리고 있다. 투명한 인사관리와 교문지도 안 하는 선생님, 학교 청소하는 선생님, 이제 막 허울 벗은 새내기 선생님 등이 등장한다.

전시는 8일까지, 남산 아래 위치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데이트 코스 삼아 들러보기 안성마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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