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폭력과 모진 고문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며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만드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가정이 쑥대밭이 되고 그들의 전 생애를 거쳐 삶을 옥죄이고 인권을 유린당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박탈당하는 서글픈 현실이 온가족이 겪는 이중 삼중의 고통이다.
‘유학생간첩’으로의 조작, 그리고 ‘탈출’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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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7월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 재학 중이자 삼성종합 수련원 일어강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대공처 수사과 분실)로 연행되었다. 연행 이유는 후배가 데모를 하다 잡혀 있으니 신원 확인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3개월의 혹독한 고문 끝에 유학생 간첩이 되었다고 했다.
불의에 저항했고 문학을 공부하던 섬세한 내면과 따뜻한 영혼을 가졌던 눈맑은 청년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잠 안 재우기와 구타 그리고 물고문 전기고문은 한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자신의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감 속에서 그는 유학생 간첩이 되었다.
보안사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능통하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보안사 근무를 회유하였다. 보안사에서 근무하면 공소 보류를 해주겠다며 강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1984년1월에서 1986년 1월까지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수사지도계(내근 1계)에서 분석과 번역 일을 하면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그는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간접적으로 경험했다고 한다. 영장도 없이 대공용의자들을 재일교포라는 이유만으로 납치와 감금과 고문을 통해 간첩을 만드는 국가폭력과 반공주의의 공포를 겪으면서 그는 1986년 대학원 논문준비를 구실로 사표를 냈고 민간인으로 계속 협조하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보안사를 탈출(?)할 수 있었다.
죽기를 각오한 그는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했다. 부인과 자식을 둔 가장으로서 드디어 일본으로의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자신을 간첩으로 조작한 보안사를 고발한 "보안사"(소나무 출판사 1988년)는 그러한 한 인간의 고난에 찬 역정의 산물인 것이다.
버릴 수 없는 조국강산과 귀향, 그리고 19년만의 성묘
그는 지난 12월 9일 일시 귀국하였다. 그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무언가에 쫒기는 듯한 조금은 불안한 모습으로 또다시 국가폭력의 전위기구였던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를 고발하고 있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정치권의 공방과 반목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의 그 떨리는 목소리로.
“반드시 올해에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합니다. 재일교포들은 한국에 가면 간첩으로 조작되어서 조국에 대한 신뢰가 없어요.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그 존재 자체가 억압이 되어왔어요”라며 국가보안법 폐지의 당위성을 힘주어 말하였다.
그는 부끄럽다고도 했다. 반인권 반문명의 국가보안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이 있어 그는 거듭 “죄송하고 부끄럽다”고 하였다.
노태우정권에 의해 15년 동안 귀국을 금지당해야 했던 이방인 '김병진'은 2000년 드디어 고국을 방문했고 올해 11월에도 방문하였다. 그는 끝내 고향과 조상의 묘를 찾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 이번 귀국길에는 반드시 조상묘에 성묘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귀국하였고 19년만에 찾은 조상의 묘 앞에서 만감이 교차한 듯 굵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죄인의 심정으로 흘린 참회의 눈물이며 불효자로서 용서를 구하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한 인간이 국가폭력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 앞에서 그 누가 감히 돌을 던질 것인가. 우리 모두도 그와 같은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기에 말이다.
어느 양심적 지식인의 초상 -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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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의 강제폐간과 조용수 사장의 사법살인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민족일보 창간 멤버이자 기획부장으로 일했던, 조용수 사장의 동생인 조용준 선생을 만났다. 장소는 광화문 조선일보 바로 뒤편의 한 독립운동단체 사무실이었다. 먼저 과거청산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상황에서 선생의 감회는 특별할 듯하였다.
“잘못된 역사는 반드시 청산해야 합니다. 기대가 큽니다. 여러분들이 중지를 모으고 좋은 방향으로 잘 풀어가리라 생각하고요. 조용수 사장의 죽음의 실체적 진실도 밝혀져야겠죠. 밝혀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조용수사장의 죽음은 명백한 국가공권력에 의한 죽음입니다.”
“민족일보와 혁신세력의 관계에 대해, 당시에 민족일보 기획부장으로 근무하신 분으로서 그 부분에 대해 말씀을 해주시죠.”
“글쎄요. 기획부는 경영에 관한 업무를 주로 관장하는 부서였지요. 그래서 제가 그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다만 4.19 이후에 혁신세력들이 정당을 결성하고 사회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형님도 청송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박정희정권에 의한 탄압과 희생으로 이어졌다.
“왜 하필이면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희생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마도 박정희의 전력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요. 박정희의 좌익 전력 있잖습니까. 그래서 박정희는 레드컴플렉스를 지우기 위해 희생양을 찾은게죠. 자신의 통치기반을 공고히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민족일보가 당시에는 양심적인 언론이었고 신문사설과 논설을 통해 분단극복과 통일에 대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으니까요. 당시 재판과정도 쿠데타 세력의 의한 지시였겠죠. 재판관들의 오판이자 엉터리 재판이었죠. 증인도 없고 수사기록 공개도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단언하건데 명백한 오판이라 믿고 있습니다.”
“조용수 사장이 간첩혐의로 사형을 당하셨는데요. 그 후에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연좌제라는 것 때문에 취업도 제한받고 해서 생계 문제가 힘들었죠. 저희가 4형제인데 대부분 자영업을 하거나 그랬습니다. 저는 일반 기업체에서 일을 했구요...”
통일을 향한 민족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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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면 정부가 걷고 있는 길은 그들이 통일문제에 부정적이라는 점을 제쳐놓고서라도 얼마나 외교에 무능하냐는 것을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 장면 정부는 "용공적인 통일보다는 차라리 분단된 상태가 낫다"는 "멸공통일론" 즉, 사실적인 반통일론을 내걸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평화, 민주, 자유에 입각한 통일을 촉진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자니까 남북대표 동시 초청안에 대해서 보여준 것과 같은 국내외적으로 그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을 줄 짐작이 간다.
여기서 남북의 반민족 집권자들이 분명히 알아둬야 할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일반 백성들은 유엔 총회에서와 국내적으로 두 집권자 중의 어느 한 쪽이 선전적으로 이기거나 어느 한 쪽만이 지배하는 결과가 되는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남한이나 북한이 유엔에 가입 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가입한 측의 집권자가 일시적으로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구실은 될지언정 전민족의 비원인 국토통일에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다시 한번 명심해야 될 것이다.(1961년 4월22일. ‘통일외교에 실패한 장정권은 물러나야 마땅하다’)
반공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어진 국가폭력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시는 이 땅 위에서 무고한 희생들이 없도록 국민의 이름으로 권력과의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항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어두웠던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희망의 미래를 열어가는 큰 물결을 만들어 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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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석 님은 의문사유가족연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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