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적, 본질적 운동이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과제다”

[인터뷰] - 정윤광, 그가 쉼 없이 달려온 40년의 운동

지난 10일 ‘내가 살아온 역사-정윤광’이라는 부제가 붙은 ‘저항의 삶’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이 책에는 오는 6월 말 서울지하철공사에서 정년퇴직하게 된 정윤광 전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 풀어낸 만 58년간의 자신의 삶 이야기가 담겼다.

1966년 대학 입학, 1974년 민청학련 활동에 의한 긴급조치 위반으로 20년 징역· 15년 자격정지 형, 1977년 용접공으로 (주)화성보일러제작소 취업, 1980년 복적· 졸업, 1985년 서울지하철 공사 입사, 1989년 노조위원장 당선·파업으로 구속·해직, 1990년 ‘연대를 위한 대공장 노동조합 회의’ 활동으로 구속, 1993년 전해투 초대의장, 2003년 서울지하철 복직, 2005년 서울지하철 정년퇴직...‘우리 시대의 모범생’이라 부를만한 정윤광 전 위원장이 쉼 없이 달려온 40년의 이력이다.

4.19 세대, 6.3세대에 이어 민청학련 출신들이 총리, 장관, 국회의원...그야말로 한국사회를 쥐고 흔드는 주류가 되었지만 이전에도 그랬듯, 현재도 ‘현장’을 지키는 민청학련 출신은 정윤광이 유일하다. 반독재 투쟁으로 시작한 그의 운동은 계급성과 변혁에 대한 자각을 통해 노동조합 활동을 거쳐, 해고자 활동을 거쳐, 민주노총을 거쳐, 민주노동당에 이르렀다. 사실 민주노동당 입당 이후 그의 활동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는 평가들이 많다. 누구처럼 의원이 된 것도 아니고 다른누구 처럼 대표나 사무총장이 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열명이 넘는 최고위원 자리에도 앉지 못했다. 이런 저런 지위를 떠나 이야기 한다손 치더라도 당내 좌파를 자임한 그의 활동과 그가 속한 의견그룹이 당내 헤게모니를 잡은 적도 없다.

그러나 정윤광은 “당활동에 대한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며 “아직 본질적인 활동을 전면적으로 하지 못했다”고 토로하며 여전히 ‘근본변혁을 위한 대중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그마한 체구에, 머리에는 흰서리가 내린 정윤광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다음은 지난 17일 정윤광 전 지하철노조 위원장과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이 달 말로 지하철 공사에서 정년퇴직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85년 1월에 입사했으니 이십년 오 개월 만에 퇴직 하는 셈이다. 내가 조직화된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온 토대가 서울지하철 노조인데 이제 정년이 되니까 좀 어리벙벙하기도 하다. 입사한지 4년이 좀 지나서 89년 3월 파업에 의해서 감옥에 갔고 그때 바로 해직 된 건 아니고 좀 지나서 90년 1월에 해고됐다. 그 후 2003년 2월에 복직됐다. 하여튼 정상적인 길을 회복해서 마치니까 좋다.

당시 오랜만에 복직해 현장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복직 당시 오히려 힘들지는 않았나

해고 기간에도 쭉 사업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노조 민주화 작업을 했기 때문에 복직 되니까 그 당시에 추진하던 민주집행부 세우기, 통일적 현장 조직 추진, 궤도와 운수를 포괄할 수 있는 산별 통합 작업들에 힘을 받을 수 있는 지렛대를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이후 파업에서 실패하긴 했지만 민주집행부를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궤도 현장 조직이나 아니면 현장 조직에 포함되지 않는 활동가를 포함한 현장 활동가 모임도 구성했다. 공동투쟁과 산별 노조 건설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는 현장 동력을 모아내려 했는데 작년 파업이 실패한 것에서 보여지 듯 좀 힘들었다. 현장조직도 더 광범위하고 힘 있게 했어야 하는데...

복직 이후 관리자들이나 사측은 어떤 태도를 보였나

뭐 사실 복직 이후에는 간접적으로 활동은 한 것이고...2003년 10월 임단투가 고비에 오를때 사측이 전면적 구조조정안을 내놓은 적이 있다. 당시 배일도 위원장을 통해서 외주 용역, 근무형태 악화가 포함된 전면적 구조조정 안을 내놓았다. 당시 지하철 노조 ‘민주파’ 쪽에서 강력하게 현장 투쟁을 했고 나도 당장 급해서 하루에 하나씩 홈페이지를 통해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 때는 공사 사장이나 간부들을 몇 차례 만난 적도 있다. 그 사람들도 직접적으로 무슨 소리는 못하고...

조합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구체적으로 하기로 하자. 경남 고성에서 중학교 까지 다니고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열달 만 다니다가 그만뒀는데

그 당시에는 사는 게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고민을 했다. 사는 게 의미가 없으면 죽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고민이 됐었다. 그래서 학업에 큰 의미가 없었던 듯 싶다. 고등학교 때는 다닌 기간도 짧고 해서 그리 친한 친구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중학교 때 헤어졌다가 고등학교 가서 다시 만나기는 했지만. 김세균 교수 같은 경우에 대학 가서 서클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이더라(웃음) 난 당시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 양반은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었고 오히려 제대하고 나서 내가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게 되니 당시에 대학원생 대표 역할을 맡았던 김세균 교수랑 자주 만나게 되곤 했지.

책을 읽어보면 군대 갔다 와서 복학생으로서 다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고 나와 있는데 여러 부분에서 힘들지는 않았나

어려서부터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다. 사춘기 들어서면서부터 대학교 입학 때까지는 인생 문제, 실존주의적 고민들이 깊었다. 군대 가기 전에도 주위에서 학생 운동 하는 걸 주의 깊게 보고 있었고 군대 가서 오히려 구체적 생각이 많았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실천 경로에 대한 고민이 군대에서 깊어졌다는 말인가

그런 면이 있다. 이상 사회를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군대에서 대학생활에 대한 경험, 고민을 더 깊게 가져갔다. 한 편으로 당시 삼선개헌이 나오는 모습, 지배자(박정희)에 대한 구체적 모습을 보게 됐다. 그래서 제대하면 평생을 사회운동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뭐 나와서는 내가 잘 모르니까 후배들한테 배우면서 시작했지.

군 생활은 어땠나? 강제 징집 세대는 아닌 걸로 아는데

71년에 위수령이 터지고 난 다음에 강제 징집이 시작됐고 또 80년대에 녹화 사업등이 있었지만 나는 강제 징집이랑은 관련이 없고, 구타를 비롯해 힘든 일들은 있었지만 그건 뭐 다들 겪은 것이고...

책을 읽어보면 민청학련 세대라는 점에 대해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 이후 민청학련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지만 사실 구체적인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당시 박정희 체제가 얼마나 폭압적인지 잘 와 닿지 않는다.

쿠테타, 민정이양 핑계로 대통령 당선, 3선개헌 이런 건 다들 잘 알테고...71년 대통령 선거 때 이 정권이 총통제로 간다는 것이 다 나와 있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총통제 반대 성명을 낸 곳도 있었다. 당시 학원가에도 중정 프락치가 공개적으로 학생과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71년 12월에 위수령이 선포되면서 학원에 실제적으로 군대가 투입됐다. 이런 판국에 이르니 형식적 민주주의를 그나마 보고 배우고 느꼈던 사람 입장에서는 희망이 바늘구멍 만큼도 없게 되는 절망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다들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서 민청학련을 통해 유신 반대 투쟁이 확장 된 것이라 판단한다.

반독재 투쟁, 민청학련 투쟁을 오늘에 판단해 보면 민족주의적 정서가 가미된 일반 민주주의적 운동에 가깝다. 625 이후 516을 거치면서 혁신적 흐름은 확실히 잘려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떤 계기로 이데올로기적 무장을 갖추게 됐는지 궁금하다.

71년경부터 각 학교 서클 들이 주최하는 전국적 토론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70년대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흐름이나, 기풍들이 맹아적 형태로 형성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철거민들이 몰려났던 광주 대단지 실태조사를 한다던가, 서울 상대 같은 경우에는 탄광에서 노동 체험을 한다던가, 판자촌 조사 보고서를 낸다던가 하는 모습들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서울대와 고대를 중심으로 규탄하는 투쟁, 노동자 기본권 쟁취 투쟁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단순히 일반 민주주의적 행동은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60년대 중반에 의 통혁당, 인혁당 같은 세력을 볼 때 구 사회주의의 흐름이 다소 있었다고 본다.

70년 가을에 복학해서 보니까 쉬쉬 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이야기들을 하고 있더라. ‘누구는 자본론을 몇 번 읽었다더라’ ‘누구는 마찌꼬바(소규모 철공소)에 들어갔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경외심과 함께 오고 가는 분위기 였다. 현장 투신 분위기가 그 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미약하나마 일제, 남북 분단기의 사회주의적 흐름이 이어져 온 것이 있고 거기다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터져 나오는 노동자, 민중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접목되기 시작했다’ 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렇다. 더 올라가보면 한일 회담에 반대했던 6.3세대부터 그런 결합이 시작되긴 했다. 그 때는 농민운동이 많았지만 장일남 선생으로 부터의 세례에가 김지하, 김영삼 정권에서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을 맡았던 김정남, 김정강(기자 주:서울대 정치학과 59학번, 한일회담 반대 투쟁과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같은 선배들이 현장에 결합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 인맥은 79년 12월에 ‘과학적 사회주의 그룹’으로 지목 중앙정보부로부터 몽땅 들려나왔다. (기자 주: 15년간 노동 현장 활동을 한 전설적 인물 김정강은 ‘과학적 사회주의 그룹’으로 수감됐다가 이후 민정당 전문위원으로 전두환 정권에 합류, 변절하게 된다) 이런 세대들이 아마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나? 김중태, 현승일 등이 6.3세대의 중심으로 비춰지지만 그 뒤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그룹들이 이미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어떤 커리큘럼을 가지고 어떻게 학습들을 진행했나

당시에는 하도 프락치가 많아서 사회주의 서적을 가지고 직접 학습을 할 수 가 없었다. 물론 사회주의 서적이 없기도 했지만. 주로 마르쿠제, E. H. 카 의 ‘역사란 무엇인가’, 박현채의 경제학 서적 같은 것이 꽤 괜찮은 책이었다. 그리고 시중에 나오는 사회주의 비판 서적을 통해 그 행간을 읽어 학습하기도 했었지, 비판적 서적을 다시 비판적으로 읽은 셈이다.(웃음)

칠십 이년, 삼년 경부터는 송정동에 빈민 운동 하러 들어갔었는데 그 때는 마오 전기를 비롯해 마오 관련 서적을 읽었다. 파농, 프레이리 같은 반제국주의적 저항 서적도 그 때 쯤 읽기 시작했던 것 같고...그 당시 분위기가 그렇지만 일본책도 많이 읽었다. 청계천 헌 책방 골목에 옛날 일본 책 찾으로 다니기도 했고...

위원장께서도 당시 징역 20년을 받았지만 김병곤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 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비롯해 대단한 사람들이 많긴 많았다는 느낌이 든다.

주로 서울 문리대 후배들이 많았는데 나보다 학번은 후배지만 운동은 먼저 시작한 67, 68학번이 선배 그룹이었고 그 중에 67학번 서중석(현재 성균과대 사학과 교수)이 중심적인 활동을 많이 했다. 후배 격이고 실무를 맡았던 70학번들이 대체로 두려움이 없고 성실했다. 민청학련 이전 교련반대 데모 때도 그랬고, 72년 유신을 거쳐 73년, 74년 민청학련 투쟁에서도 그 사람들이 주동적 역할을 했다. 70학번 중에서는 덩치도 크고 머리가 좋아 이론적으로도 돋보인 손호철(현재 서강대 정외과 교수)이 잇었고 그 밖에 의대에 양요한(당시 사회의학 연구회, 현재 부천연합병원 원장), 성대에 권영근(현재 농어촌 문제 연구소 소장)등이 있었다.

73년, 74년에는 민청학련을 비롯해 반유신투쟁이 고조됐지만 오히려 유신체제가 강화된 76년부터 78년 정도에는 오히려 잠잠했던 느낌이 든다. 박정희 체제가 강고해진 탓일까

다소간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싸움이 꾸준히 있긴 했지만 큰 싸움은 없었다. 오히려 그때는 민주노조 운동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한국노총의 그나마 개혁적인 연맹이나 도시산업선교회,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에 민청학련 세대들이 들어갔는데 그 들이 영향을 미친 면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별로 안 보이지만 저변이 확대된 시기라 볼 수 있겠다.

말씀하신대로 민청학련 세대에서 현장 투신이 많았다. 그런데 현장에 남은 사람들과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있다. 물론 현재 까지를 보면 거의 다 나왔지만...언제부터 갈리기 시작했을까

민청학련에게는 유신반대, 민주화가 첫 번째 였다.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기독교, 카톨릭, 언론 운동이 80년대에도 형성된다. 이 것이 첫 번째 측면이다. 두 번째가 노동자 민중, 이데올로기적, 민중운동 나아가 사회주의적 흐름인데 그 측면에서 볼 때도 또 민청학련 세대가 전환점이다. 사실 민청학련 투쟁은 단순히 반 유신 투쟁이 아니라 민족민중 운동, 반제 운동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킨 운동이다. 당시에도 그런 의도를 공공연히 밝혔다.

당시 주요 대학의 핵심적 주동자들은 거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민청학련 가담자는 아니지만 석탑의 장명국(기자 주 :석탑노동연구원장, 92년 대선 당시 ‘당선 가능한 야당을 밀어 정권 교체 이룩하자’는 ‘일하는 사람들의 서명 운동’ 추진,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내일신문 회장, 김대중 정권에서 YTN사장을 지냈다)도 그렇고...그런데 체계적, 이론적으로 하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광주 민중항쟁을 거친 후배 세대들이 이후에 더 실천적, 의식적으로 현장으로 들어오게 됐다.

그런 한계로 민청학련 세대가 현장에서 떨어져 나갔단 말인가

전면적 학습이 없었고, 대중적 노동자 운동으로 가지 못했고 , 물적 토대가 미약했고, 정부 탄압이 커서 전면적 대중 전략 조직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그 중에 일부는 복학도 하고 다른 분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일거에 들어가서 일거에 확 나온 것은 아니다. 민청학련을 좁은 의미로 볼 것은 아니고 그 세대들이 형성되어 온 흐름을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87년 대항쟁까지는 민청학련 세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 이후에는 서노련, 사노맹, 인민노련 혹은 주체사상파까지 여러 흐름이 생겼는데 그 중요한 흐름과 그룹을 형성하는데 영항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제적, 자격정지 이후 복적돼 80년 여름에 졸업한 것으로 안다. 졸업은 일정 정도 ‘사회적 기회’가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당시에 개인적 고민이나 유혹은 없었는가

특별히 졸업장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준다니까 또 안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미 ‘사회운동’으로 마음을 굳혔고 그 때는 학생운동의 전술 논의나 윤후상(기자 주: 당시 합동통신 기자, 한겨레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등과 제작 거부 등의 언론 운동 전술을 논의 하던 때라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체계적 학습을 받은 후배들이 현장으로 쏟아져 들어온 당시 선배 세대로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 일단 반갑기도 했을 것 같고 약간의 괴리감 같은 것도 있었을 듯 싶은데

일단 좋았지. 근데 완전히 조직적 체계를 갖춰 들어 왔다기 보다는 소그룹 식으로 들어왔는데 그런 걸 극복해야 할 측면이 아닌가하고 보기도 했다. 나는 당시의 그 흐름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600명 정도 규모가 되는 부산파이프 공장에서 일했는데 부근에 한일도로코가 있었다. 김문수가 한일도로코 위원장이었는데 우리 파업 때 찾아오곤 했다. 교류 정도라 할 수 있는 관계를 가졌고 후배나 친구들도 조직적 체계 보다는 자기 자신의 장 안에서 움직이는 흐름을 가졌다. 그 이후 서노련, 사노맹, 인천의 주사 계통의 후배들하고 교류가 있었고...그 때가지만 해도 민청학련 세대들도 조금 있고 해선 넓은 교류의 형태로 활동을 해나갔다.

85년 열관리 협회 추천으로 지하철 공사에 입사한 것으로 안다. 공기업 인데 신원조회 등에서 문제가 없었나

뭐 따지고 보면 나는 전면적인 위장 취업자는 아니다. 입사 할 때 나를 담당하던 경찰한테도 알렸고...당시에는 경찰, 안기부, 보안사 이렇게 세 군데서 주거지, 본적지를 통틀어 최소 대 여섯 번씩 신원조회를 했다. 그 걸 마치는데 한 삼개월은 걸리는데 당시 지하철에서 보일러 담당할 사람이 워낙 급해서 난 이미 일을 하고 있었고 신원조회 끝난 후에 공사 측에서 나가달라고 말했지만 못 나간다고 버텼지(웃음)
기술 지부 소속 이었나 차량 지부 소속 이었나

지금은 차량 지부로 통합됐지만 당시에는 시설 계통이라 불렀었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기에 지하철 노조가 결성됐다. 자생성과 외부의 지도가 결합이 됐겠지만 어떤 부분이 더 영향을 크게 미쳤을까

일단 자생적인 부분이 크다. 나도 입사 후에 자생적 소그룹을 만들기 시작했고 몇몇 독립적 흐름들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87년 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 사건 이후 사회 분위기가 고양되면서 노동 현장 분위기도 고양되기 시작했다. 흔히들 87년 6월로 합법 공간이 확 열리니까 노동자들이 치고 나왔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기다.

87년 1, 2월을 경과하면서 이미 고양되기 시작했다. 정세적으로 올라가면서 이미 그 때 노조들이 여기 저기서 결성된 것이다. 창동 동아건설 노조도 그 때 결성 된 것으로 기억한다. 단병호 의원이 그 때 반장인가 그랬는데 고참이지만 여러 모로 훌륭해서 위원장도 되고 그랬지. 지하철도 그 때 시도 했다가 실패했지만 6월 항쟁 이후 내가 주도하던 그룹, 역무 지부의 그룹, 차량 지부의 그룹들이 노조 결성을 준비했다.

그런다가 차량 그룹과 역무 그룹이 합세해서 노조를 결성했다. 차량과 역무 쪽에서 당시에 석탑의 장명국을 찾아갔고 배일도 위원장은 매부가 김준용(기자 주: 당시 대우 어패럴 노조 위원장. 이후 서울지하철노조 지도위원, 노사정위 공익위원, 정몽준 대선 캠프 노동특위 위원장)이라 그 쪽 영향도 받았겠지...결성 멤버는 차량 47명, 역무 10명, 기술 1명인데 나는 결성식 날 참가했다.

노조 결성식 이후 반응은 어땠나

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배일도 위원장 집에서 업무분담을 했고 임시 사무실을 여관 방을 잡아서 썼는데 수십명씩 여관방으로 가입서를 들고 왔다. 나는 기술 쪽이니까 기술지부를 조직했다. 그런데 나는 결성 직후에 가입원서에는 명단을 안 올렸다. 내 이름이 들어 있으면 탄압이 거세지는 게 불을 보듯 뻔 한 상황이었거든

88년 서울지하철 노조의 첫 파업이 기억 난다. 길게 파업이 가지는 않았지만 지하철이 완전히 섰던 걸로 기억난다. 지금은 많이 퇴색된 감이 있지만 규모나 투쟁력 면에서 서지노조를 따라올 조직이 없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그 당시 울산 현대 엔진에서부터 쭉 올라오는 어떤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조합에 대한 탄압도 있었고...내부에서는 사측을 상대로 강력하게 몰아치자는 흐름이 있었고 차근차근 하자는 그룹이 있었는데 배일도 위원장은 후자였다. 그래서 교섭과 병행해 파업을 하기로 결정했었다. 나는 당시 선전홍보 부장을 맡았는데 지하철에서 역사, 전동차를 전부 선전선동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상화된 스티커, 벽보 붙이기가 그 때 부터다.

역사, 차량에 전부 다 방송을 틀고 ‘임을 위한 행진곡’ ‘농민가’ ‘광야에서’ 같은 좀 대중적인 노래들을 쫙 틀었는데 집회 하러 올라온 지역 노동자들은 그걸 보고 “야 서울은 해방구 같다”하고 감탄하기도 했었다.

앞서 말했듯이 민청학련 세대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진다. 조직 노동자로서, 조합 활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80년대 후반 ‘민청학련 동료들과 갈라진다, 이젠 다른 길이다’ 하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는지

그 때 민통련, 민청련등이 만들어질 때 민청학련 출신들이 그 쪽 주류로 나갔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도 서로 서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각자의 역할로 분화되나가기 시작했지...군부독재 때 까지는 그래도 어떤 통일성이 있었지만 6월 항쟁 이후에는 분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겨레 민주당, 민중의 당 통합 논의가 있기도 했는데 정태윤(기자 주 :인민노련의 중심인물, 전 민중당 대변인, 이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비서실 차장, 한나라당 사이버 위원회 위원장), 제정구 등이 불러서 딱 한 번 가봤다. 떨어져 있긴 해도 그렇게 저렇게 분화되어 나가는 모습이 안타깝더라. 87년 대선에서 많이 갈라졌는데...나는 따지자면 독자후보노선이었다.

이후 지하철노조 3대 위원장으로 당선 됐다. 그리고 파업하다 구속이 되고 대공장연대회의, 공노대 활동을 하던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민청학련 세대는 운동의 분화 차원을 넘어 아예 사회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85년에 이철이 국회로 진출했고 88년에 이해찬 등이 평민련 그룹을 이뤄 평민당을 통해 국회로 나갔다. 나는 민청학련 집단의 운동적 의미는 87년으로 종결됐다고 평가한다.

인간적인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 컸을 듯 싶다.

나는 70년대 후반 이후에는 공장, 현장에 집중했다. 관심사가 넓었으면 현장 활동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민청학련 후배나 친구들을 좀 더 관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아있다.

어느 땐가 돌아보니 젊은 시절의 동지들이 옆에 남아 있지 않다는 허전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

뭐 그렇긴 하지만 나름대로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서중석, 안병욱 같은 진보적 학자들도 있고 정치판에 간 사람들이 제일 좀 그렇지만 그나마 도덕적 문제는 덜 일으키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근데 그 사람들은 ‘뇌물 덜 받는 도덕적 문제를 덜 일으키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지점까지 나가 버렸다.

그 밖에 한겨레 창간에 참여한 멤버들이나 프레시안을 창간한 이근성 등도 나름대로 자기 영역에서 개척자 역할을 하며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반독재 투쟁, 일반 민주주의 영역에서 민청학련 세대를 인정 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 독재 정권이 4.19 세대. 6.3세대 등을 간판으로 이용해 먹었지만 민청학련 세대는 간판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류를 형성했고, 신자유주의 정부에서 자신의 운동 경험을 무기로 삼는다는 혐의가 든다. 특히 노무현 정권에서 아주 심하게 다가온다. 이해찬 총리부터 해서 한 자리 씩 다 차지 하고 않아 자신들의 ‘도덕성’을 무기로 삼고 있다.

사람은 역사 속에서 변해가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 그 사람들은 옛날에 민청학련 투쟁을 경험했던 개인일 뿐이다. 지금 그들이 뭐라 선전하든지 민청학련 투쟁의 연장선에 위치 한 것은 아니다.

군부, 보수, 수구 헤게모니 하에서 점진적으로 형식적 민주화가 이뤄진 과정이 있고 그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반파쇼 투쟁을 했던 것의 의미는 있지만 지금 그 개인들은 ‘보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운동적 역할을 끝났고 지금 정치판의 민청학련 세대는 보수세력과 신자유주의를 결합해 노동자 민중과 대립하는 지점으로 가버렸다.

90년 결성했던 ‘연대를 위한 대공장노동조합 협의회’를 돌아보면 일단 이름부터가 무게감이 있고 당시 일정 의미가 부여됐는데 그 속내나 결속력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약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공장연대회의는 일단 공동 투쟁체의 상을 지녔었다. 조직적 틀로 확장시키자는 목표나 기획은 없었다. 전노협에 가입을 하거나 전노협에 가입이 여의치 않으면 전노협이 포함된 민주노조 총 조직으로 간다는 것이 간부 수준의 공감대였다. 나는 그 해 11월에 출소했는데 이미 우여곡절이 많았다. 심지어 조직적 전망들이 (전노협등과) 별도로 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전망은 강력하게 비판 받았다. 대공장이라서 작은 사업장들이 모인 조직체하고 분리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잘못된 판단이다.

지하철 노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99년 까지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크게 볼 때 ‘민주파’의 흐름이다. 그런데 배일도 의원이 99년 여름 복직하자마자 다시 득세했다. 이해하기 힘든 지점이다.

일단 전체적으로 보면 노동운동이 패퇴하는 흐름이 그 때 나타난게 아닌가 싶다.. 90년대 초반까지야 지하철이나 궤도는 서울이든 부산이든 정부정책에 전면으로 맞서 깨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94년에 김영삼 정부가 철도를 치자 연대 차원에서 파업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그 94년부터 희생도 크고 조합에 부하도 많이 걸리고 또 정권에선 시범케이스로 지하철 노조한테 강경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또 도시철도 공사도 생겼는데 정권에서 도철에는 임금도 팍팍 올려주면서 차별화를 시켜 나갔고 지하철은 해고자를 양산시키고...이런 흐름이 있었던 거다. 또 내부적인 문제점을 짚어보자면, 단사 차원 투쟁에서 머물러 발전을 못 시킨 점이 존재한다. 정치적, 전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고 투쟁의 내용이 개별 사업장 조합원의 경제적 요구에 한정됐었다. 이런 상황에서 99년 파업에 또 깨지니까 실리주의가 득세했다.

작년 지하철 노조 선거를 보니 출마한 4팀 가운데 2팀은 서로 자기가 배일도의 진정한 후계자라면서 싸우더라

사실 지하철 노조가 정체되어 있는 편이다.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민주노총 정치위원장 직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참여 한 것으로 안다

애초부터 당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결국 민주노조 총 단결 조직을 만드는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노협과 다른 단체들이 힘을 합쳐 민주노총 결성 결정을 이끌어 내는데 나름의 기여를 했다.

그리고 민주노총 만든 직후부터 투쟁과 정치세력화에 공세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가 두 가지 큰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96년 총선에도 복권만 됐으면 나도 출마했을 거다.

다양한 비판의 지점은 많지만 민주노동당이 ‘물질적으로 안착화’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국민승리 21과 민주노동당이 실질적으로 같은 조직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창당 당시부터 ‘금방 민족민주세력이 전횡하게 될 것’ ‘개량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고 참여하지 않은 세력들도 많다. 지금 민주노동당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고, 평가의 지점도 다양하겠지만 정윤광 위원장 처럼 ‘계급적 관점’을 가진 당원들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구조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딜레마였던 것은 맞다. 국민승리 21 결성당시부터 시민단체 등이 참여해 들어오면서 흐트러진 전선을 형성했다. 96년말 97년 초의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의 힘을 안아 갔어야 되는데 그 때부터 추동력이 상당히 손상 받았다. 변혁을 고민하는 좌파로서는 딜레마였다.

그래도 보수정당에 대당하는 진보정당은 있어야 하지 않냐는 요구가 있었고 역사적 소명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그런데 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 21이 ‘일어나라 코리아’ 파문(기자 주: 97년 대선에서 국승 21은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제목이 붙은 태극기가 대거 등장하는 선거 광고를 내놓았다. 내부 지역조직의 반발도 거셌고 IMF체제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광고는 보수 후보들과 한치도 다를 바 없다는 국승 21 외부의 비판도 상당히 컸다.) 등 똑똑치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얻을 표도 제대로 못 얻고 모아 온 사람들도 다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다. 잘못 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오세철, 김세균 교수등에게 같이 하자고 말했었고...

하여튼 대선 이후에는 노사정위, 노개위에 참여하면서 흔들리는 민주노총에서 이갑용 위원장을 당선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 됐는데 이미 국민승리21이랑 같이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독자적 길이 없었다.

그나마 국민승리21이 자기들이 주도 할테니 판만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민주노총 결의로 창당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창당 이후 활동은 어떻게 평가하나

창당 전의 딜레마에 대해선 앞서 말했고 창당 이후 닥친 딜레마는 당내 왼쪽 날개를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당시에 범민중 통합 후보를 시도했는데 잘 안 됐고...그 이후에는 당직과 공직 분리, 최고위원회 집단 지도체제등 나름의 안전판을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이른바 ‘NL'진영이 민주노동당을 다 장악했다.

민주노총, 전농, 민중연대, 민주노동당 까지 다 석권한 것이다. 이런 것은 분명히 운동 전체에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들이 지닌 사상노선의 경향이 일정하게 있는 것인데 그들은 스스로를 남측의 변혁 주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이다 보니 반미, 반제, 통일, 국가보안법 철폐만이 주된 주제가 되고 있고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고통을 타파하고 해방으로 가는 주체와 방향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내 혁신운동 같은 걸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중적 정치운동이 필요하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당내 의견그룹인 평등연대를 조직해서 활동했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 평등연대의 활동은 당혁신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혁신 정도로 안 된다. 변혁을 위한 정치적 조직, 사회주의를 명확하게 지향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도출됐다.

노동자의 힘, 사회당 하고도 같이 가는 것을 생각했다. 현재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완벽하게 사회주의적이지는 않지만 평등연대가 당내 블록으로 서고 앞에 말한 조직들, 민주노총 내의 활동가들도 포괄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 지점에서 평등연대 해산되고 해방연대가 결성된 것인가

그렇다. 그런데 평등연대는 완전히 해산하고 개인 자격으로 평등연대 회원들이 해방연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는데 당내에는 독자적으로 따로 ‘전진’도 생기고...이런 저런 이유로 해방연대 결성은 아직 성공적으로 되지는 못하고 있다.

긴 시간 동안 오랜 세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바로 이달 말이면 퇴직이고 학생 운동부터 따지면 운동 현장 경력이 40년이 되간다. 정윤광 위원장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보면 다시 한 굽이가 정리되고 한 굽이를 시작하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싱거운 이야기지만, 어떤 감회가 드는지 듣고 싶다.

70년도에 제대하고 사회운동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배웠고 노동자가 변혁의 주력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운동을 해왔다. 내 노동운동 30년, 그리고 지하철에 와서 본격적 조직 노동운동 20년을 보면 본질적인 운동을 전면적으로 하지 못 했다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노동운동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을 했고 당 운동의 측면에서는 ‘흐름’을 만들어가고자 했는데 당내 조합주의에 멈춰있는...여전히 출발지점에 서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전면적인 ‘변혁을 위한 대중운동’을 해오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도 되고...보다 근본적인 정치변혁 운동, 선진 노동자들부터 모든 사람들이 모여 전 계급적이고 정세적인 운동을 이제는 풀어나가야 한다.

그런 운동은 정확한 자기 목표와 자기 전술을 가지고 해나갈 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부분적인 운동은 부분적인 것일 뿐이다. 지금은 경제투쟁 다음은 정치 투쟁 하는 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준비론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본질적인 것을 해야 한다. 노동운동과 당운동 모두 질곡에 놓여있는데 이것을 타개해나가는 전망을 열어나가는 것이 남아있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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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 정윤광 , 해방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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