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우리',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특별기획 : 굿바이 한겨레](7) - '제2창간 위원 일동'은 부디 정신을 차리시라

한겨레, 꿈은 이루어지고

참세상 창간을 알리는 포스터의 카피는 '분해서 만들었다'였다. 이 카피는 한 현장 활동가가 창간준비위 실행단에 낸 의견이었고, 실행단은 많은 후보를 물리치고 '분해서 만들었다'를 포스터 카피로 채택했다.

  민중언론 참세상 창간 포스터
포스터에는 '명분없는 파업 설자리 없다', '노대통령, 올해는 사회적으로 큰 갈등이나 싸울 일은 없을 것 같다', '삼성 전략적 공헌 돌아보면 기쁨 두 배', '민주노총은 김대환 노동부장관의 충고에 따라...'와 같은 내용을 담았다. 참세상이 '분하다'고 선언한 내용들인데, 그것은 조중동이나 경제일간지 뿐만 아니라 한겨레 같은 개혁언론을 포함한 언론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최근 '현장에서미래를' 7월호에 '끼리끼리 한겨레'라는 글이 실렸는데, 제2창간을 소재로 철도노동자 이영민 씨가 쓴 글이다. "한겨레가 처음 배달되었을 때는 읽는데 두어 시간이 넘게 걸렸다. 요즘은 화장실에서 제목이나 십분 쯤 훑어보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골통들이 노동운동의 이빨을 빼기 위해 뺀찌를 들고 달려들었다면, 한겨레는 콜라를 계속 퍼 먹여 이빨을 삭게 하려는 것 같다"는 내용이다. 현장활동가들을 만나보면 한겨레는 이미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있음이 피부로 느껴진다.

17년 전 한겨레는 독재체제 청산, 국민이 주인되는 진정한 민주화, 사회정의 실현, 민족정기 바로잡기와 같은 민족적, 역사적 과제를 자신의 임무로 선언하였다. 당시 그러한 과제는 실로 역사적인 것이었다. 그로부터 큰 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집권과 함께 개혁과 민주주의를 위한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왔고, 지금도 개혁언론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윽고 자유주의자와 민주화세력의 연속된 집권과 함께 한겨레의 꿈은 모두 실현되었다. 특히 노무현정권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제2창간이 선언되면서 한겨레가 17년 전에 꿈꾸었던 과제들 대부분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고무된 한겨레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 소식을 가장 들뜬 표정으로 전한 신문은 한겨레다. 한겨레는 '성숙한 우리 모두의 승리다' 제하의 사설을 통해 "정치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낡은 정치에 대한 승리 △패거리 저질문화, 기득권 지배체제에 대한 승리 △색깔론에 대한 승리 △외세 외풍에 대한 승리라고 썼다.

한겨레는 또 노무현정권의 우선 과제를 △부패 추방과 깨끗한 정치의 실현 △햇볕정책을 발전시켜 한반도 평화정착 구도 굳히는 것 △지역 대립구도를 타파해 국민통합을 이루는 것 △사회적 갈등의 해소 등 네 가지를 들었다. 특히 사회적 갈등의 해소와 관련, 김대중정권의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겹쳐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고, 경기 전망도 어두운 전망이어서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해 지혜를 짜야 한다고 주문했다.

[출처: 한겨레신문]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화답하듯 취임사를 통해 '동북아 시대'를 선언했다. 취임사의 키워드는 '개혁', '국민통합',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였다. 그런데 취임사는 한겨레의 바램과는 달리 '정치혁명'이긴 하나 미완의 정치혁명이었음을 보여준다. 한-미동맹의 강조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로 하여금 의구심을 자아냈고,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와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단절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점에서 '국민통합' 이야기는 공허해 보였다. 정치혁명을 일군 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계승과 강화하는 발언이 쏟아지자 노무현정권에 대한 우려는 삽시간에 확산되었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과 손배가압류 및 노동탄압에 대해 한겨레는 '고뇌하는 대통령'을 만평으로 다루었다. 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재벌들은 불평을 하는데, 그 중간에서 대통령이 얼마나 입장 난처하겠느냐는 내용을 담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화와 타협을 통한 노사문제 해결 의지가 왜곡되기 시작한 징후였다. 대통령의 '대화와 타협' 노력은 집권 6개월 만에 철도노동자 파업 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대화와 타협' 대신 '법과 원칙'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익을 발언하고 열린우리당이 파병을 결정하자 지지세력은 민주주의와 개혁의 가치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방문에서 보인 행보와 형무소 발언은 지지세력에게 분열증을 가져다 주었다. 동북아 시대를 맞는 개방 노선과 함께 WTO 양허안을 제출하자 교육 주체들이 저항하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강행하자 농민이 분을 삭이지 않았다. 정치혁명을 이룬 대통령은 공권력의 도움 없이 광주 망월동조차 방문하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고,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탄식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2003년 15주년, 한반도 평화에 주목

이즈음 한겨레는 창간 15돌을 맞아 사설 '평화지킴이 진보정론지로 거듭날 터'를 실었다. 사설은 '민족 민주 민권의 깃발로'와 '이젠 동북아 평화를 주도' 등 크게 두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창간이래 줄기차게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의 생존권과 인권보호, 온갖 종류의 차별과 억압의 철폐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물론 이 발걸음은 계속될 것"인데,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내는 일이 이 시대 참언론의 으뜸가는 구실"이고,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굳건하게 자리잡지 않는 한 그동안 한겨레가 추구해온 민주화·사회정의·인권·평등 등 모든 소중한 가치들이 하루아침에 유린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출처: 한겨레신문]
한반도 평화와 관련, '상생의 한반도' 기획 기사 가운데는 '철의 실크로드 동북아번영 기관차'라는 기사가 눈에 띤다. 1만Km 물류 대동맥 경의선으로 '실핏줄' 잇기, 이르쿠츠크 가스전 한-중-러 연결하는 '에너지 철길', '동북아개발금융협의체' 등을 다룬다. "동북아는 자원과 노동력, 기술, 자본이 조각나 있는 곳"이어서 "석탄공동체에서 경제공동체로, 나아가 정치공동체로 발전한 유럽의 모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동북아평화번영공동체 구상을 담고 있다. 2년이 지난 지금, 철도공사의 러시아유전 투자 비리가 불거질 것을 내다보지 못한 것까지 한겨레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한반도 평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 주의하지 않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말하자면, 한반도 평화체제가 중요한만큼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한 경로와 방법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는데, 한겨레는 노무현정권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과 동북아 단일 시장 구상을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획글 중 하나인 '분단 종착역 개성 통일 시발역으로' 기사는 "개성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되는 본보기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통일이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라는 개성시 인민위원회 사업국장의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어야 하지만, 한반도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할 구성원들의 의사가 배제된 채 자본 논리가 여과없이 반영된 '상생의 한반도'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획이었다.

2003년 하반기 노무현정권은 '동북아경제중심 추진-경제자유구역-글로벌스탠다드-통합적 노사관계'의 골격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노동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이 정책은 많은 노동자의 잇따른 자결과 분신을 불렀다. 9월 추가파병을 결정하면서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도덕성 문제까지 제기해 곤혹을 치렀다. '북핵-추가 파병 결정-노동자의 자결과 분신-대선비자금' 등 정국을 휘어잡는 문제가 연이어 불거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신임-국민투표 카드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 때 노동자의 저항은 96,97년 총파업투쟁 이후 최고조를 이루었고, 노무현정권의 노동유연화 정책이 노동자와의 대결 대립을 추동하는 원인이라는 점이 전사회적으로 확인되기에 이른다.

2004년 16주년, 대한민국 새 틀 짜기 의욕은 앞서고

2004년 상반기는 탄핵과 총선이 정세의 분수령을 이룬다. 한나라-민주당-자민련이 공조한 정치 공세는 노무현정권을 한 칼에 휘어잡을 듯 했다. 한민련은 수적 우세를 밀어붙여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한민련은 4월 총선에서 탄핵의 후과를 단단히 치러야 했고, 열린우리당은 여대야소의 짜릿한 성과를 맛보았다.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는 가운데 여야 '상생의 정치' 무드가 커졌다. 창간 16돌을 맞는 한겨레는 장기기획 '대한민국 새틀을 짜자'를 연재했다. 한겨레는 기획 머리에 "2002년 대선과 올 4·15총선 그리고 지난 14일 탄핵심판의 최종 마무리로 한국사회는 87년 6월항쟁 이후 지연돼 왔던 민주화를 비로소 완성해냈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창간 특별기획팀은 "반세기 냉전반공보수체제는, 1400만 노동자와 600만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치세력을 용인하지 않았고, ... 대한민국은, 지금껏 '공화국'이 아니었던 것이다"라고 과거를 정의하고, "그런데 (2002년 대통령 선거와) 4·15총선으로, 나라 안팎으로 '냉전보수정치 독점구도'와 '동북아 냉전정치구도'에서 벗어날 발판이 마련됐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다시 던져졌다"는 시대 인식을 내놓았다.

2002년에는 '정치혁명'을, 2004년에는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한마음으로 겪어온 한겨레, 이윽고 용기백배한 한겨레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의 물음을, '대한민국 새 판 짜기'의 실천적 과제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한겨레 특별취재팀은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속에서, 냉전분단국가에서 정상국가로 이행해가고 있고"(김동춘), "민주화와 세계화의 이중적 과정으로 전개되고 있으며"(조희연), "좌든 우든 사회의 우선 가치로서 공공성(공익)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렇지 못하다"(홍세화). "정치지형의 선진화는 보수(자본)-진보(노동)-녹색의 3자 정립으로 갈 수밖에 없다"(홍성태)는 등의 조언을 자신의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한겨레 특별취재팀의 기획은 진보세력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으로부터는 "범개혁·진보 진영에서는,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인 우리당과 계급적 진보정당인 민노당 사이의 접점을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진전과 완성'에서 찾는다"(최장집), 나아가 "지금까지 냉전·수구세력이 누려온 특권과 이데올로기를 확실히 퇴장시키고, 폭넓은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힘을 쏟지 않으면, 또다시 개혁·진보세력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손호철), "경제와 안보 문제가 (개혁·진보 진영의) 아킬레스건이자 시험대가 될 것이다"(장하준)라는 답을 받아 적는다.

그러나 대한민국 새 판 짜기 구상은 딱 거기에 머물렀다. "이번 총선에서 개혁·진보세력은 국민들한테 실제 역량 이상의 권력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고, 그것도 우리 사회의 새로운 제도와 틀을 만들어 가야 한다. 범진보진영은 전략적·정치적 판단보다는 이런 역사적 엄중함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김동춘)는 과제의식 정도를 제기하는 데 그친다.

'이렇게 바꾸자'에서는 △갈등해소, 기본부터 다시 하자 △건강한 노동을 성장의 디딤돌로 △복지가 사회통합의 바탕이다 △성장의 혜택이 고루 가는 경제 △중간국가 외교로 지역협력 동맹강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바탕한 정치 등을 연재한다. 도발적으로 들고 나온 '바꾸자'는 의제는 의욕은 앞서지만 대안의 측면에서는 실망스러웠다.

부안 항쟁과 관련, 핵 폐기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갈등을 예방하는 절차로 합의회의, 시민배심원제, 시나리오 워크숍, 규제협상, 공론조사 등을 제시했다. 또 갈등예방에 실패하더라도 전문적인 중재자와 협상가의 도움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철환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거나 "외국처럼 관련법령과 전담기관을 세우고 처분기금의 징수와 관리권을 사업자에서 국가로 넘기는 제도정비가 시급하다"(최종원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원론적인 언급을 넘지 못했다.

'건강한 노동을 성장의 디딤돌로'에서는 "사회통합형 노사관계를 통해, 전체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생활이 튼튼해져야 경제가 안정적인 성장궤도에 올라 설 수 있다"는 주장을 강조했고, '복지가 사회통합의 바탕이다'에서는 분배정책에 대한 진지한 성찰 대신 "빈곤의 고통에서 헤어나기 몸부림치는 이웃을 돕고 이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결론으로 원인 진단과 결론을 모두 피해간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노동유연화와 비정규직 확산을 배경으로 사회적 합의체제를 구축하려는 선진노사관계로드맵으로 구체화된 바 있고, 참여복지는 사회적 빈곤의 근본적인 해결이 아닌 임시 처방에 불과해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문제제기 된 내용들이다.

2005년 제2창간, 붕 뜬 '역사적 소임'

1년 전 '대한민국 새 틀 짜기'에 나섰던 한겨레, 지금은 대한민국은커녕 한겨레 새 틀 짜기에도 급급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는 제2창간과 함께 "한겨레의 역사적 소임은 이제부터다"라고 선언했다. 과연 그럴까. 한겨레의 역사적 소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제2창간에서 밝힌 포부처럼 '광산의 갱속 카나리아'가 되어 앞으로도 계속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 활약할 수 있을까.

17년 전 3342명의 창간발기인과 6만2천여 국민주주가 모여 만든 신문, 군사독재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 민족, 민생, 민중언론의 장을 열었던 신문,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부정과 부패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혁혁한 공을 세웠던 신문, 오랜 시간 노동자와 농민과 빈민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주었던 신문,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신문'으로 세계 언론사에 획을 그었던 신문, 뉴미디어의 출현과 종이신문의 위기라는 미디어환경 속에 제2창간을 통해 역사적 소임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신문, 한겨레.

한겨레는 제2창간사에서 오늘날 한국 정치 상황이 "민주 대 반민주, 군사독재 세력 대 민주화운동 세력이란 대립 구도는 사실상 종식의 길로" 들어섰고 "국민들은 이제 우리 사회가 형식적 제도적 민주주의 실현 단계에서 질적 내용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령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노무현정권이 실질적 민주주의의 퇴보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적어도 제도·절차적 수준에서는 크게 발전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의 기준에선 그 발전이 현저히 퇴보했다"는 지적이다. 김영삼정권 이래 민주정부들이 권위주의 정부보다 더 성장-재벌 중심의 경제 사회정책을 추진해왔다는 것이며, "재벌이 중심이 되고 하위파트너로서 국가의 정책이 그에 봉사하는 '재벌-국가 동맹'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질적, 내용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단계'라는 표현은 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질적, 내용적 민주주의'는 의미에 있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뜻한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발생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급진적인 방안이거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라 심화되는 문제들, 제국주의와 전쟁, 사회적 빈곤, 노동유연화, 공공성의 몰락, 생태 파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기하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지적대로라면 퇴보하고 있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성장-재벌 중심의 경제 사회정책과 '재벌-국가 동맹'을 넘거나 해체하는 조치 등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럼 점에서 한겨레가 제2창간에서 표현하는 '질적, 내용적 민주주의'는 어째 진지하다거나 진정성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얄팍한 야바우꾼의 사탕발림 같아 몹시 언짢다. 한겨레가 제2창간 운동에 앞장서 참여하는 것은 "국민들이 원하는 민주적 가치들을 다양하게 심화시켜 자유와 인권과 복지의 증대, 나아가 겨레의 통일과 국제사회의 평화에 기여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진보언론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서도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룩한 선진국에서는 하나같이 진보와 보수가 국리민복을 위해 경쟁"하는데,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가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국민이 원하는 민주적 가치'가 어떤 가치인지 가름하기 어렵고, '자유와 인권과 복지의 증대'나 '통일과 국제사회의 평화'라는 문구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충분히 표현했다고 보기 어렵다. '대한민국 새 판 짜기'의 구체적인 경로를 제시하거나, '자유, 인권, 복지, 통일'의 구체 정책을 드러내거나,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 모순에 대한 해결 전망을 언급했다면 모를까, 한겨레 17년을 들었다 놓는 제2창간을 하는 마당에서 '국민이 원하는 민주적 가치'라는 국민교육헌장식 코멘트로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건 괘씸하기 짝이 없지 않는가.

17년 전 창간사에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유린해온 오랜 독재체제 청산 △비민주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국민이 주인되는 진정한 민주화 실현 △분단을 극복하여 민족의 생존권 확보 △사회정의 실현과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것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정체성을 분명히 했던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제2창간 이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 무색한 한겨레

5월 24일 한겨레는 고정칼럼니스트 안경환의 칼럼 '학생운동과 선생의 역할'을 실었다. 고대 사건에서 참가한 학생들을 말리지 않은 교수들을 비판하고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옹호하는 글이었다. 이에 노조가 문제제기를 했고 대학생 두 명이 한겨레신문 사옥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는 일이 있었다. 제2창간 이후 100여 일 동안 한겨레를 둘러싸고 벌어진 가장 큰 소동이다.

정태기 사장이 5월 1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 '노동조합 없다'는 이유로 시위를 한 고대 학생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정서적으로 맞지 않으면 삼성에 안가면 되는 것이다. 그럼 삼성(존재)을 부정하겠느냐"는 발언이 있은 직후의 일이다 "창간할 때 염불 외듯 주문한 게 '우리는 바퀴자국이 없는 길을 가야 산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서는 백전백패'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조·중·동을 굉장히 많이 닮아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권태선 편집국장, 정태기 사장
제2창간으로 큰소리친 것에 비하면 한껏 풀어진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비근한 예는 4월 2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한겨레가 다른 신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삼성그룹의 지원을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국민주신문 한겨레가 특정 기업의 지원을 받는 데 대해 어떻게 보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태기 사장은 "모순이다. 한겨레뿐만 아니라 한국 신문들이 대부분 대기업 의존도가 높다. 꺼림칙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경제 구조의 탓이다. 그것을 제쳐놓고 비중만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비껴갔다.

창간 특집 좌담에서는 한 독자가 "노동 문제를 바라보는 한겨레의 시각이 매우 보수화 되어가는 느낌이 들어요"라는 질문을 하자 권태선 편집국장이 "노동 문제는 한겨레에서 매우 중요해요. 제가 사회부장일 때 광고주가 '노동자들 편만 드는 신문'이라고 말하는 모습도 봤어요. 반면, 노동계는 '한겨레가 노동자의 처지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출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는 사용자에 비해 약자예요. 한겨레는 기본적으로 약자의 편이라는 건 분명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노동 문제나 노동운동을 보도하는 한겨레의 기조에 대해서는 윤태곤 기자가 '굿바이 한겨레(6) - 노동운동을 순치시켜라!'에서 자세히 짚은 바 있다. 지금 노동자한테는 노동자 '편만 드는 신문'이 필요한 게 아니라 노동자 '편을 어떻게 잘 드는 신문'이 필요한가가 요구된다. 신자유주의 유연화 공세와 자본의 노동자 분할 공작이 입체적으로 작동되고 있어서 그저 편만 드는 것으로는 곤란하다. 편을 들더라도 잘, 제대로 들어야 한다. 광고주의 눈치를 봐야하는 한겨레로서 '기본적으로 약자의 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금 한겨레가 약자의 편을 어떻게 들어주고 있는지 사례를 뒤져보면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다.

한편 지난 2월 한겨레는 지상파 DMB 사업에서 sbs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는데, 정태기 사장은 이에 대해 "한겨레라는 이미지가 sbs에 보탬이 되고 한겨레와의 제휴를 통해 sbs의 공영성이 강화된다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지 않나. 손해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덩달아 권태선 편집국장도 "DMB 진출은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죠. sbs가 이 분야에 노하우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DMB 사업 제휴가 한겨레의 콘텐츠에 영향을 주지는 않아요. 오히려 한겨레와의 사업 제휴가 sbs의 공익성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할 걸로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대수롭지 않는 사업상의 해프닝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겨레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띠는 sbs와 손잡은 데 대해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념의 차이와 무관하게 한겨레가 sbs와 결합한 것은 일례에 불과하다. 이념도, 체면도 없다. 소위 언론사로서 비판의 역할, 견제의 책임은 일찌감치 포기했다"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한겨레는 살아있는 민주주의 투쟁 실록이다. 한겨레는 2004년 16주년 기획을 여는 말에서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찬양하였다. 1년 만에 그 공화국이 정치 위기에 몰려 보수대연합을 열어놓고 개헌을 거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세등등하게 '대한민국 새 판 짜기'에 나서던 그 투지를 다시 재연할 수 있을까. 유감이지만 한겨레의 '역사적 소임'에 대해 회의적이다.

한겨레는 지금 둘 중 하나의 상황에 처해있다. 자유주의적인 소임을 '진보적 소임'으로 의식적으로 바꿔치기하며 수명을 늘려 가거나, '역사적 소임'을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한 채 엉거주춤 과거의 영화에 기대어 버티거나.

참세상이 한겨레를 신자유주의 개혁언론으로 규정하고 "타격할 것은 타격해야 한다"는 문제를 던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 기인한다. 우리 사회는 민주와 반민주 전선이 붕괴(완성)되었지만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전국적인 전선은 형성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전선이나 '새로운' 민주주의와 개혁의 가치를 제기하면 실눈을 뜨고 의심하거나 거론 자체를 금기시하고 불편해하는 모습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개혁언론을 타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이종태 전 말지 편집부장은 "해방 이후 반세기동안 독재와 외세에 맞서는 과정에서 형성된 범민주화세력이 드디어 개혁과 진보, 혹은 자유주의와 좌파로 본격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징후인지도 모른다"(말지 5월호 칼럼)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범민주화세력이 '진보'로 상징될 수 있었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라는 고무적인 소감을 덧붙였다. 이는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사실일 수 있고, 또 참세상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세심하게 지적해준 대로 '지나친 낙관'이라는 점에서 의지 과잉이고, '신자유주의 이후'라는 악조건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점에서 시의 적절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낡은 운동은 마감했으되 새로운 운동이 출현하지 않는 과도적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굿바이 한겨레' 이후에 대해서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볼 일이다. 새로운 운동은 좌파적 보편성을 시민사회의 주류 정체성으로 전환시켜내는 것과 맞물려 있는 만큼, 이 과정에서 민중언론은 언론으로서 할 수 있는 일정한 역할이 있으리라 믿는다.

한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어 분명히 해둔다. '굿바이 한겨레'는 한겨레에 대한 단순한 작별 인사가 아니다. '굿바이 한겨레'는 변화하는 것에 대해 변화하지 않으려는 것, 오늘 한국 사회에서 한겨레로 상징되는 모든 죽어있는 가치에 대한 부정이다. '굿바이 한겨레'는 좌파적 보편성의 확산을 통해 이 죽어있는 가치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신자유주의 이후'를 돌파하는 새로운 가치 생성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의 표현이다. '굿바이 한겨레'가 지금 비록 큰 힘은 아니지만 의지와 약속을 굽히거나 접지는 않을 터, 한겨레 제2창간 위원 일동은 부디 정신을 차리시라.

"88년 한겨레 창간에의 동참은 암흑의 시대에 민주주의의 개화를 굳게 믿은 이들의 고귀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한겨레 제2창간 운동에 동참함으로써, 한겨레가 자유와 인권, 복지국가 정착에 앞장서고, 겨레의 하나됨에 기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모든 시민들의 동참을 기대합니다. 2005년 6월 7일 한겨레 제2창간 위원 일동"(제2 창간사)

[특별기획 - 굿바이 한겨레]

(프롤로그) - 88년의 운동권 신문, 2004년 업계 4위로
1회 - 한겨레, 그 벅찬 전사(前史)
2회 - ‘민주화’의 도래 그리고 시작된 변모
3회 - 새로운 이너서클
4회 - 상생? 상생!
5회 -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 가능한가?
6회 - 노동운동을 순치시켜라!
7회 -‘그들’과 ‘우리’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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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건의할 데가 없어서 이 의견란을 빌어 씁니다.
    참세상하면 그래도 노동자의 권리와 투쟁을 대변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파업 3일차인 현재 왜 아시아나 파업에 대한 기사가 하나도 없는거죠
    새롭운 매체를 만들고 편성 기조가 바뀐 건가요. 아니면 아직 기사를 작성하지 못한건가요. 좀 너무하네요. 참세상.
    어제 오늘 들어왔다가 헛탕만 치고 나갑니다.

  • 독자2

    참세상이 빨리 크기 바랍니다.한겨레 기획은 재미있었습니다. 너무 비판 일색이어서 좀 아쉽긴 합니다만 비난받아 싼 한겨레니까.. 참세상의 시각으로 이런 기획글을 많이 실어주길 바랍니다.

  • 놀고있네

    바로 윗분 혹시 한글 못읽나요?

  • horsain

    물론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나, 한겨레를 창간했던 세대는 이제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에 있다. 사회전체의 평균적인 민주화를 염원했던 이들이 현재의 정체성이 한겨레의 정체성과 맞물린다. 군사독재시절의 한겨레의 역할과 신자유주의시대의 역할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노가 한겨레를 찾은 것도 그 세대의 상징에 대한 인사 아닌가? 비판은 하되, 중도 신문 한겨레의 역할은 놔두고 좌파 신문은 자신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기자께 하나 질문, 무지해서 그런데 총매출이 800억이라면서 삼성의 지원을 왜 받는가 의문이다. 프롤로그에서 한겨레가 거의 재벌 신문이라도 되는 양 터트리고 시작했는데, 대기업에게 지원을 받는다니, 앞뒤가 안 맞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