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적 단결과 연대, 그리고"

[특별기획 : 2005년 한국의 노동자](7) - 위기 그후①

지난 8월 26일 개최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한노정연)의 10주년 기념 심포지움 주제는 ‘노동운동 위기논쟁을 넘어 - 계급적 노동운동의 전망’이었다. 박성인 한노정연 소장은 심포지움 서두에 “위기논쟁을 시급히 마무리 짓자”고 주장했다. 이는 노동운동에 ‘위기’라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다 총체적인 위기상황, 즉 자본의 위기와 한국 사회의 위기에 주목하면서 자학적 노동운동 위기논쟁을 벗어나 변혁의 전략을 마련하자는 취지였다.

노동운동 위기논쟁이 1년여를 경과하며 내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점차 제기되고 있다. 위기의 징후와 현상, 원인에 대한 진단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고 심지어 ‘위기론’ 자체를 거부하는 주장도 있었지만 큰 흐름은 ‘위기’를 인정하고 이제 이의 극복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논쟁의 와중에서 실천적인 해법도 여러 차례 제기됐다. 물론 진단과 해법이 분명한 구획으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나, 노동조합의 낮은 조직률과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을 주요 위기로 진단하는 논리에서는 비정규직 조직을 통한 조직 확대와 산별노조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지금까지의 노동운동이 지나치게 ‘투쟁 만능주의’, ‘전투적 조합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대화와 교섭, ‘사회적 합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 노조 간부의 비리로 몸살을 겪었던 한국노총과 대공장노조들은 재정의 투명성과 규율, 도덕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 민주노총 조직혁신안

민주노총이 진단하고 있는 위기는 이렇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와 산별노조운동의 답보는 분파주의, 도덕적 불감증, 기업별 정규직 중심의 운동, 실리주의 고착화를 낳았고 이는 조직민주주의와 도덕성의 위기로 이어진다. 이것은 곧 ‘지도력의 위기’이고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의 위기와 사회적 연대성, 계급대표성의 위기라는 것이다.

이에 민주노총은 조직혁신사업을 “처지와 조건, 소속과 견해의 차이를 초월하여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정신으로 전조직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 절대 절명의 과제”로 정했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성과 계급대표성의 확립이라는 양쪽의 수레바퀴를 거대담론으로 확장하는 사업, 정체와 답보상태에 빠진 산별노조건설운동의 추동력을 재확립하여 돌파하는 사업, 조직 민주주의 확립과 도덕성의 회복하는 사업, 지도집행력의 강화와 현장조직력의 강화로 이어지는 혁신사업을 전조직적으로 전개해 가야 한다”며 비장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는 지난해 3월 3일 민주노총 1차 중앙위원회에서 정한 ‘조직혁신사업방침’에 따라 12월 15일 구성된 ‘조직혁신위원회’의 진단으로, 혁신위는 7월 23일 혁신안을 확정하여 지역본부별로 현장 순회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위와 같은 위기 진단에 따라 △산별추진 △대의원 선거제도, 구성과 운영의 혁신 △비리엄단, 재정투명성 강화 △재정안정성 강화 △조직집행체계의 정비 △정책대응력, 교육문화사업 강화의 6대 혁신안을 내놓았다. 이 혁신안에는 2006년 3월 산별전환 조합원 총투표, 차별해소 로드맵, 파견 대의원 직선제, 규율위원회 설치, 간부 도덕교육 등 구체적인 계획들도 적시돼 있다.

민주노총이 이 같은 자구책을 내놓으며 ‘위기’를 돌파하는 ‘혁신’의 모색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연맹별, 지역별 현장 토론이 기대만큼 활발하지 않을뿐더러 내용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민주노총이 제시한 위기의 원인과 진단이 잘못됐다는 견해부터 산별노조에 대한 무조건적 당위성 주장이라거나 형식적이고 상층 중심적인 논리라는 비판까지 다양하다.

위기 극복 일환으로서의 산별노조 건설 방안

민주노총 조직혁신위원회는 위기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산별노조 건설 운동의 정체와 답보’를 들고 “이러한 약점이 현 위기구조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적 돌파구는 산별노조운동의 성패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산별노조 운동을 잘 못해서 위기가 왔으니 산별노조 건설 운동을 잘 하자’는 논리의 적합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산별노조 건설의 구체적인 상과 경로, 실천 방안 없이 ‘2006년 3월’이라는 투표일정만 제시된 데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또 서울지역본부 등에서는 민주노총이 추진하고 있는 산별 추진안이 연맹별, 업종별 구획에 중심을 두고 있다거나 질적 전환이 아닌 양적 확장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비판해 온 바 있다. 이미 공공연맹이 ‘공공 대산별’을 목표로 산별노조건설추진기획단을 꾸려 현장토론을 해 왔고 노동계 일각에서 각자 산별노조의 바람직한 상에 대해 구체적인 주장들을 내놓고 있는 실정에서 산별노조건설특위와 실천단 구성, 조합원 총투표, 비정규직 조직 가입만을 실천 방안으로 제시한 민주노총 혁신안은 구체성과 계획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이경수 민주노총 충남지역본부 본부장은 혁신안에 제시된 산별노조 건설안에 대해 “산별노조의 경로나 ‘어떤 산별’을 만들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지 않고 ‘기간’만을 제시하는 것은 너무 획일적이다”는 견해를 내놨다. 산별노조 건설의 중요성에 비해 대중적 논의 없이 너무 성급하다는 것. 그는 “산별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공공연맹의 경우에도 내년 3월은 너무 빠르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산별노조의 실험을 거친 바에 의하면 산별 건설은 만만치 않은 문제”라고 우려했다. 더불어 “보건이나 금속같은 (업종별)형식의 산별노조가 물론 장점도 있겠지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전국단일노조’와 같은 논의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영수 한노정연 부소장은 산별노조의 건설 원칙에 대해 “노자간의 계급 대립성을 강화하고 노동자계급으로서는 내부 단결을 강화할 수 있는 산별노조”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는 기 건설된 산별노조, 소산별노조들에 대해서 △결성 자체가 계급적 단결에 기초하면서 결성된 것이 아니고 △계급 대립의 강화를 위한 노력의 부재 △기업단위 조직체계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소산별노조로서의 형식적 체계조차 유지하지 못함 △지역 집중도에 따른 지역간 운동 차별성의 문제 등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산업을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구획한 상태에서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을 두 개의 노조로 조직한다는 ‘지역별 산별노조’안을 주장했다.

이에 앞서 김동성 발전노조해복투 위원장은 전국의 노조를 ‘전국민주노동조합’이라는 단일한 노조로 편재하고 하위에 지역본부와 전국적 특성을 갖는 사업장인 특별본부를 설치하자는 ‘단일노조’안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이의 근거는 ‘기업별노조의 현장성을 살리고 산별노조의 정신인 계급성, 연대성, 투쟁성을 만들어 가려면 지역이 중심이 되는 산별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으로 현재 민주노총에서 추진하고 있는 산별노조 건설 계획이 계급성과 투쟁성을 담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여타의 주장들과 궤를 같이 한다.

이처럼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산별노조 건설 운동이 일제히 제안되고 있지만 각각의 상과 구체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본 기획 9회차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노동조합 도덕성과 지도력의 위기’, ‘도덕 교육’하면 극복될까

민주노총은 또 ‘지도력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한 원인으로 ‘도덕적 불감증’을 꼽고 이의 대안으로 ‘비리엄단’과 ‘재정 투명성 강화’라는 혁신안을 제출하고 있다. 세부 실천으로는 △중앙위원회에서 직접 선출한 독립기관으로서 규율위원회 구성(비리자 제보, 고발, 징계) △총연맹, 연맹, 지역본부, 단위노조에 일치하는 비리 연루자 엄단을 위한 통일규약 제정 △회계감사위원회 구성 운영하여 예방 시스템 가동 △전 간부 신념과 도덕교육과정 신설, 의무적 이수 △간부 윤리강령 제정 등을 들었다.

기아자동차노조, 현대자동차노조, 항운노조, 한국노총까지 올해 초부터 연이어 불거진 일부 전현직 노조간부들의 비리 사건이 민주노조운동에 일정한 타격을 줬다는 견해는 대체로 공통적이다. 사무총장 구속이라는 진통을 겪은 한국노총은 ‘조직혁신규약’을 제정해 자정 노력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맥락인 도덕 교육이나 비리고발센터 등 민주노총의 대책에 대해서도 형식적이고 미봉책이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다. 노조 간부들의 관료화, 폭넓게 퍼진 관료주의의 폐해는 외면한 채 ‘도덕’과 ‘윤리’의 잣대만을 들이대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총괄적으론 민주노총의 조직혁신안에 대해 많은 이견과 비판이 있지만 ‘형식적’이라는 우려는 대체로 일치한다. 현재까지 진행된 지역별 토론에서는 주로 ‘산별노조 건설에는 공감하지만 어떤 산별을 만들 것인가는 빠져 있다’는 견해와 ‘재정 투명성이나 간부의 도덕성 고취는 비리에 대처하는 근본적 처방이 아니다’는 위 두가지 지적이 주를 이뤘다.

더구나 조직력과 계급성 강화의 핵심 과제로 제기될 법한 비정규 노동자 조직의 문제가 ‘정규직-비정규직 연대를 위한 조직가입, 차별해소 로드맵 마련’이라는 한 꼭지로 ‘산별노조 건설’안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라는 문제제기도 타당하게 들린다.

이경수 본부장은 “민주노총 혁신안은 정작 중요한 논쟁거리를 모두 비켜간 나머지 ‘혁신안’이라고 칭하기에 너무 평이하고, 조합원들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령 ‘대의원 직선’과 같은 혁신안에 임원선거 방식의 문제는 제외됐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 간부 도덕성 교육에 대해서는 “노조가 점차 타협하고 개량되고 자본에 포섭돼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깨뜨릴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자꾸 개별적 품성의 문제로 접근하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접근방식이 오히려 정권과 자본의 노림수에 걸려드는 꼴이라는 주장인 것.

박준형 공공연맹 조직부장은 민주노총 조직혁신안의 핵심이 “관료적 조직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라며 “혁신의 대상이 혁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일축한다. ‘산별노조 건설’과 ‘도덕성 회복을 통한 지도집행력의 강화’란 ‘조직체계 정비가 곧 혁신’이라는 같은 주장이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은 민주노총 집행부의 지도집행력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박준형 조직부장은 “‘관료화를 방지하고 현장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 혁신안의 주요 내용이 돼야 하며, 전반적인 노동자운동의 제도화에 반대하는 실천들도 일관된 흐름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운동은 민주노총 혁신안에 대해 비판하고 대중운동을 재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야 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기본에 충실하자”,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연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이야기하며 그 극복 방안으로 민주노총이 제시한 ‘조직 혁신안’의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위기논쟁에 갇히지 말고 위기를 실천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서두에 언급한 한노정연 심포지움에서 토론자들은 주로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견해를 나눴다. 굳이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이 자리에서 최소한 ‘전투적 조합주의를 전면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기’의 원인을 전투적 조합주의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위기론자들이 의도하는 바, 즉 ‘사회적 합의를 통한 계급 타협’을 우려하는 것은 대체로 전제한 분위기였다.

양효식 전노투 상황실장은 “전투적 노동운동을 유지, 계승, 옹호해야 한다”면서 현장권력 강화와 계급적 연대투쟁, 좌파 독자 정당의 건설로 위기를 극복하자고 주장했다. 안재원 노동자의힘 노동위원장은 위기 극복 방안으로 ‘새로운 정치부대의 결집’을 들었다. “계급적 노동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결집하고 한편으론 정치 부대를 결성해 분명한 계급적 요구를 제출하지 않으면 경제적 투쟁, 공장 내 투쟁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전투성’과 ‘조합주의’를 분리하거나 ‘전투성’과 ‘계급성’의 관계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보이기도 했지만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단결과 연대’라는 기본적 원리에는 공감할 수 있는 토론이었다.


박성인 한노정연 소장은 노동운동의 위기와 노동자민중의 생존의 위기에 대해 “우회로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다시 한 번 민주노조운동이 ‘계급적 단결과 연대’, 그리고 그에 바탕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노동유연화에 맞선 전국적인 대중투쟁전선을 복원해 내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불법파견 투쟁, 비정규직과의 연대 등 정규직 노동조합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계급적 단결의 정치적 방향’을 제시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를 인정하는 것은 비극적 종말을 불러올 것이고, 노동자계급이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를 대세로 받아들인다면 단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에 대한 전망과 정치적 실천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게 된다.

‘위기론’을 벗어나려고 하기 전에 노동운동이 먼저 자기 성찰과 비판,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통해 내부 혁신을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당장 노사관계 로드맵을 들이밀며 겉으로는 합의, 속내는 양보와 희생을 강요하는 정부에 대항하려면, 이제 ‘위기’를 되뇌이며 자책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 또한 옳다.

갖가지 진단과 해법이 난무하고 있지만 정작 노동자들이 선뜻 나설 수 있는 실천방안이 부재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민주노조운동, 노동운동의 ‘위기’가 어떻게 ‘자본의 호기’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입각한 실천만을 염두에 둔다면 ‘혁신’과 ‘위기 극복’이 그리 요원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기획취재지원] - 한국언론재단

특별기획 '2005년 한국의 노동자' 순서

1회차(8월 22일) 시장화! 유연화!
2회차(8월 23일) 양극화와 사회통합
3회차(8월 25일) 고령화의 진실
4회차(8월 30일) 세상을 바꾸는 이수호 집행부
5회차(9월 1일) 노사대립과 노사정위원회
6회차(9월 6일) 노동운동 위기 논쟁의 촉발
7회차(9월 8일) 위기, 그후
8회차(9월13일) 대공장 노동운동의 현주소
9회차(9월15일) 산별은 정말 대안인가
10회차(9월20일) 정규-비정규직 차별, 해답은 없나
11회차(9월22일) 해외 공장 이전(1)
12회차(9월27일) 해외 공장 이전(2)
13회차(9월29일) 노동운동을 움직이는 사람들
14회차(10월4일) 절망의 현장, 일어서는 노동자(1)
15회차(10월4일) 절망의 현장, 일어서는 노동자(2)

특별기획취재팀
- 유영주 편집국장
- 최하은 기자
- 문형구 기자
- 최인희 기자
- 라은영 기자
- 윤태곤 기자
- 참세상 영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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