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만세시위인가 민중봉기인가

[답사기] 발칙한 상상, "비타협이었나 타협이었나"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누군가는 그런 말을 남겼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역사는 상상의 연속이다. 그리하여 얻는 것이 있다면 현재를 반추해보는 것. 2006년 3월 1일, 근대역사에 대한 불온한 답사를 위해 40여명의 시민들이 종로 소담한 한옥집 문화연대 사무실에 모였다. 이들은 마음 한가득 ‘당시 나였다면’이란 상상 속에 빠졌다.


“아! 02년 월드컵 때 광화문 한복판으로 태극기 들고 나가본 일이 있거나 97년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해 본 적이 있는 심장약을 구비하고 강의를 듣기를 바란다” 물론의 기자의 해석이지만 불온하고 발칙한 강의와 답사가 될 것이라는 애초 문화연대의 기획의도와 달리 초반부터 계획은 수정되어야만 했다. 이는 예상치 않게 다수의 청소년들이 이번 답사에 참여하게 된 것 때문.

답사에 앞선 오전 10시 따뜻한 방 안에서 최규진 동양공대 교수의 ‘3.1운동 만세시위인가 민중봉기인가’가 시작되었으나 강의를 진행한 최규진 교수의 표정은 내용의 수위 조절과 눈높이 교육으로 진땀 빼는 모습이 역력했다. 덕분에 다소 딱딱해질 수 있는 강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3.1운동’ 상상에 앞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싸움’ 상상으로 시작되었다. “만일 내가 '황산벌싸움'의 백제병사였다면?” “신라 병사들하고 칼싸움 시늉만 하다가 좀 친해진다 싶으면 모의를 할 것이다. 돌아가 김춘추, 김유신을 죽여라. 나는 돌아가서 의자왕을 죽이겠다고 말이다” 이렇듯 강의는 발칙한 상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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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중급 역사학자라고 일컬은 최규진 교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며 “지배계급의 사상은 지배적이다. 역사는 지배계급에 의해 통제되고, 기록되며, 기억된다”고 밝혔다. 이른바 지배계급의 의한 기억의 정치는 3월 1일 이후 남한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해방의 계기를 촉발시킨 것으로 역사를 지배해왔다. 이후 민중의 기억 속의 그들 자신의 기억, “3.1운동은 적어도 1919년 3,4월에 걸쳐 200만 명이 넘게 참여하여 7500명 남짓 희생된 처절한 투쟁이었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 사라지고 유관순 누나(?)만이 남았다.

당시 지배이데올로기는 비폭력이냐, 폭력이냐는 흑백논리로 본질을 왜곡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은 비폭력 운동방침을 주장, ‘민족자결의 의사를 만방에 드러내는 독립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는데, 당시 33인은 “폭동은 우매한 것으로서 우리의 독립선언과 폭동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운동주체들의 투쟁을 부정하고 운동의 실상을 왜곡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민족대표야 말로 3.1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지도자 였다는 평가부터 일제와 타협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안전판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까지 이견은 지금까지도 분분하다.

그러나 최규진 교수는 당시 지배세력의 질문이 달라졌다면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폭력이냐 폭력이냐’가 아니라 ‘비타협이냐 타협이냐’로.

비타협일까 타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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