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중 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4일 정동 성프란시스코 교육회관에서 ‘빈곤의 또 다른 얼굴,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금융피해자 인권증언대회 참석자들은 불법추심으로 극심한 인권침해에 시달렸지만, 신용불량자라는 사회적 낙인으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한 이들의 사연은 다양했다. 인감도용으로 금융피해 사기를 당한 노숙인부터 딸의 수술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앉은 이들까지... 제각각 사연은 다양했지만, 이날 모인 이들이 금융기관의 횡포로 겪어왔던 인간적 모멸감과 인권침해의 양상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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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중 인권운동연대 금융피해자인권모임 회장 |
“빚 진 제인이라는 생각에 그냥 당했습니다”
김현중 씨는 2003년까지 10여년 간 경북 영주시청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했다. 그가 금융채무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기는 IMF 이후 정부에서 내수시장 진작을 위해 카드 발급 기준을 대폭 완화한 때와 일치한다. 지역 선후배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김현중 씨는 자신이 가진 카드로 대출을 받아 어려운 살림에 있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곤 했다. “주변사람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빌려줬습니다. 그게 잘못이었어요. 내 돈도 아니면서, 옆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망상을 가졌던 거죠” 많은 금융채무자들이 그렇듯 김현중 씨도 현금서비스를 받을수록 카드와 대출한도는 늘어갔고, 어느 순간이 되자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시청에서 근무할 때는 돌려막기로 버틸 수 있었지만, 퇴직하자 그것도 쉽지 않았다. 빚은 점점 더 쌓여갔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2004년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그러나 김현중 씨는 신용회복위원회로부터 ‘신용불량자로 등재되어 있지 않아 개인워크아웃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용불량자가 되면 인생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개인회생제도를 신청했는데,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한다지 않습니까. 기를 쓰고 신용불량자가 안되려고 했는데,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한다니.. 어이가 없더라구요”
김현중 씨는 이때부터 신용불량자가 되려고 8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했다고 말했다. 카드회사 직원들의 협박과 욕설 등 온갖 인간적 모멸감을 견뎌내야 했다. “정말 죽고 싶더라구요. 빚진 제인이라는 생각에 아무 말 않고 그냥 당했습니다” 당시 카드회사의 불법추심행위로 수개월 동안 스트레스를 받은 김현중 씨의 부인은 아직까지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신용불량자로 등재되고, 신용회복위원회에서 2004년 12월부터 개인워크아웃 에 들어갔지만, 빚의 수렁을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8개월을 기다려 개인워크아웃 통보를 받고는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총 변제액 7천만 원에 대해 한 달에 102만 원씩을 갚으라는 거여. 그래도 좋았습니다. 한 달에 102만원을 갚기 위해 처와 둘이서 별 짓을 다했습니다. 집에 있는 온갖 집기들을 다 내다 팔고, 폐지 주어다 팔고 했습니다. 그렇게 8개월을 버텼는데, 도저히 안 되는기라. 돈 넣는 날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어떻게든 맞추다 보니, 이제는 개인 빚까지 느는기라”
“전 세상에 저 혼자뿐인 줄 알았습니다”
김현중 씨는 다시 한번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 월 변제액의 조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막막해하고 있던 중 우연히 그는 부산 ‘금융피해자 파산지원연대’(파산지원연대)와 ‘빈곤과차별에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인권운동연대)를 통해 개인파산제도를 접하게 된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부산에 갈 일이 있어 부산지하철역에 서 있는데,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파산, 빚 이런 단어들이 있고 거기에 ‘절대로 죄가 아니다’라고 쓰여있는데, 그게 너무 희망적으로 들렸습니다. 죄가 아니라니요..”
김현중 씨는 무작정 파산지원연대에 전화를 걸었고, 인권운동연대를 소개 받아 교육을 받았다. “전 그때까지 저 같은 사람이 세상에 저 혼자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던기라. 나 말고도 이런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었고, 함께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죄가 아니라는 것을....”
김현중 씨는 복받치는 설움에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변호사님이 ‘김현중 씨가 진 빚은 이미 당신의 양심과 인생 전체를 걸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빚은 옛날에 우리가 가난했을 적에 옆집 가서 빌린 돈과는 다른 성격의 빚이다’고 얘기했습니다. 이건 빚이 아니고, 고통이자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 준 올가미이니까, 그걸 던져버려야 된다는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죄인'에서 '금융피해자'로
지난 해 말 김현중 씨는 인권운동연대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2004년 12월 개인워크아웃을 들어갈 때 총 채무액이 7천만 원이었는데, 1년 사이 빚은 눈덩이 처럼 불어나 1억 2천만 원이 되었다.
파산신청 후 그는 자신을 ‘죄인’에서 ‘피해자로’ 규정하기 시작했고, 그의 삶은 달라졌다. “지금은 카드회사들이 2-3년 전처럼 폭력을 휘두르지는 못 합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그때는 빚진 죄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카드회사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파산을 신청하자 김현중 씨의 채권단은 총 변제액을 절반으로 낮추고 변제를 종용했다. 이에 대한 김현중 씨의 반응은 어땠을까? “저는 현재 갚을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카드회사에 받고 싶으면 집에 있는 것 다 가져가고, 내게 있는 재산 다 가져가라고 했어요. 단 내 인권만은 그대로 두라고 했어요. 이제는 카드회사 직원들이 집까지 쳐들어오는 일은 없습니다. 문자만 와요. 악질채무자라고...”
김현중 씨의 발언이 끝나자 성프란시스코 대강당에 모인 2백여 명의 참석자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날 김현중 씨는 말미에 “이번에 면책이 되고나면, 빚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간증을 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이날 인권증언대회는 김현중 씨의 표현대로 흡사 종교단체의 ‘간증회’와도 같았다. 이날 참가자들은 그간 죄인으로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 죄인의 굴레를 던져버렸을 때의 기쁨에 눈물을 흘렸고, 또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과의 연대의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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