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평화유지군, 다르푸르사태의 해결책일까?

[경계를 넘어]급하다고 잘못된 처방할 수는 없는 노릇

우리가 사는 세상엔 참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굳이 신문의 미담 기사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 주변에서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기억하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애쓰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이들을 마주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국경이나 인종, 종교와 같은 구분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흔히 한국 사회가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 특히 분쟁과 기아, 독재, 구조적 차별 등으로 인한 다른 나라 민중들의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많이 하고 또 그게 영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과 연대를 보내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려는 노력들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 좋은 증거일 것입니다.

얼마 전 ‘나눔문화’라는 단체에서 ‘시간이 없다, 다르푸르를 구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캠페인의 취지와 뼈대는 대략 ‘인종청소가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의 비극을 끝내기 위해 UN 평화유지군의 신속한 파병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UN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에게도 이라크와 레바논에 전투병을 파병하는 대신 다르푸르 평화유지군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면서 말이지요.

저는 그 캠페인을 진행하는 분들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 분들이 위에서 말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대의 마음, 형제애가 넘치는 따뜻한 분들일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 캠페인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그 해법에는 반대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때, 때로는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처한 어려움에서부터 그 어려움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고 도와야 하는가, 심지어 도움받는 이의 자존심과 같은 감정적인 요소들까지 말이지요. 개인도 그럴 진데 하물며 그 대상이 우리가 역사와 문화, 사회구조를 잘 이해하기 힘든 먼 외국의 다수의 집단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는 선의에서 한 행동이지만, 그것이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더욱 크게 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다르푸르 지도. 지도 왼쪽편에 다르푸르(Darfur) 지역이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다르푸르 캠페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금 현재 다르푸르 민중들이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과 위험을 겪어왔고 또 겪고 있다는 사실을 대놓고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거기에 대고 희생자가 7만명이네, 20만명이네 하는 것은 한가한 숫자놀음에 불과합니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이른바 국제사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겠지요.

이에 대해 ‘나눔문화’에서는, 아니 나눔문화 뿐만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캐나다와 미국, 유럽 등지의 많은 시민들과 인권, 종교 단체들은 유엔 평화유지군의 조속한 파병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일까요? 혹시나,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거나 더 큰 재앙으로 이어지는 불씨는 아닐까요?

서양의 주류 언론들이(그리고, 그걸 그대로 받아쓰기하는 한국 언론들이) 다르푸르 사태를 언급할 때 항상 쓰는 표현이 ‘북부 아랍계 무슬림 정부가 지원하는 잔자위드 민병대가 아프리카 기독교계 흑인 반군들의 봉기진압을 이유로 다르푸르 주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들이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활방식의 차이로 인한 ‘물’의 사용권을 둘러싼 다툼입니다. 다르푸르를 비롯한 그 지역은 수년 째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심각한 물 부족을 겪어왔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를 놓고 주로 유목에 의존하는 아랍계 주민들은 가축들에게 먹이려 하고 대대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논과 밭에 대려고 합니다. 그로 인한 다툼이 과거 식민주의가 남기고 간 지배층인 아랍계와 피지배층인 흑인이라는 정치사회적인 구조와 겹치면서 내전으로까지 비화된 것이지요. 즉, 근본적으로 다르푸르 사태의 성격은 ‘내전’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내전이라고 해서 절대 학살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특정국가의 내전에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외세’가 개입했을 때 그 결과는 항상 더 많은 희생과 학살로까지 비화된다는 것입니다.

다르푸르 사태도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아프리카에 대해 공격적으로 투자와 외교적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중국이 수단 정부를 공공연히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국 뿐만 아니라 이번에 다르푸르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를 주최한 프랑스 역시 수단 정부의 후견인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비쳐지고 있는 수단해방군(SLA)과 정의평화운동(JEM) 등의 다르푸르 반군조직들이 봉기 초기부터 미국 정부와 CIA의 지원을 받아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특히,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이 무슬림은 극단주의자들이고 테러리스트라는 편견을 확산시키자, 다르푸르 내전에 종교적인 요인까지 개입되어 갈등과 증오는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외세의 개입을 전면화하고 확대하자구요?

유엔 평화유지군은 말 그대로 학살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해 파병되는 것이니만큼 ‘외세의 개입’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잘 한 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지금의 유엔이 과연 불편부당하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조직이라고 보십니까? 저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유엔이 5개 상임이사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그 중에서도 미국)의 이해관계와 입김에 휘둘려왔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가요?

말로는 모든 회원국들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고 유엔 총회가 최고의 결정기구라고 하지만, 5개 강대국 중 단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나머지 2백여 개 나라가 아무리 뜻을 모아도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는 힘에 따른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조직이 아닌가요?

그런 유엔에서 보내는 평화유지군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감시자이자 분쟁의 해결사 역할을 할 거라고 믿을만한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나요?

  유엔의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수단 수도 하르툼)


그 판단의 근거는 지나간 역사가 제공해줍니다. 그와 관련해 제가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들었던 예를 다시 반복해보지요.

1994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은 르완다의 후투족 민병대가 불과 백여 일 만에 최소 80만 명에서 최대 백만 명의 투치 난민들을 살해했을 때, 미국과 영국은 학살이 다 끝나갈 무렵까지도 평화유지군 비용을 왜 우리가 분담해야 하냐며 볼멘 소리를 하며 시간만 보냈습니다.

그 대신 르완다 학살에 관한 유엔 결의안에서 ‘제노사이드(인종학살)’란 표현을 빼는데 온 힘을 쏟았지요. 하지만, 이번 다르푸르 사태에 대해선 아직 정확한 진상이 파악되지 않은 사태 초기부터 ‘인종청소’라고 발 빠르게 성격을 규정했습니다. 똑같은 비극을 놓고 왜 10년 전과 지금이 그렇게 다른 것일까요?

즉,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을 주도하는 미국와 영국 등의 강대국들이 겉으로는 인도주의와 학살 방지와 같은 고상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과연 그들이 걱정하는 것이 다르푸르 민중들의 생명인가, 아니면 석유를 비롯한 천연 자원의 보고이자 아프리카로의 정치외교적 영향력의 발판으로서 수단을 주목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봤을 때 저는 단호하게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잘 아는 예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그 뒤에 NATO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점령할 때 내걸었던 명분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 때도 그들은 ‘인도주의, 민주주의, 자유, 여성인권’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속내는 역시나 석유를 비롯한 자원확보와 자국의 정치외교적 이익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대가는 결국 누가 치르고 있나요? 수십만 명의 무고한 목숨과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 아프간과 이라크 민중들 아닌가요?

약 2만 명의 유엔 다르푸르 평화유지군의 파병을 결정하고 주도하고 돈을 대는 나라들도 결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던 나라들과 정확히 같은 나라들입니다. 그들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유독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분쟁의 해결사 역할을 할 거라고 우리가 기대할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도저히 찾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주, 국제사회의 압력과 특히 미국의 경제제재 확대 조치에 결국 수단 정부도 기존의 아프리카 연합군 이외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받아들이는데 합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단 국민들 중 상당수는 유엔 평화유지군을 ‘또 다른 식민주의 침략군대’로 여기며 파병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평화유지군 파병이 오히려 내전과 폭력을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화유지군을 더 많이 보내서 막아야 한다구요? 오, 이런, 20만 명이 넘는 외국군대가 그렇게 엄청난 돈과 무기를 쏟아 붓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갔어도 아프간과 이라크의 비극은 끝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2만 7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 3천 5백만 명이 살고 있는 수단의 내전을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겠다고요?

결국, 해답은 대화를 통한 해결 밖에 없습니다. 국제사회가 진정 다르푸르 민중들의 생명과 안전을 소중히 여긴다면 먼저 강대국들이 수단에 대한 정략적 이해와 야욕을 버리고 그들에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줘야 합니다.

지금도 생명의 위협과 굶주림에 떨고 있는 다르푸르 민중들을 걱정하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분들의 조급함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장 사람이 죽어간다고 잘못된 처방으로 지어진 약을 함부로 처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환자의 목숨도 살리고 궁극적으로 환자가 완치돼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하게 하려면 급하다고 일단 상처부터 째고 볼 게 아니라 정확한 정밀검진을 통해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려야지요. 이것이 제가 평화유지군의 다르푸르 파병에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을 ‘경계를 넘어’ 뉴스레터 2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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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 물 , 다르푸르 , UN평화유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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