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역사현장에서 묻다 "무엇을 위한 개발입니까?"

'다시보는 근현대 역사현장' 마지막답사 '한국전쟁의 상처와 근대 충북지역'

  40여 년이 지난뒤에야 이유도 모른채 죽어간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정원 기자

쌍굴다리 안 쪽에서 퍼져나오던 울림이 차츰 흩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차량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임계리였던지 주곡리였던지 그 어디매쯤에서부터 달려왔을 그 차량은 이내 시야에서 멀어졌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1톤 차량의 중량감 만큼의 긴장과 울림이 다리 안쪽을 가득 메웠다.

쌍굴다리는 이름 그대로 쌍을 이룬 두 개의 굴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쌍굴다리의 한 쪽 다리에는 내천이 흐르고 나머지 한 쪽으로는 차도가 뚫려있어 양 마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쌍굴다리 상부 위로는 운송의 중추역할을 한다는 경부철도의 철로가 놓여있다.

  세모 표시가 총탄이 박혀있는 자리이고, 동그라미는 총탄이 스쳐간 자리이다./ 이정원 기자

돌담으로 이루어진 쌍굴다리의 하부구조 곳곳에는 사람 손바닥만한 원꼴과 세모꼴이 하얀색 페인트로 그려져있다. 이 표식들은 쌍굴다리 하부구조의 위쪽에 겹쳐지며 몰려 그려져 있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불규칙적이고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며 흩어지는 양상을 띠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려진 원꼴 안에는 상처의 흔적이 뚜렷했다. 돌담의 곳곳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에서부터 두마디 정도 길이, 깊이는 손가락 두께정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쌍굴다리는 굴의 특징이 그렇듯 공기와 소리를 오랫 동안 머금고 있다. 고립적이고 폐쇄적이며 단절적인 굴의 특징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이 쌍굴다리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위치해 있다.

'노근리' 쌍굴다리, 사건 발생 40여년 만에야 제 모습을 드러낸 미군민간인학살현장이었다. 한국전쟁 중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철로 위와 쌍굴다리 안의 피난민 다수가 사망했다. 이 4일 동안의 사망추정인원만 250명에서 300명이다.

노근리사건사명자위령비 앞에서 잠시 머물렀던 답사자들이 자리를 뜰 무렵 1934년 경부선 철도용 다리로 건축된 쌍굴다리 철로 위로 21세기 꿈의 열차가 쌩하고 지나갔다. 철근이 없는 콘크리트 아치구조의 다리 한 쪽에서 연한 갈색으로 색이 바랜 갈대가 원인 모르게 펄렁이고 있었다. 이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근대문화재로 등록(등록번호 59번)되었다.

archive(보관)할 것인가 memorial(기억)할 것인가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등록문화재는 국보나 보물과 달리, 관리하고 있는 시,군, 혹은, 사유지 주인 마음대로 훼손을 해도 별다른 제재 사유가 없다는 게 근현대 문화재 손실의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이정원 기자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에서 진행하는 '다시보는 근현대 역사현장' 그 마지막 문화답사는 충북지역인 청주, 진천, 영동 지역이었다. 지난 8일부터 9일간 '한국전쟁의 상처와 근대 충북'을 주제로 충북지역 답사가 진행되었다.

이번 '다시보는 근현대 역사현장'은 지난 9월 전북 김제부안지역을 첫 시작으로 광주, 강릉속초, 제주, 대전부여, 충북지역까지 총 여섯번의 답사를 진행했다. 문화연대는 이번 답사를 시작하던 9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장으로서의 도시는 각각의 고유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며 "그러나 그러한 향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해 문화의 층이 켜켜이 쌓여 생겨났으며, 역사의 흔적과 문화의 지층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곳이야말로 문화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깊이 있는 도시"라고 답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답사는 착취와 수탈이 만들어 낸 근현대의 생활공간들을 archive(보관)할 것인가 memorial(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황평우 문화재 전문위원 /이정원 기자

황평우 문화재 전문위원은 첫번째 답사에서 "근현대사의 역사적 부동산과 동산들을 그저 아카이브(archive/ 보관)하는 것이 아닌 역사를 어떻게 메모리얼(memorial/ 기억)할 것인지 돌아보는 자리였으면 한다"며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삼전도 비를 보존하듯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때마침 이 답사 기사를 정리할 무렵 동대문운동장 철거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철거' 보도에 대한 해명자료에서 "동대문축구장은 1925년 일제가 일본 동궁의 결혼 기념으로 봉납한다는 명분으로 1395년 축조된 서울성곽을 허물고 그 터 위에 건설한 것으로 80년된 근대문화재로 610년된 사적 성곽복원이 월등히 중요시 되어 이를 철거하고 서울성곽의 일부를 복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문화연대는 "일제잔재라 해도 기념과 기록은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일재잔재를 기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록물로 남겨놓자는 것"이라며 "독일은 치욕스런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지우지 않기 위해 기념관까지 만들었고 중국은 수치스런 난징대학살의 기억을 간직하고자 추모관을 지었다. '다소 불온하다'고 해서 있는 유적조차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몰역사'를 넘어 비판 받아 마땅한 '반역사'적 인식"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동대문운동장 주변으로 삶의 터전을 잡은 노점상인들에 대한 대안도 마련해놓지 않았다고 문화연대는 성토했다. 황평우 위원장은 "동대문풍물시장 내 노점상들과 아무런 협의가 없었고, 소수지만 몇몇의 입점 상인들이 서울시를 상대로 법정싸움이 진행 중"이라며 "동대문운동장 주변의 노점상 생존권에 대한 서울시의 대책은 전무하다"고 밝혔다

한편 충북지역 답사는 영동지역의 추풍령 급수탑과 3년 전에 없어졌다하여 실제 볼 수 없었던 황간농협창고, 50년 한국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노근리 민간인학살현장, 진천지역의 덕산양조장, 천주교 진천성당 등을 돌아보고 이어 두 번째 날에는 진천 보탑사를 들렸다가 청주지역으로 이동해 청주대 법과대 등, 주성교육박물관, 우리예능원, 청주탑동양관 등 근대건축물들을 돌아보았다.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을까? 무엇을 위한 개발이었나? 자본운동이 활발했던 "근현대사는 개발이란 미명 아래 진행된 민중을 향한 착취와 수탈의 역사였다"고 황평우 위원장은 말한다. 황평우 위원장은 철도, 종교, 교육시설 등이 수탈을 위한 기본 근간이었다고 말했다.

20년부터 40년까지 기독교, 천주교, 성공회 등 교당과 선교사들이 묵는 양관 등이 이 시기 혼란했던 시대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동서양 건축특징이 혼합된 형식으로 설립되었다. 재단이 운영하는 유치원, 상고, 대학 등의 교육시설들이 이 즈음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들어서기 시작한다. 또한 가정 주조가 금지되자 각 지방 유지들이 운영하는 양조장에서 탁주, 약주 등을 독점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번 답사는 근대 건축물을 둘러보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철마는 달렸지만...민초들의 노동력은 착취됐다

  이정원 기자

추풍령역은 이색적이었다. '근대화다방', '역전식당' 등 옛 모습을 간직한 상점들이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역주변에 자연스레 형성되는 상권이건만 신축된 추풍령역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대조적인 인상을 풍겼다. '유능한', '충청대통령', '경제'라는 수식어를 단 대선후보자들의 현수막이 역 주변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때마침 추풍역 앞을 지나는 대추 파는 트럭에서 '한 되박에 3000원~, 두 되박엔 5000원~'이라는 확성기 소리가 황망하게 울려퍼졌다.

추풍령역 철목을 지나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급수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황평우 위원장은 "목탄열차의 과열을 막기 위한 급수시설"이라며 "열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 수 많은 민중의 노동력이 착취되었다"고 말했다.

건축면적 약 53㎡(16평), 2층 높이의 석조구조로 되어 있는 추풍령역 급수탑은 증기 기관차의 운행에 필요한 물을 압송하기 시설로1939년에 건립되었다. 굳게 닫힌 철문 뒤로 반쯤 열려있는 창을 통해 건물 한 가운데 퇴폐적인 모습을 한 워싱턴 펌푸 시설이 우뚝 서있었다. 더 깊이 얼굴을 들이밀고보니 그제서야 오랫동안 쓰지 않은 건물에서 나오는 특유의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왔다. 펌푸시설 주변으로 쓰지 않는 물건들,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황평우 위원장은 "당시에도 상당한 거리를 이 펌프를 통하여 압송하였던 것"이라며 "여기에 필요한 물은 하천으로부터 끌어들여 급수탑으로부터 10여 미터 후변에 연못을 파고 충당하였던 것으로 현재도 연못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황평우 위원장은 수원역, 용산역 부근에도 이러한 시설이 남아있으니 유심히 살펴볼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아는 채용'으로다가.

추풍령역 급수탑은 초기의 석탄에서 석유전기로 사용연료가 변화하는 산업시설의 동력 발달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47호로 지정되어있다.

두 번째 답사지였던 황간농협창고는 3년 전에 철거되었다고 근방의 이웃집 할아버지가 귀뜸해주었다. 황간농협창고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컨테이너 박스로 새로 지어진 농협창고가 그 모습을 대신하고 있었다. 1940년 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간농협창고에는 새끼와 가마니 등 고공품을 보관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농자재를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10여 명의 답사자들은 이곳에서 하얀 쌀밥에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생거진천이라~

  이정원기자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를 먼저 안 것은 '코'였다. 알싸하면서 구수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으며 코 끝을 찌르는 냄새만으로도 취기가 올랐다. 진천 덕산양조장은 벌써 3대 째 가업을 잇고 있다고 한다. 생활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58호에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 지정 알림판 옆으로 주인이 손수 써놓은 '방문객은 이쪽으로 연락주세요'라는 문구에서 방문객이 많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인지 안주인은 갑작스런 방문에도 당황한 기색이 없다.

코 끝을 찌르던 누룩 냄새가 무뎌지더니 곧 익숙해졌다. 황평우 위원장은 "일제 시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미명 하에 집집마다 술을 담가먹는 것을 금지하면서 군별 1,2개 지점으로 매판자본의 독점생산이 가능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양주장 안주인은 "양조장의 특수한 기능을 담아 고창과 환기창을 뚫었고 보온을 위해 벽체 내부에는 수수깡을 엮어 왕겨로 채우고 흙을 발랐다"고 말했다. 얼굴을 들이밀자 온기가 훅 끼쳐오던 종균배앙실에는 찐 쌀과 밀가루가 곱게 퍼져 드러누워있었고, 발효실에는 술을 익히는 독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한 노동자가 독 안으로 누룩을 옮겨 담고 있었다.

황평우 위원장은 "생거진천이라고 물좋고 쌀좋아 살아 생전에는 진천에서 거주하라고 했다"면서 이곳 약탁주 맛을 애둘러 표현했다.

이 곳에서 담사자들은 이날 저녁 뒷풀이에서 마실 막걸리 한 박스를 2만5천원에 구입했다. 여담이지만 이날 남은 막걸리는 다음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머지의 일부를 해치우고, 나머지 몇 병은 또 참세상 기자들이 챙겨왔다. 술맛은? 생거진천이라~

근대 건축물에서 전통한옥이 근대적 기능을 수용하는 과정 볼 수 있었다

  현재 일신여자 중고교 안에 있는 청주 탑동 양관의 모습. 이정원 기자

두 번째 날에는 주로 근대 건축물을 둘러보았다. 근대 건축물은 일제시대 이후 근대화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외관은 전통적 양식을 따르면서 새로운 건축재료를 사용해 다른 질감을 나타내는가 하면, 교육시설의 경우에는 디테일을 죽이고 장방형의 대칭형 구조로 획일적 선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청주 탑동의 선교사들이 기거했다는 양관은 전형적인 한양절충 양식의 건물을 취하고 있었다.

지금은 신축된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지만 1957년에 건립된 청주대 옛 건물이 자연과 제법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사실 황평우 위원장이 당시 지어졌던 법과대, 대학원, 제3강의동, 제18강의동, 제2체육관, 목공실 등에 대해 다른 설명을 늘어놨으나 육안으로 봐서 언뜻 다른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건축양식을 띠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면서 맞배지붕(완만한 경사의 八자형지붕) 형태의 붉은 기와 지붕을 얹은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현관은 5m 정도 앞으로 나와 있으며 각 건물이 마당에서 모여지도록 설계되었다.

청주시청사는 흡사 광화문에 위치한 문화관광부 건물을 보는 듯 했다. 황평우 위원장은 "전체 외관에서 전통 목구조의 공포구성, 지붕의 처마구성을 콘크리트라는 재료로 새롭게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배 모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청주시청사는 1965년에 건립되었으며 전통적인 목구조 형태의 구성 체계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건축재료로 표현하고자 했다.

1935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수동성당은 전체적으로는 한국전통 기와집의 형태를 띠면서도 서양식의 개구부와 붉은 벽돌을 사용하고 주춧돌의 형태에서 근대적인 풍취를 풍겼다. 동서 복합적 구조물인 대한성공회 수동성당은 유고적 관념에 따라 남녀의 출입구를 양측으로 분리해뒀다. 황평우 위원장은 창호의 완자모양과 유리사용 등에서 전통한옥이 근대적 기능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암산 서편의 한 끝자락에 위치한 수동성당에서 청주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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