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금융법으로도 진정이 안 되면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은 우여곡절 끝에 법안 발의 2주 만에 겨우 구제 금융법안을 통과시켰건만 통과되던 10월 3일부터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여 이미 1만선 밑으로 내려앉았다. 극도의 신용경색으로 기업들이 유상증자는 물론이고 회사채발행을 해도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 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하려 해도 유동성 확보에 급급한 은행들이 대출을 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 해준다고 해도 높은 금리를 물어야 할 형편이다.
미국 금융위기 전개를 거의 정확히 예측했던 뉴욕대 루비니 교수는 “기업들의 자금조달 창구가 막힌 것은 두려운 일”이라며 “부채 만기 연장을 하지 못하는 기업들의 많은 수가 유동성 공급로가 막히면서 디폴트(편집자 주; 공·사채나 은행융자 등에 대한 이자 지불이나 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해진 상태. ‘채무불이행’이라고도 한다.)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만약 기업 부문의 자금 조달이 지금처럼 계속 막힌다면 대공황과 유사한 경제적 붕괴 위험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기업들만 자금 조달길이 막힌 것이 아니다. 캘리포니아 주는 채권발행이 안되자 “경찰, 소방서 공무원들의 급여를 2주째 주지 못하고 있다”면서 연방정부에 70억 달러 지원을 긴급히 요청한 바 있다.
문제는 미국이 이 같은 위기확산을 막을 더 이상의 방법이 뚜렷하지 않다는 데 있다. JP 모건 체이스 보고서에서 금융기관 손실이 이미 1조 7천억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한 마당에 7천억 달러 구제금융은 턱없이 모자라 보인다. 예금자 보호한도를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로 늘리고, 자금조달이 어려운 기업들의 기업어음(CP)을 직접 매입하며, 10월말 추가로 기준 금리 인하를 할 수 있다는 등의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전혀 상황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 국민들이 느끼는 경제 위기에 대한 체감도는 훨씬 더 크다. 지난 10월 6일 CNN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대공황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응답한 미국 국민은 59퍼센트나 되었다. 주택담보 대출 연체자가 500만을 넘고 실업자가 940만을 넘어가고 있다. 공식 실업률이 6.1퍼센트이지만 구직 단념자 등 실질 실업률은 이미 10퍼센트를 넘어가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의 달러 거래가 중단된 한국
환율 폭등, 금리 상승, 주가 폭락, 펀드가치 폭락이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도 자금 경색이 극심한 미국에 못지않다. 특히 환율폭등은 이미 우려할 수준을 훨씬 넘어서 1300원 이상이 되었다. 올해 내내 환율은 달러가 강세이든 약세이든 상관없이 올라가고 있고 다른 통화에 비해 원화가치 하락이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3개월(7월 15일~ 10월 6일) 동안 원화는 21퍼센트 하락했는데, 이는 말레시아와 같은 신흥국 8퍼센트 절하는 물론이고 가치가 많이 떨어진 파운드화 13퍼센트나 유로화 15퍼센트보다 훨씬 큰 것이다.
외환보유고 2390억 달러가 충분한지 아닌지는 의미가 없게 되었다. 사실상 달러 유통자체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주식투자 자금으로 달러로 바꾸어 회수해가고 있고 경상수지가 적자행진을 하고 있는 상황만이 문제가 아니다.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달러를 확보해 두려는 경향에 가속이 붙고 있다는 것이다.
수출업체들은 수출해서 번 달러를 시장에 내놓지 않고 보유하고 있다. 은행 역시 외화 차입금 상환 등에 대비해서 달러를 확보해 두려고 분주하다. 해외로부터 외화차입이 극히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개인들도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정부 혼자 매일 10억 달러 이상을 풀고 있지만 풀자마자 매입해 버리는 ‘달러 사재기’가 한창이다. 외환보유고만 까먹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처럼 극도로 경색되어 버린 외환시장 국면에서 외화채무와 외환보유고를 비교하면서 충분한 보유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달러뿐 아니라 원화도 비슷한 상황이다. 기업들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현금 보유고를 계속 늘리고 있다. 은행들도 뱅크 런(편집자 주; bank run.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말한다. 은행이 부실해지면 예금자들이 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달려간다는 데서 유래됐다.)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해서 대출을 꺼리고 있다. 투신사와 같은 기관 투자가들은 펀드 환매 사태에 대비해서 자금을 투자하지 않고 묶어두고 있다. 이럴수록 금리는 올라가고 은행채와 CD금리를 비롯한 모든 금리가 뛰어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달러화와 원화를 포함하여 기업들의 자금조달 통로가 모조리 차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기우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백약이 무효, 각자 살길 찾자?
그동안 경제의 금융화, 금융의 세계화로 특징지어진 신자유주의는 신용팽창을 동력으로 경제성장을 구가해왔다. 금융과 자본시장이 전 세계에 걸쳐 개방되고 자유화되면서 세계는 신용의 사슬로 복잡하게 얽히며 자금 순환구조를 형성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금융위기와 신용경색이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신용으로 얽힌 경제의 모든 연결선들이 끊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의 핏줄인 금융이 모두 막혀가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 ‘파국’이 오지 않고 있는 것은 왜일까.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을 경험하고, 1980년 이후 반복되는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갖가지 위기 지연 장치들과 기법들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그것이 위기를 치유하지는 못했다. 각종 진통제를 개발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초기에는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이라는 진통제를 처방했다. 그러나 9개월간 5.25퍼센트에서 2퍼센트까지 금리를 연이어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금융위기는 확산되어갔다. 베어스턴스가 파산하자 미국 정부는 사후적인 선별구제라는 좀 더 강도 높은 진통제를 투입했다. 그러나 9월에 접어들면서 이마저도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된다. 미국 국민들의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강도 높은 진통제라고 할 7천억 달러 구제금융을 밀어 붙였지만 법안이 통과되던 그 날 다우지수가 폭락했다. 진통제를 맞기도 전에 효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미국은 물론 한국 정부 정책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졌고 기업, 은행, 가계는 각자 제 살길을 찾아가고 있다. 정부의 신뢰는 무너지고 신용의 연결선들이 끊어진 상황에서 각자 위기에 대비해서 현금을 쌓아두면서 각자 생존의 길을 찾아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각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WTO, IMF, G8 등 한때 화려한 역할을 했던 국제기구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각 국가들의 공조체제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 각 국가들이 앞 다투어 자국 은행의 예금자 보호에, 자국 기업들의 구제에 몰두하고 있는 형편이다.
진통제 투입으로 위기의 폭발이 지연되면서 나타나고 있고 그 동안 위기에 대한 학습효과로 각자 위기관리에 들어가고 있어 1929년 대공황 같은 폭발이 외형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지만 지금의 현실을 ‘공황’이라는 말 이외에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적어도 경기침체(recession)를 넘어 불황(depression)으로 넘어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은 “현재의 상황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와 많이 다르다”며 “이런 때일수록 국민들도 정부를 믿고 내외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 힘과 지혜를 모아주었으면 한다”는 식의 발언으로 일관하고 있다. 처해있는 현실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우려가 앞선다.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재정부 장관은 말을 꺼내기만 하면 ‘선제적 대응’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선제적 대응’을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더 한심한 것은 이 와중에 외환위기 시절의 금모으기 운동을 흉내 내 ‘달러 모으기 운동’을 벌이자는 주장도 들린다. 그렇다면 이미 외환위기는 온 것이 아닌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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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권 님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