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11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국제 정치경제학대회는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현존 국제 금융질서 자체를 극복하고, 그런 점에서 남반부에서 남미은행, 남부은행, 달러 지배체제 폐기 등을 도모해야 한다는 성명을 채택했다.
이번 대회에는 차베스 대통령과 엘 트루디 계획개발부 장관, 페레스 에쿠아돌 경제정책 장관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와 라틴아메리카, 북미, 유럽, 아시아 등에서 온 좌파 경제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참석했으며, 마이클 레보위츠(캐나다), 마르타 하르네커(칠레), 사미르 아민(세네갈), 팻 드바인(영국), 에릭 투셍(벨기에), 알 캄벨(미국), 클라우디오 카츠(아르헨티나) 등도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자리를 같이 했다.
▲ 10월 6-11일 카라카스에서 열린 국제 정치경제학대회. 사진/ 조희연 |
국제 정치경제학대회, 제3세계주의 주도
조희연 교수는 29일 성공회대 대학원 워크샵에서 ‘베네수엘라 계획개발부가 주최한 국제 정치경제학대회 참가기’ 발표를 통해 현장 분위기를 전하고,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민중운동의 방향에 대해 두루 의견을 밝혔다.
조희연 교수는 “이번 학회에는 마르크스주의, 좌파 케인스주의, 제3세계주의 등 다양한 입장에서 대응방안들이 발표되었지만, 전체 흐름은 첫날 차베스 대통령이 약 2시간 가량 열변을 토한 이른바 ‘남측의 대응’으로 표현되는 제3세계주의가 주도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차베스는 그람시의 ‘유기적 위기’ 개념을 사용하는 가운데, “현재의 세계 경제위기를 이미 낡은 신자유주의가 죽었음에도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빚어진 사태”로 설명하고, 현재의 미국 패권의 위기에 대해 △9.11과 이라크전으로 표현되는 정치군사적 패권의 위기 △금융위기로 표현되는 경제적 패권의 위기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상징되는 이데올로기적 위기 등이 맞물린 총체적 위기로 규정했다.
성명에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달러 패권체제, 그 제도적 표현으로서의 IMF를 중심으로 하는 현존 금융질서의 근본적 폐기를 향한 행동의 필요성이 담겼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해서는, 현존 국제금융질서 자체를 극복해야 하고, 남반부 국가들이 남미은행, 남부은행(Banco del Sur), 달러 지배체제 폐기 등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도 다루었다.
▲ 차베스 대통령이 참가자들을 만나고 있다. 사진/ 조희연 |
연합뉴스는 27일 브라질리아에서 소집된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긴급 확대회의(4개 정회원국과 8개 준회원국)는 회원국간 무역 거래에서 미국 달러화 사용을 줄이고 자국 통화 사용 확대를 골자로 하는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방안’을 합의한 것으로 보도했다.
확대회의는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미주개발은행(IDB) 등을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작년 12월 9일 출범한 남미은행의 가동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는 문제에 대해서도 공감대를 모았다.
남미은행에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 7개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향후 남미 12개국이 가입할 전망이며, 본부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들어서고, 초기자본금 100억 달러를 가입국 증가에 맞춰 200억 달러까지 늘린다는 구상이다.
조희연 교수는 “대회에서는 남미은행과 함께 남측이 연대하여 자신들의 외환보유고를 자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남측은행’의 설립이 촉구됐다”며 “페레스 에쿠아돌 경제정책 장관과 에릭 투상이 제안한 ‘외채 심사 및 선별 무효화’도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3세계 외채취소위원회(www.cadtm.org) 위원장이기도 한 에릭 투상의 경우 “여러 대안들 중 미국 경제패권의 한 결과적 현상으로서의 외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를 강조했고, 페레스 에쿠아돌 장관은 “새로운 금융질서 구조를 창출(new financial architecture)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일환으로 현재의 외채에 대한 조사, 심의와 취소과정에 대한 전 지구적 프로세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미르 아민은 현 세계 경제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보다는 네오파시즘의 대두로 이어질 가능성을 언급했다. 아민은 “북측이 위기의 비용을 남측에 전가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고, 이에 따라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며 “1950년대 ‘반둥회의’의 정신을 오늘날 세계 경제위기 국면에서 새롭게 발견해나가자”고 촉구했다.
▲ 마이클 레보위츠와의 토론. 사진/ 조희연 |
두 가지 경로, 어떻게 사회주의적 기회로 삼을 것인가
원영수 씨가 번역해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Build it Now’의 저자 마이클 레보위츠는 이번 대회에 특별한 발표를 하지는 않았으나, 위기와 이행의 두 가지 경로에 있어 내생적 발전경로와 주체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보위츠는 “자본은 이번의 금융위기를 스스로의 재구조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며 “위기에 대한 두 가지 경로로 자본주의적 경로와 사회주의적 경로가 있는데, 문제는 이번 금융위기 속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적 비판의식을 제고하여 사회주의적 기회로 삼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짚었다.
레보위츠는 “언제나 변혁의 가능성과 경로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직무방기”라며, ‘Build it Now’를 호소했다.
한편 조희연, 정성진 교수는 지난 22일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성명서의 기조가 대항적 금융질서 구축을 위한 ‘위로부터의 공조’에 치우친 나머지 ‘경제위기 국면에서 개량주의와 케인스주의, 국가자본주의의 부활을 경계해야 한다’(정성진)거나 ‘국제 경제위기를 국민경제적 위기가 아닌 민중적인 정치 위기로 전환시키기 위해 전지구적 공동 행동이 필요하다’(조희연)는 우리 제안이 반영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고 썼다.
정성진 교수는 대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한국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장하준 류의 국가주의적 대안과 케인즈주의적 대안을 비판했다.
정성진 교수는 “위기에 대응하는 다양한 입장들이 나타날 수 있는데, 개량주의, 케인즈주의, 제3세계 민족주의적 입장 등이 있으며,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자는 다수가 현재의 위기를 곧 파국적 위기로 규정하고 논의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경제적 위기가 때로는 파시즘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다양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민중적 입장에서 정치적 위기, 기존의 지배체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매개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희연 교수는 민중정치 투쟁이 개입해야 할 지점을 찾아 대응하는 민중의 공동행동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조희연 교수는 대회에서 “민중정치투쟁이 개입되어야 할 지점으로서, 금융위기의 ‘사회화’ 과정을 어떻게 민중적 쟁점으로 만들고 민중의 분노를 촉발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가진 자들의 위기를 민중들의 부담으로 떠넘기는 과정 자체를 민중들이 대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 산 정상 빈민 주거지 및 정부의 교육미션에 의한 새로운 빈민 주거단지. 사진/ 조희연 |
조희연, “금융위기의 ‘사회화’ 과정을 민중의 쟁점으로”
이날 발표에서 조희연 교수는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해 미국의 헤게모니의 위기, 신자유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등 다양한 인식이 제기되는데, 지배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이고, 일정한 친자본적 국가개입주의의 부활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며 “그러나 이를 미국 헤게모니 전반의 위기와 자본주의 위기 일반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은 주체적 실천에 따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희연 교수는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실천 과제로 △현재의 금융부문 위기에 대한 지원과정에서의 투쟁, 즉 ‘부담의 사회화 과정’ 쟁점화 △실물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지원의 ‘계급적 선택성’을 둘러싼 쟁점화와 투쟁 등을 꼽았다.
한편 경제위기 대응에서 본격 검토되어야 할 자본주의의 이행 경로 문제와 관련, 조희연 교수는 소비에트 모델, 서구 사민주의나 유로코뮤니즘, 프롤레타리아독재 없는 사회주의 이행 경로 등을 모델로 들고 “대중의 힘에 의한 ‘이중권력’적 상황을 유지 확대해나가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이번 대회가 무척 인상 깊었다며, 발표를 통해 조희연 교수 스스로 던진 질문은 ‘21세기형 사회주의의 실현’ 문제. 여러 토론 자리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위기의 요인들을 통제하면서, 내부의 ‘사회주의적 다원성’을 존치시켜 이를 내부의 ‘성찰성’의 근거로 만들고, 중간지대의 대중을 획득하고 대중의 정치적 급진화를 촉진해 사회적 권력을 강화하고, 이에 기초하면 국가를 넘는 21세기형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전진하는 것은 가능한가(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