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위기감’이 ‘新우익’을 부른다

일본 ‘신우익(新右翼)’ 해부

일본 ‘신우익’, 유럽 우익정당들과 국제회의 개최

일본의 신우익 조직 ‘일수회(一水会, 잇수이카이)’는 지난 8월, 프랑스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을 비롯해 영국 국민당, 호주 자유당 등 서구 8개국 9개 정당 대표들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위해 일본에 초청해 국제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기무라 미쓰히로(木村三浩) 일수회 대표는 이 행사에 대해 “우리는 모두 애국자다. 모두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 및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전후의 국제 시스템에 반대해, (2차대전의 일본 책임을 물은)도쿄 재판은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유럽 우익 정당의 일본 방문 중의 실질적 내용이 있는 최대의 볼만한 장면은 일수회와 함께 “세계평화를 가져오는 애국자의 모임”을 열어, 이민 배척이나 글로벌화 반대 등에서 일정한 공통 인식을 확인한 점이다.

르펜은 인사말에서 출생률의 저하 문제를 거론하며 “일본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이민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를 고쳐서 국가가 확실히 존속할 수 있는 기회를 젊은이들에게 줘야 한다”며 “야스쿠니(靖國)신사나 메이지진구(明治神宮)를 참배하고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우익’, 새로운 것은 무엇?

일본 ‘신우익’의 활동은 최근 매우 활발하다. 중국 관영 [인민일보](인터넷판)는 최근 일본 신우익의 활동을 해부하고 분석하는 기사를 실었다.

[인민일보]는 일본 신우익들이 민족의 이익이나 국익이라는 카드를 꺼내, 서구에 반대하는 진한 발언을 해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사실, 역사 인식 문제에서 ‘신우익’은 차를 타고 확성기로 떠들며 길에서 선전하고 다니며 항의 활동을 하는 ‘행동 우익’과 큰 차이가 없다. 기무라 일수회 대표는 난징대학살의 사상자 수와 역사적 진실까지 회의를 표명했던 적이 있다. 또, 나라를 위해서 죽은 군인이 있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야 한다고 생각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침략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럼, 이른바 ‘신우익’의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일부의 일본 우익은, 그들에게는 ‘우익’보다 ‘황익’의 호칭이 적당하다고 지적한다. 즉 ‘존황(尊皇)’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일본 우익은 일본 하층사회 일부의 정치적 호소를 반영해, ‘반체제’(반정부), 반서구중심주의로, 천황주의, 민족주의, 아시아주의 등을 호소하는 것을 “정통”이라고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것은 당시 일본을 군국주의의 길로 이끈 사상 기반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1878년에 도야마 미쓰루 등이 향양사(向陽社)를 결성해, 1881년에 현양사(玄洋社)로 개명했다. ‘현양’이란 즉, 대한해협을 넘어 ‘대륙에 군림한다’는 의미다. 현양사의 헌칙3조는 ‘황실을 경대할 것’, ‘본국을 사랑 할 것’, ‘인민의 주권을 고수 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다. 현양사는 후에 흑용회, 재수생회, 대일본 생산당, 다이토 학원으로 발전한 일본 우익의 근원이 되는 조직이다. 1919년에는 대일본국수회가 결성되었다. 이것은 ‘관념 우익’의 현양사나 흑용회와 비교하고, ‘행동 우익’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그 밖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과정에서 구미 사상이 대량 유입되면서 역사무대에 ‘혁신 우익’이 등장했다. 그들은 ‘조직 운동’을 강조해 대내적으로는 정치 기구 개혁을, 대외적으로는 구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 외교’의 실현을 요구했다. 기타잇키는 1919년에 결성된 유존사의 지도자로 ‘조직 우익’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의 개조,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주장했다.

제2차 대전 후, 전통적인 일본 우익 조직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미.일 양국 정부의 영향아래 친미 반공이 ‘전후 우익’의 특징이 되었다.

1970년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 후, 민족파의 ‘신우익’이 정치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들은 우익 운동의 ‘원점’에 복귀해, ‘관념 우익’과 ‘조직 우익’의 ‘정통’을 계승하는 것을 주장했다. 1972년, 스즈키 쿠니오 등이 ‘신우익’의 대표적 조직 일수회( 一水会)를 결성했다. 그 정치 이념은 전후의 얄타체제를 부정해 대미 자립을 주장하고, ‘문화 천황주의’를 창도해 천황의 정치 이용에 반대하며, ‘세계 각 민족의 단결과 존중’을 주장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신우익도 실제로는 싫증날만큼 들었던 우익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다시 찾아든 ‘위기감’, 일본 우익의 기반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2008년)’에서 ‘일본 우익’의 근원에는 ‘실제보다 과장된 위기감’이 자리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일본 우익은 “서세동점에 대해 과잉이라 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 진출이 곧 방어전쟁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며 “일본 우익의 기원은 ‘서양 대(對) 아시아’ ‘천황’ ‘혁신’의 3중주였다”고 밝혔다.

2차대전 후, 천황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절대적 존재로 받아들이진 않는 현실적 인식으로 ‘상징 천황제’와 55년 체제가 확립되면서 일본 우익은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자민당의 장기집권과 강력한 혁신야당인 사회당으로 양분된 55년 체제가 붕괴되고 일본 경제의 장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위기감’이 일본사회에 다시 팽배해 졌다. 실제보다 과장되었든 아니든 이러한 ‘위기감’의 고양에서 일본 우익들은 기지개를 크게 펴고 있는 것이다.

일본 ‘신우익’은 인원수야말로 많지 않지만 그 정치 이념은 현재 일본인들의 사회심리를 반영하고 있어, 영향력을 계속 확대하는 경향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일본과의 관계를 관찰하는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문제의 하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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