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운동에서 PD운동으로

[에세이] 새로운기독교운동 - 예수운동에서 PD운동으로

최승현(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 조직국장)


1.
내가 있던 절은 분명히 조계종이지만 주지스님이 애 아버지였다. 내가 무슨 태고종이면 말도 안하겠는데 조계종인데 중 신분에서 여자를 꼬셔서 가정을 이뤘다는 것은 사회기준의 윤리에서도 올바르지 못하고 종교계에서도 이건 범죄다. 외제차는 기본이고, 밤7시만 되면 중들이 우르르 절 밖으로 나가서 룸싸롱 가고 그리고 속 쓰려서 새벽예불에는 참석도 안했다.

중이나 목사나 제도종교에서 밥 벌어 먹고 살려면 승가교육원에서 배운 거 지식으로만 감춰둬야 하고, 신학교에서 배운 거 지식으로만 감춰둬야 한다. 절대로 통일교나 jms가 기존 제도종교 기독교보다 뛰어난 조직이라서 성장한 게 아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가 <예수천국불신지옥예수부활승천>보다는 조금 더 사람 같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에 기독교인들이 그쪽으로 몰린 것이다. 그렇지만 긴 시야에서 보자면 ... 어차피 털릴 거 통일교든, jms든, 기독교든 그게 그거다. 사람이 선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너무 순진해버리면 ... 오히려 사람 자체는 더 반듯하고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여지없이 제도종교의 종교직업인들에게 털려먹는 것이다. 거기서 안 털려도 무당한테 털리나 어디서 털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약 ... 평신도들이 중이든 목사든 어느 놈이든 뭐든 안 털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상처받지 않고 더 잘 살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존경심을 가질만한 좋은 스님도 목사님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분들이 많이 있는 것과 종교인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자기들 원시종교의 역사를 평신도들에게 말하지 않고 시류에 체념하고 편승해서, 아무런 발전도 개혁도 없이 ... 안 털릴 수도 있는 착한 불교인들과 착한 기독교인들이 계속 해서 재산이든 정신적 상처든 털린다는 것은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왜 어느 인간의 선한 동기가 그 결과물이 보상받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로 되돌아오는가? 한 두명이면 그것도 인생이라고 달관할 수도 있지만, 대규모로 앞으로도 그런 슬픔이 계속 반복된다면 이것은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할 게 마땅하다.

그래서 '새기모'가 그런 차원에서 설립된 거고, 나 혼자여서 무엇을 할지 잘 모르던 일을 '새기운'에서 조직적으로 하고 있다.

이 내용을 잘 모르는 분들이 <새로운기독교운동 - 새기운>을 폄하하고 까려는 분들이 있다.

1) 상대방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인내심과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일단 지 맘에 들지 않으니 우선 까고 보자식의 사람.
2) 마찬가지로 지가 무식하니까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괜히 시비 거는 사람.

이런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그 사람이 안티기독교인이고 보수기독교인이고 목사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에 문제가 많은 분들이다.

새로운기독교운동은 사실은 제도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안티기독교운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종교는 공장에서 콱콱 찍어내듯 어찌어찌 개척교회 세워서 성도 수 1천명 돌파해서 부자가 되려는 야망을 가진 신학생이나, 어떻게 줄 좀 잘 타서 월3-400 안정적으로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겠다는(평신도들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그런 분들이 더 이상 확대재생산 되지 않도록 제도종교란 틀 자체를 완전히 부셔버리고 다시 세운다는 뜻이 담겨있다.

완전히 부시고 다시 일으킨다고 표현하면, 또 개독은 죽어야 하고 어쩌고 이상한 소리하는 안티기독교인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분들이 안티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본인이 난독증이 심해서, 일단 상대방에게 악플 달고 화내기 전에 자기가 이해가 안되면 시간을 가지고 상대방을 관찰하려는 인내심이라도 있어야 어디가서 어른대접 받는데, 안티기독교인이라고 다 안티기독교인이 아니고 이 바닥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워낙에 많아서 설명하고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애타게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징한 사람들 꽤 많다.

<운동>을 알리려면 <홍보>도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 <퍼포먼스>도 필요한데 그리고 <운동>을 일으킬 가장 적합한 <운동방식> 즉 <수단>이라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 단지 신학을 하려한다, 목사자격증을 따려한다, 이 이유만으로 진정성을 의심하고 설명하고설명하고 또 설명하는데도 못 알아듣고 괜히 시비 거니까 정말 많이 열받고 지치고 에너지를 뺏긴다.

현재까지 약 15년의 역사를 지닌 안티기독교운동은 운동을 한 적이 없고 동호회 수준이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마치 본인들을 노동운동하는 활동가들이나 독립운동했던 투사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정말 교만하고 부끄러운 발상이다.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고생도 하지 않고, 절대로 다치지 않으면서, 내 생활을 현실에서 안정적으로 지켜내면서 할 수 있는 운동은 아무것도 없다. ngo활동이면 또 모를까? 아니면 우리동네 아파트화단 푸르게푸르게 그런 운동이라면 또 모를까? 저는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키보드만 두들기며 오프 나와서 개독박멸 술잔만 부딪히면 자기 할 거 다했다고 생각하는 안티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실제 모습이 남들보다 똑똑한 키보드워리어였을 뿐임을 반성해야 한다.

개인단위로 그런 활동도 나름의 의미와 역할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건 조직적이지도 못하고 대단한 파급력도 없다. 운동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거에 맛들리면 본인은 안티기독교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착각하겠지만 사실은 사기꾼을 사기꾼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단지 그 뿐이다.

단지 그 뿐인 내용을 매우 오랜 시간동안 ... 본인의 열등감을 분출하고, 새디스트적 변태적 쾌락을 갈구하며, 욕이나 댑따 온라인게시판에 퍼부을 뿐, 그러면서 본인의 인성적인 측면도 폭력에 물들어서 점점 상처받고, 남 깔 때는 재밌겠지만, 우연한 계기로 다른 안티기독교인들의 폭력성이 자기자신을 향하게 될 때는 ... 그때야 깨닫는다. 아! 이러면 안되는 거였구나.

사기꾼을 사기꾼으로 보지 못하는 분별력없음도 지적당해야 하지만, 죄다 사기꾼이라고 냅따 축구공까듯 내질러버리는 연민없음도 문제있는 것이다. 이 놈 까고 저 놈 까고 그렇게까다보면 이 세상에 사람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고 오직 양파껍질만 수북해질 것이다. 사람이 축구공이 아닐진데 축구공까듯 발로 까는 걸 즐기면 그 죄 진 게 언젠가는 정의를 실현하는 정도를 지나쳐서, 폭력이 되고, 나와 남을 같이 망치게 될 뿐이다.

가장 효과적인 안티기독교운동을 위해서는 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이 최단거리 최대효과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안티기독교인 김철수요, 요단강이요 해봤자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대답만 돌아온다. 그나마 목사라도 되어야 타인에게 제시해줄 수 있는 자격요건을 취득해서, 기독교계 언론도 탈 수 있고, 종교계 주목을 끌 수 있고, 언론이라도 타서 기독교가 이래서 문제입니다 말이라도 한 마디 해보지, 안티기독교카페나 다음아고라에서 몇 백 단위로 아무리 떠들어봐야 거의 효과가 없다.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역할도,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는 용이성측면에도 목사 라이센스는 반드시 필요하다. 단 그 사람이 목회를 하면서 자기가 왜 목사가 되려고 했는지 신념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달고. 그리고 이 운동은 뭉치면 뭉칠수록, 기존의 목회자들이 용기를 내면 낼 수록, 평신도들이 신학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탄력을 받는다. 작고한 안티기독교인 스테어님이 괜히 신학을 공부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활동방식이야 그렇다치고, 누구누구 희생하고 고생한다고 남들도 그래야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옳지 않고, 예수도 까고 기독교도 까고 철수도 까고 다 좋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잃어버리면 결국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2.
<역사적예수> 그러면 뭔 역사적인 예수가 있냐? 죄다 사기다, 또 괜히 흥분하고 악플다는 아주 몹쓸 안티기독교인들도 있겠지만 조금만 텍스트를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역사적예수>나 <신화적예수>나 같은 의미란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원본예수>를 찾는 작업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개념이 예수는 실존인물이고 후자의 개념이 예수는 가공의인물이라는 견해가 강하지만, 역사적예수를 제시해주는 문건이 신약의 4복음서뿐이고, 역사적으로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이것도 달랑 두 건만 언급되어있고, 그 마저도 후세에 가필되었다는 학자들의 의심을 사고 있으니 결국 똑같은 뜻이다. 마태복음 마태가 쓰지도 않았고, 요한복음 요한이가 쓰지도 않았는데 예수의 전승을 우리가 여러가지 가지고 있다한들 이 조차도 이 자료가 절대적인 참이라고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학생들이 JEDP문서나 Q자료를 괜히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실존했든 실존하지 않았든, 한 명이든 여러명이든, 기독교의 독창적 창작물이든 다른 고대종교를 배꼈든, 의미는 한 가지로 좁혀진다. 예수천국불신지옥예수부활승천은 뻥이라는 거고, 이를 기독교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는 제도종교 기독교는 결국은 독선과 배타성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게 뭐냐? 그거다.

불교 역시 처음부터 대승경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시불교 - 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로 이어지는 역사가 있고, 기독교에는 바울이 있듯, 불교에는 용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예수만 중요한 게 아니라 역사적석가모니도 중요한 질문이 된다. 예를 들어서 석가족학살당할 때 석가모니가 쫄았냐? 안 쫄았냐? 방관했냐? 적극적으로 막으려고 했냐? 이런 콘텍스트를 알아가는 게 대뜸 법화경이나 금강경이나 화엄경부터 읽고 아! 나는 진리를 알았네, 그런 식으로 정신적자위행위를 하는 것보다도 훨씬 그 종교의 깨달음을 성찰하는데 올바르고 빠른 접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로 종교공부다.

그 다음 질문도 있다. 그러면 내 종교는 이걸 말하고 있는데 남으 종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종교가 인간에게 주고자하는 것이 무엇인가?

또 다음 질문도 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종교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아주 심플하고 무식하게 한 줄 요약을 시도한다면, 대승적차원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찰은 <착하게 살아라> 이거 하나면 충분할 것 같다. 여기에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는 그러면 어떻게 착하게 살 것인가? 개인만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사회가 착하게 사는 착한사회가 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무엇이 정의인가? 더 열심히 생각을 해봤더니 <새기운>에서는 <사회주의기독교>라는 답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를 알아갈 때 그 종교의 배경을 공부하지 않고 대뜸 법화경이나 금강경이나 화엄경부터 읽고 아! 나는 깨달았네, 이제 도복이나 입고 죽비로 남의 머리통이나 때리면서 폼이나 잡아야지 이러면 정말 큰 일이 나는 것이다.

불교의 태생배경은 힌두교를 배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를 원류를 볼 때 유대교와 히브리역사가 중요해지듯, 불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든 종교사상은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부처의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인도문화는 아리안족의 손에서 창조되었다. 아리안족은 코카서스의 북방에 살고 있다가 인도의 서북부에 있는 인더스강 유역을 거쳐 판잡 지방으로 침입하여, 토착민인 드라비다족, 문다족을 정복하고 정착한다. 그리고 정복당한 토착민은 노예가 되어 수드라라는 가장 천한 계급이 된다. 이 시기를 기원전 13세기경으로 추정하고, 베다경은 이 무렵에 아리안족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카스드제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기원전 10세기까지를 인도역사에서 베다기라고 부른다.

또 괜히 시비 거는 안티기독교인 있을까봐 욕먹기 싫어서 안 써도 되는 이야기 쓰자면, 힌두교란 명칭은 인도에서 발생된 모든 종교를 통칭하는 단어다. 불교가 생기기 전의 힌두교, 정확히는 지배종교였던 브라만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바탕을 둔 종교다. 그리고 우주의 궁극적 진리인 <브라만>과 개인내면의 <아트만>이 서로 하나라는 <범아일여사상>을 가지고 있다.

인도의 고대철학은 통상 3시기로 나뉘어진다.

1) 베다기 - 기원전 13세기쯤,
2) 브라흐마나기 - 기원전 8세기에서 10세기쯤,
3) 우파니샤드기 -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쯤,

이미 베다경전이 형성될 때쯤 브라만교의 <윤회사상/업사상/인과>등은 모두 경전 속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무슨 소리가 되냐면,

인간의 신분의 천함과 높음, 길흉화복은 모두 전생의 <카르마(업)>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명박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고, 안중근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비명횡사했고, 노무현도 마찬가지고, 삼성대기업 아들은 원래 잘나고 착해서 잘 살고, 너는 원래 전생에 그런 놈이어서 항상 생활비 걱정하고, 너네 부모님과 형제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해석되며, 브라만교의 교의가 지배계급을 옹호해주며 민중을 착취하는 역할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일본은 하나님 안 믿고 주 예수 영접 안 해서 벌 받아서 쓰나미로 사람 죽었고 이렇게 떠드는 것과 같은 수준의 부조리다.

석가모니는 소극적인 좌파였지만 그의 가르침 속에는 기존 세상에 대한 불온함이 그대로 녹아있다. 깨달으면 부처다 이 말은 곧 인도의 카스트제도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으면 이 순서로 가야 한다.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여실지견(모든 것은 변하고 -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고 -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이 가르침은 브라만교의 절대적신관인 브라만과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승불교가 브라만교의 교리(브라만과 아트만)을 상당부분 차용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멀어지고, 베다경전의 주요 신들을 그대로 흡수하고 윤회사상을 수용한 것은, 대승불교가 아니라 또 다시 브라만교로 되돌아갔다고 표현해야 한다.

불교에는 신이 없다면서 석가모니를 신격화하고, 각종 보살들을 신격화하고, 신격화하다 못해서 한국불교에서는 산신각까지 설치해서 산신령도 신격화하는 모순을 저지르게 된다. 정작 석가모니는 그런 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심하게 표현하면 그딴 거 없다고 말했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적 석가모니는 어느 종교의 교주님이 아니라 사실은 혁명가로 분류하는 게 옳겠다.


3.
새기운에는 현재 각종 단체에서 활동하는 40-60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꽤 많이 가입되어 있다. 새기운이, 사람이 착하게 사는 것, 그리고 사회가 착해지는 것의 대안을 <사회주의기독교>라고 내 놓은 참에, 그러면 이제 <사회주의>는 무엇이냐? 여기에 대한 글들도 앞으로는 사회주의 활동가 동지들의 주도하에 나왔으면 좋겠다.

혹 누군가들은 <맑시즘>과 <예수>가 무슨 관련이 있냐? 할지도 모르지만, <맑시즘>도 <서양철학>이고, 그 사상의 기원은 분명 <예수>에게 있다. 착하게 산다는 게 ... 화 내지 않고, 할머니할아버지들 다리 주물러주고, 물론 이것도 좋은 거지만 <예수운동>, <하나님나라운동>에 또는 구약에 담긴 <예언자정신>처럼, <정의>와 <공동체주의>를 생각해보건데 예수의 운동이 정확히 PD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내가 만약 좌파로 학습이 잘 되어 있고 다른 사회주의 동지들보다 이론가적인 덕목이 높았다면, 스스로 했겠지만,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전혀 그렇지 못하기에, 앞으로는 다른 동지들의 글들이 많이 올라온 것이고, 그러면 예수운동이 PD운동으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그 사회주의가 무엇이냐? 궁금해하는 벗님들에게 새기운이 좋은 학습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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