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철(새기운 대표)
[인권칼럼] 가난한 철거민들과 함께 생각해보는 예수상예수에 관하여는 흔히 잘 알려지지 못하여 잘못 알고 있는 일들이 많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가 살던 세계는 아랍, 그리스, 로마 등 다양한 문화와 함께 주로 유대교가 지배하던 세계였으며 그 속에서 자라며 영향 받은 예수는 일찍이 한번도 기독교를 창시하거나 기독교인임을 주장한 사실이 없다.
예수가 구세주라거나 하나님의 아들,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장은 모두 예수가 아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믿거나 생각해낸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마치 기독교인의 전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그를 기독교의 성전에 모셔놓고 그의 주변에 높고 큰 성벽을 쌓아 올렸을 뿐 아니라, 타인들의 비판 간섭을 불허하는 가운데 그들의 구미에 맞는 오늘날의 예수상을 그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비기독교인들조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자신이 기독교인이나 되는 것처럼 기독교인의 생각으로 예수를 생각하여, 예수는 기독교에 속한 인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한 송이 꽃이나 한 구루 나무가 내 집 울타리 안에 있다하여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물건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원래 생명은 어떤 것이든지 어느 누구의 지배를 받거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단 한 번도 기독교인이었던 사실이 없는 예수를 마치 어김없는 기독교인으로 아는 일은 독실한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를 싫어하는 비기독교인임을 불문하고 기독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교리나 세계관에 오염되어 있는 증거이다.
이것은 분명한 독단이나 오해로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무 쓸 모 없는 헛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런 일은 없다”는 확실한 믿음 아래 서야 우리는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의 신앙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경전 속에 들어있지만 토속신앙인이든, 종교가 없는 사람이든 관계없다. 다만,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많이 배운 학자들보다는 오히려 배움이 적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예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말하는 자칭 의인에게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붙들어 세운다. 그리고는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폭탄선언을 한다.
이른바 믿음 좋은 종교인들이 마음속에 두고 잘 지켰다고 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교회에 잘 다니는 1등 신자들이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정말 저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을까?
예수는 이점에서 저들을 깊이 꿰뚫어봤다.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잘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 의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마25:40)
소위 종교계의 지도자들, 믿음 좋다는 사람들은 곁으로 하나님의 명을 지키는 시늉만 하고 정말 중요한 일은 지키지 않고 불의를 자행했던 것이다. 교회 열심히 잘 나가고, 주일 잘 지키고, 기도 잘하고, 성경 잘 읽고, 십일조 잘 내고. 그러나 이들은 자기가 가진 재물은 한사코 굳게 움켜쥐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지 않았다.
손아귀에 물건을 불끈 쥐고 있는 원숭이는 절대로 병 밖으로 손을 빼낼 수 없다. 이처럼 재물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와 같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누군가. 가진 것이 없기에 가진 것을 자랑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기득권이 없기에 기득권으로 횡포를 부릴 수 없는 사람이다. 가진 사람들은 하늘과 나 사이에, 이웃과 나 사이에 첩첩으로 담을 쌓고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과 저들 사이에, 이웃과 저들 사이에 아무런 담이 없는 사람들이다. 언제든지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이다.
물질의 축적은 축복이라고, 물질을 많이 가질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증거라 말하는 교회지도자들의 주장 어디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각별히 주목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예수는 이미 2천년 전에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자본주의세계의 도래를 내다보았으며 그 잘못과 종말을 예언했다.
물질이 풍족한 자들이 축복받은 자라는 주장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난한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뜻이 이 주장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본주의 기독교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 정면으로 맞서 경고하며 질타하는 이가 바로 예수다.
예수는 결코 자본주의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아니, 예수는 자본주의 기독교를 철저하게 배격했을 뿐 아니라 그 종말을 예언한 분이기도 하다.
[새기운] 본문은 27일 성남에서 있은 노동자민중생존권평의회(노민평) 판교철거민대책위 모임에 참여한 새기운 전영철 대표의 후기다. 전 대표는 판교철거민들의 성남시청(이재명 시장) 집회 후 가진 송년모임 자리에서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제하의 말씀을 나누며 철거민들의 고된 주거생존권 투쟁을 격려했다.

[판교철거민들과 함께 한 새기운 전영철 대표 후기]
- 새로운 개념의 교육의 장
흔히 알려져 있는 교육의 특징은 현실과는 떨어진 장소에 자리 잡고 일정한 교육훈련을 받은 사람에 의해 실시된다. 그래서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과 분리된 것일 뿐 아니라 인위적이고 거의 일방적인 것이 특징이다.
오늘 내가 참관한 것은 그 기본이 주민들 자신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일 뿐 아니라 그 교육적인 측면이 돋보였다. <운동>이란 그 근본이 어디까지나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 가운데 절실한 필요에 의해함께 참여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보였다.
그러므로 운동 속에서는 처음부터 공리공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고 소박하고 진솔하다.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주제는 현장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장은 무진장한 주제의 보고다.
특히 삶을 역행하는 부조리한 현실은 이미 그 자체로서 교육의 소제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일반적인 교육의 장에서는 피교육자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일부터가 큰 과제다. 그만큼 교육은 참가자의 적극적이고 절실한 참여동기 부여에서부터 문제에 봉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운동>이 갖고 있는 기능은 대단하다. 운동에서는 오히려 참여동기의 과잉성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수고하여 일부러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에서 제기된 문제를 정리하고 참여자들의 의견이 잘 소통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면 된다. 장소 또한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차려놓은 밥상머리는 교육을 위해 다시없는 최상의 교육장이다.
아마 우리네 삶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처럼 싱겁고 재미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문제가 있기에 마르지 않는 문제의 샘이 있기에 오히려 우리는 활력에 넘치게 살 수 있다.
역설적으로 부정과 부조리를 만드는 자 있기에 우리는 잠들지 않고 깨어서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는 문제아들이야말로 우리들의 운동을 활성화하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 날카로운 메스로 해부를 기다리는 시체와도 같다.
우리는 이들 덕택에 우리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규탄으로 시작한 우리들의 운동은 언젠가는 바뀌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좋은 교육운동의 자리를 깔아 주어서 감사하다.
[글쓴이 소개] 전 영 철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새기운 http://newchristianity21.org/ ) 대표, 우석대학 명예교수(영문학), 마음사랑교회 목사.
전영철은 2011년 5월, 인류의 역사에서 제국주의 기독교의 시발점이 된 1차 니케아공의회(325년)를 현지 답사차, 공의회가 열렸던 오늘날의 터어키 이즈닉(Iznik)을 방문했다. 전영철은 니케아공의회에서 비롯된 종교적·정치적 야합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종교간 적대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적인 기독교인·무슬림·유대교인들과의 진솔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2011년 11월에는 메카 순례(Hajji)에도 참가하는 등 국내외 무슬림과도 직접 대화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불교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인 인드라망 정신을 변혁적인 원형의 예수정신과 연계하여, 가난한 이웃들이 스스로 그 사회의 주체로 성찰하고 네트워크화 할 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된 종교운동의 하나됨을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