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사 읽기] 여성, 그들의 반역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

사회실천연구소

[실천] ‘인류사를 거스른 반역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여성의 세계는 남성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여성노동자에게 평등권은 오직 (남성노동자와) 불평등을 똑같이 나누는 것일 뿐이다. 상층계급 여성이 일단 정치권력에 접근하면, 이 ‘여성 권리’의 옹호자들은 자기계급 특권의 열광적 옹호자가 된다. 어린 자매들을 무권리 상태에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면서 말이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1908년)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결코 이전에 인류는 그런 혁명을 목격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급격히 군주제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바뀌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 날을 보았고, 그 날의 영광을 누렸다. 그녀는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구상과 창조에 기꺼이 참여했으며 여성들의 ‘천년왕국’을 실현시키는데 삶을 바쳤다.

그러나 혁명이 공고화되면서 그녀는 혁명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를 더는 갖지 못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녀는 의사결정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불명예와 고독으로 번민했다. 그러나 비록 실패했지만, 그녀가 혁명 러시아에서 온갖 것에 맞서 싸운 실천은 러시아 역사뿐만 아니라 여성의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콜론타이가 죽고 나서 더욱 빛을 발했다.

콜론타이는 여러 얼굴을 지녔지만, 그 가운데 우리는 그녀의 삶 전체에 ‘화두’였던 여성의 운명을 바꾸려고 애쓴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노동자,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다.

나는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빽빽이 들어찬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고, 한쪽에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내 눈길은 아들 또래인 한 작은 아이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너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니까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들어냈다.

1986년 러시아 여성 노동자가 마주한 삶이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그 날 겪은 일은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렇다. “다른 사람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그녀는 그 결심을 끝까지 지켰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여성과 그들의 운명은 내가 살고 있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고, 그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은 나를 사회주의로 이끌었다.”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그녀는 1872년 3월 19일, 페테르부르크 교외에서 육군 대령의 딸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어린 그녀에게 두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생겼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귀족 출신이면서 ‘인민의지당’(나로드니키) 당원인 소피아 페롭스카야라는 여성이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꾀했다가 붙잡혀 처형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때 러시아 여성들에게는 물론 어린 콜론타이에게도 매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른 하나는 가정교사 마리아 이바노브나 스트라호바와의 만남이었다. 스트라호바는 6년 동안 콜론타이를 가르치면서 소설가를 꿈꾸던 어린 제자를 여성 혁명가로 눈을 뜨게 만들었다.

콜론타이는 21살이던 1893년에 사촌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잘못되었음이 곧 드러났다. 남편 블라디미르는 콜론타이가 즐기는 독서나 철학 토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결혼 뒤에 남편보다 친구인 샤두르스카야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둘은 한집에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새로운 사상에 대해 읽고 토론했다.

‘아내’와 ‘어머니’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적인 자아실현을 모색하던 콜론타이는 맑스가 쓴 책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는 1897년에 남편과 헤어져 스위스로 유학을 떠난다. 취리히에서 콜론타이는 맑스주의에 대한 책을 실컷 읽을 수 있었다. 맑스주의는 그녀의 눈을 “열어주었다.” 1년 뒤 그녀는 지하 혁명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불같은 의지를 품고 돌아왔다. 1898년 그녀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들어간다.


여성노동자 운동은 노동자 운동 전체에서 따로 뗄 수 없는 일부이다. 여성 노동자는 모든 반란에서 남성 노동자와 함께 일어났다. ... 소심하며 짓밟힌 채 무권리 상태에 처해 있던 여성은 파업과 격동의 시기에 빠르게 성장해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에 대해서』



러시아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닭이 새가 아니듯,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 그 사회에서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층 귀족에서 태어난 여성은 그래도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 사람대접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온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권리’가 없었다.

콜론타이는 자라면서 그저 하층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자신과 다른 처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을 많이 보았다. “이건 너무 불공평해, 어찌 이럴 수 있지.‘ 콜론타이는 그런 사회적 불평등에 분노했고 자신이 받고 있는 특권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콜론타이는 특히 여성 노동자에 관심을 기울였다.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처참한 일상은 그녀에게 여성의 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 뒤 그녀는 여성운동과 사회주의를 결합시키려고 애썼다. 1905년 마침내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그녀가 눈여겨 본 것은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는 콜론타이로 하여금 맑스주의 같은 세계관에 바탕을 둔 여성해방운동의 길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노동계급 여성해방은 자본가계급 여성해방의 관점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여전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때 러시아 여성노동자는 사회적 성차별의 억압과 계급적인 착취라고 하는 두 겹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자본가계급 여성운동의 관점은 여성노동자의 문제에서 여성이라는 쪽만 살펴봤을 뿐 노동계급이라고 하는 쪽은 지나쳐버린 것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의 목표를 이루는 길을 사회주의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5년 비록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콜론타이는 꺾이지 않고 그 뒤 몇 해 동안 여성노동자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참으로 어려웠다. 두 개의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 하나는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풀 문제였다. 남성이 대부분을 차지한 러시아 사회주의자는 여성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남녀평등을 혁명과정에서 저절로 풀릴 문제로 보았다. 게다가 수동적이 교육수준도 낮은 ‘바바’(러시아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말)가 혁명세력이 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1907년 콜론타이가 직물노조와 몇몇 동조자의 도움을 받아 ‘노동여성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하자, 남성들이 분파주의라고 반대했다. 그때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콜론타이의 시도를 분파주의, 편향주의이며 더 큰 대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 큰 대의의 기치 아래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모이게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콜론타이의 이해는 간단했다. 여성들의 관심과 욕구를 외면하면 여성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콜론타이는 이렇게 경고했다.

여학생과 인텔리겐치아 여성은 부르주아 남녀평등론자들에게 빼앗기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분파주의가 무서워 내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혁명은 남자끼리만 할 것인가.

콜론타이는 노동하는 여성을 조직해야 한다고 굳게 믿은 외로운 예언자였다. 나중에 자서전에 그녀는 이 문제를 놓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모두와 맞서 싸우던 몇 년을 침통한 어조로 되돌아보았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여성운동가들이었다. 1908년 부르주아 여성들이 여성대회를 열어 ‘러시아 여성당’을 만들려고 하자, 콜로타이는 이를 강력히 막았다. 남성의 편견 못지않게 진정한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행위가 바로 부르주아 여성의 부르주아식 남녀평등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요구하는 따위의 ‘위선적’ 주장을 일삼는 ‘여권운동가들’은 그들의 부르주아남편이나 형제들과 동등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노동하는 여성들이 살면서 날마다 맞닥뜨리는 기아의 문제를 못 본 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공동체의 복지보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범주에 드는 여성만의 자아실현을 추구해 왔다고 심하게 퍼부었다.

아이가 죽어 가는데도 하루 14시간씩 혹사당하는 여성노동자들 위해 부르주아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부르주아 여성은 여성문제가 ‘권리’와 ‘정의’의 문제라고 말한다.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 모든 것은 빵 한 조각의 문제이다. 혁명으로 여성노동자 계급의 경제독립을 얻어내지 않고 여성해방을 이룬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런 공격은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그때 상류사회 여성들에게 일반적이었던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그녀는 독침을 날렸다.

임금노동을 통한 자본주의 착취 때문에 생겨난 고통과 궁핍의 바다를 찻숟갈로 비우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그자들이다.

이 두 가지 일화는 지금도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이 부닥치는 문제이다. 그때 콜론타이는 이 문제를 가지고 동료 남성 사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여성들과 싸웠다. 어느 볼셰비키가 지적했듯이, 그녀는 사회주의를 위해 싸웠을 뿐 아니라, “인류사를 거스르는 엄청난 반역”(여성해방)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계속>


▒ 출처: 사회실천연구소 발행 '실천' 2007년 11월호

[사회실천연구소의 말] http://spri.jinbo.net/

실천(Praxis)

"일상적으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자본주의와 늘 전면에서 투쟁하면서 자본주의 타도의 길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욕은 강하나 이론적 천착이 부족하고 현장에서 맨날 투쟁 속에 살다보니 이론적 감각이 무디어졌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실천은 이론적 작업을 요구합니다." (어느 실천활동가의 말)

우리는 지금 여러 '유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개혁과 신우익의 정치적 우세, 지구적 자본주의의 극적인 전진, 사회주의의 종말 등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겸허하게 이론을 다시 꼼꼼히 살피고 국제정세를 분석하면서 사유를 넓히고 운동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번역의 시대'를 거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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