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과 기계적 유물론도 구별하지 못하는 박찬식 박사님께 드리는 고언
- 경향신문 강신준 교수의 <자본> 연재의 비판에 대한 답변
최인석
경향신문에 맑스의 <자본>을 소개하는 강신준 교수님의 글에 대해 몇 분이 나름대로 “비판”이라고 하면서 의견을 달아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신문에 쓰는 글이란게 엄격한 논문 형태의 글이 아니라서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인데다 이들 “비판”이라는 글들이 대부분 개념정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혼란스러운 것들이라 아예 무시를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특이하게도 스스로 이름을 밝히고 거기에다 박사라는 직함까지 걸고 있어서, 저로서도 이 분의 얘기를 건너뛰는 것은 혹시 “동지에 대한 태만”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어 강신준 교수님의 강의를 여러 차례 듣고 나름대로 자본을 공부하고 있는 학도로서 간단하게나마 고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에앞서 저에 대한 소개가 예의일 것 같습니다. 저는 공학석사까지 마쳤으나 세상에 대한 지혜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시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입니다. 글 전체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질 가능성이 있는데다 또 그럴만한 가치도 없어 보여서 이 분의 글 앞부분만 가지고 얘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분의 글에 대한 비평으로는 충분하리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한 가지는 논의를 제기하는 방법과 관련된 것인데, 어째 학위과정을 밟았다고 보기에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자본을 공부하는 동업자로 간주하고 고언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이 분의 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기계적 유물론이라는 근거로 <자본>의 다음 문구를 제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운동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즉 인간의 의지나 의도와는 무관한, 아니 오히려 이들 의지나 의식·의도를 규정하는 그런 법칙이 지배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이 분은 글의 첫 부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강신준 교수님께서 맑스의 유물론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해석했다는 단정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단정의 근거로 강신준 교수님께서 인용한 위의 구절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런 얘기를 하려면 먼저 쟁점이 되고 있는 유물론과 기계적 유물론이라는 두 개념을 구별하고 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계적 유물론은 유물론에 “기계적”이란 수식어가 들어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수식어가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않은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부터가 이런 문제를 다를 때 필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학위를 하신 분이라면 이 정도 논의의 기본은 알고 계셔야 할 텐데 마음이 급하신 탓이었는지 곧바로 논의를 비약시켜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논의의 내용을 보면 사실 이 분은 이들 두 개념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본조차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이제 이들 두 개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물론에 대한 이해는 매우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맑스(혹은 맑스주의 노동운동)와 관련된 측면으로만 국한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위에서 강신준 교수님께서 인용했던 맑스의 구절은 유물론을 설명한 글이지, 기계적 유물론을 설명한 글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나 의식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유물론의 명제입니다. 이 말 자체는 기계적 유물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기계적 유물론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덧붙여졌을 때에만 비로소 수식어인 “기계적”이라는 말을 유물론의 머리에 붙이게 됩니다. 즉 “바로 이런 자연법칙 때문에 어떤 의식적인 행동이나 의지를 실천하는 것도 모두 무위로 돌아간다. 혹은 무의미하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단지 유물론을 설명하고 있을 뿐인 구절을 곧바로 기계적 유물론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분뿐만 아니라 역시 강신준 교수님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글을 올리고 있는 몇몇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데(특이하게도 이 분들의 논의수준과 논의방식이 매우 흡사합니다.), 다른 사람과 견해의 차이를 제시하는 얘기를 할 때는 쟁점이 되는 개념을 매우 정확한 범주로 정의를 해 둔 다음에 얘기를 해야 합니다. 동일한 개념도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수준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하거든요. 위에서 말씀드린 “기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한 내용의 얘기를 맑스는 물론 강신준 교수님의 어떤 책이나 글에서도 비슷하게라도 결코 한 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있을 턱이 없지요. 도대체 그런 바보같은 얘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강신준 교수님께서 신문에 <자본>을 소개한다는 말이라니요? 더구나 세상의 변혁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맑스를 공부하다니요?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기계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맑스를 비판하고 맑스를 왜곡하기 위해서 맑스를 반대하는 진영의 사람들이나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지, 진지하게 맑스로부터 변혁의 열쇠를 찾으려 고민하던 사람들이 사용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이것과 비슷한 것으로 경제결정론이란 것도 있지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맑스를 해석하는 견해라기보다는 맑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단지 맑스(혹은 맑스주의자)를 왜곡해서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낸 견해일 뿐입니다. 세상의 변화가 경제요소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바보같은 얘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분이 스스로 하고 있는 얘기처럼 보다 중요한 요소로, 일차적인 요소라는 의미가 있을 정도이지요. 그래서 맑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들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맑스를 얘기하는 것은 본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혹시 박찬식이라는 분은 부르주아적 견해에 서 있는 분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되어서 이런 충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가 첫 번째 충고이고 이제 보다 본질적인 충고를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더욱 중요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박찬식이라는 분이 맑스를 공부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이 분이 앞으로 공부를 계속해나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충고입니다. 맑스에 대해서,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르주아 학자들이 지어낸 황당한 개념으로 논의하는 것은 맑스의 연구를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 십상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실천적 의미가 없는 말장난 같은 것이니까요. 사실 부르주아적 견해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아무리 과학적이라고 한들 부르주아 경제학이 소멸하지 않듯이, 맑스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맑스를 기계적 유물론이나 경제결정론이라고 비판한다고 해서 맑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현실의 변화는 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힘에 의해 결정되니까요. 그래서 맑스주의자의 얘기는 맑스주의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부르주아적 견해는 부르주아 진영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편 사람들에게 확신을 다지기 위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일 뿐 자신의 논리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환상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박찬식 박사도 강조했듯이 현실에서 실천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론이나 논의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맑스를 돌아보는 까닭도 맑스에게서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문제, 혹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실천적 단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맑스의 유물론을 기계적 유물론과 구분하는 논의가 무의미한 논의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결론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재의 실천적 단서를 얻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진지하게 이런 실천적 관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 보시면 어떨까요? 박찬식 박사께서는 공부의 “홀로서기”라고 일컬어지는 박사학위까지 받으시면서, 그리고 강신준 교수님에게 이런 글을 쓰실 정도까지 되셨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 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실천적인 수단으로 제시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입니다. 이런 얘기는 자칫 상대로부터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을 역으로 유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강신준 교수님께서는 실망스럽게도 박찬식 박사께서 단언적으로 주장하셨던 기계적 유물론자가 아니다 보니 그동안 주로 실천적 수단을 만드는 일에만 종사하신 분입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젊은 맑스 경제학자로부터 “비학문적”이라는 비판을 받기까지 한 적이 있는 분입니다. 그러다보니 노동운동과 관련된 분들 가운데 신경영전략, 산별노조, 임금정책, 교섭정책, 비정규노동, 정파문제 등의 주제를 다루어 본 경험이 계신 분들은 대부분 강신준 교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아대학교의 강신준 교수님 홈페이지에 이들 관련 논문들의 목록이 올려져 있으니 시간 나실 때 강신준 교수님이 기계적 유물론자인지를 확인도 할 겸 한 번 들러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맑스를 허망한 말장난이나 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실천적인 의제에 몰입하여 하나라도 우리 운동에 도움이 되는 정책적 수단을 개발하는 것이 지식인 본연의 의무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박찬식 박사님께서 혹시 이미 그런 정책적 수단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이 있으시다면 제가 드린 이 충고가 쓸모없는 노파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라도 한 번 제시해 보시면 어떨지요. 가장 최근에 큰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한진중공업 문제나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한 정책적 제안이나 견해를 밝혀보는 것도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혹시 그것이 계급의식을 강화하자든가,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길 바랍니다. 실천적 수단이란 것은 그런 구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혹시 이런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가지고 강신준 교수님에 대한 비판의 글이든 논평이든 제시했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을까요? 현장에서는 바로 그런 다양한 실천방안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이런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둘러싼 의견이 다양하게 제시되는 것, 그것이 맑스를 둘러싼 논의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일 것이고, 박찬식 박사가 얘기했던 바로 그 의식적 실천을 올바로 “실천”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참고로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한 강신준 교수님의 정책적 의견은 맑스의 변증법적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 이미 경향신문 칼럼에 제시한 바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경향신문의 연재에도 여러 곳에서 제시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강신준 교수님께서는 경향신문에 주 1회 「오늘 ‘자본’을 열다」라는 제하의 칼럼을 연재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일까요? 신문에 쓰는 글은 학문적인 엄격성과는 거리가 먼 글입니다. 대중적이고 매우 축약된 메시지만 전달하는 글이지요. 그래서 이런 글에 대해서는 “나는 거기에 찬성, 혹은 반대한다”라는 정도로 간단한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지, 마치 그것이 무슨 대단한 논문인 것처럼 분석하는 것은 조금 우스꽝스럽습니다. 축약된 문장 안에는 행간의 복잡한 논리적 연관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으니까요. 맑스의 얘기는 소위 본질과 현상의 이중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극히 단순해 보이는 명제조차도 상당히 복잡한 여러 단계의 추상화를 거쳐서 만들어진 것들이라서 대중들에게 결과만 전달할 경우에는 중간과정의 상당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문의 글을 논문처럼 분석하면 당연히 박찬식 박사님이 이미 범하고 있듯이 글을 쓴 사람의 견해를 곡해하기 일쑤입니다. 정말 유물론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그것을 반박하고 싶다면 강신준 교수님께서 쓰신 책이나 논문을 근거로 얘기하는 것이 “박사”라는 직업적 범주에 걸맞는 일이 아닐까요? 강신준 교수님께서는 이미 맑스의 <자본>을 해설하는 책을 여러 권 집필하였고 그런 입장에서 세부적인 주제를 다룬 논문들을 학회지나 잡지 등에 공개적으로 출판해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문에 고작 몇 줄 써 놓은 대중적인 글이 아니라 정작 제대로 된 비판의 소재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강신준 교수님께 대해 비판이라고 갖가지 얘기를 하고 있는 다른 분들께도 모두 적용되는 얘기입니다. 비판이 아니라 자의적인 단정에다 아예 인간적인 예의를 벗어난 험한 얘기들을(입에 올리기 조차 내키지 않군요) 인터넷상에 퍼뜨리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면 그 분들이 맑스를 입에 올리고 있다는 일조차 부끄러워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물론 건전하고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춘 비판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항상 맑스의 유산을 우리 사회에 옮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양한 의견과 해석은 맑스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고 우리 운동의 진영을 보다 넓히는 것이 될 것이니까요. 최근 2008년 공황 이후 맑스 관련 서적과 논문들이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맑스에 대한 논의나 연구자산이 얼마나 빈약한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최근 위축될 대로 위축된 우리 노동운동 진영에서 맑스의 유산에 대한 반성적인 얘기가 전혀 없는 것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깊은 회한에 잠겨 있습니다. 저의 충고가 잘 전달되고 박찬식 박사가 보다 분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마음깊이 빌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