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남한 진보정당 활동의 교훈

[최형록 에세이]
남한 진보정당 활동의 교훈

최형록(정치평론가, 전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1. 머리말 - 논의의 범위
  
남한 민중은 1961년 5·16 군부 쿠테타 이래 거의 1세대 동안의 군부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김영삼의 문민정부시대에 들어섰다. 각종 언론에서는 ‘새로운’ 시대와 ‘변신’을 이야기 한다. 최근에는 전위적 노동운동조직이었던 「서노련」의 지도위원 이었고 「민중당」의 핵심직책인 노동위원장을 역임한 김문수씨가 민자당의 지구당위원장으로 ‘변신’했다.

그는 “노사관계는 제로섬(Zero Sum)의 원리가 아니라 Positive 원리에 입각해야한다”(「주간조선」, ‘93년 3월 24일자)고 강조한다. 변혁운동가들은 노사관계를 Zero Sum 게임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김문수씨와 같은 사람들의 영악(獰惡)한 논리, Positive 원리란 힘 있는 집권여당에 들어가 세력을 형성해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더 이상 재야세력의 역할이 필요 없는 것일까? 보수여당과 보수야당의 정책경쟁으로 노사문제, 통일문제, 환경문제, 여성문제, 교육문제 등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새로운 상황 속에서 재야세력은 불가피하게 분화되고 있으며 변혁세력의 역할은 새롭게 규정될 수 있으며 앞서 열거한 제반문제들을 개혁하기 위해서라도 변혁세력의 활동은 불가결하다. 변혁세력은 합법공간에 진출해야하며 자신의 고유한 정당을 결성하여 조직의 기반을 넓혀야 한다. 현재 변혁세력 내에서는 ‘변혁적 진보정당’론과 ‘대중적 진보정당’론이 제기되고 있다. 변혁운동의 강화, 대중적 기반의 구축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원리에 입각해서 어떻게 민중세력의 정당을 결성할 것인가?

본고에서는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지향했던 진보당과 민중당의 정당결성과정, 정강정책, 활동내용을 평가하면서 향후 민중세력의 정당건설의 원리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민중당이 진보당보다 민중세력의 정당으로서 일보전진이었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당을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함으로써 민중당의 핵심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따라서 본고는 진보당에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고자 한다.


2. 진보당과 민중당

(1) 기본관점

데모크리토스 이전에 고대인들은 물질이 흙, 불, 공기, 물 등의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물질은 ‘아톰(Atom: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 - 원자)’으로 구성되었다는 원자론을 제시했다. 그의 원자론은 19세기에 이르러 돌턴의 원자론으로, 나아가 러더포드의 원자모형론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아톰’은 결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처럼 사회현상과 역사적 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계급투쟁’과 ‘잉여가치’의 착취·피착취 관계에서 출발할 수 있다. 계급은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생산수단의 소유와 비 소유에 따라서 객관적으로 결정되며 그 관계에 따라서 생산에서 수행하는 역할, 생산된 사회적 부 가운데서 치지하는 몫 역시 결정된다.

본고에서는 양당의 결성과정, 정강정책, 활동내용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민중해방의 진퇴라는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2) 진보당

우선 진보당의 결성과정과 활동내용을 검토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맹주로 하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질서 내 대소(對蘇) 전진기지로 자리매김 당하면서 냉정의 초병(肖兵)이었다. 둘째, 귀속재산이 반(反)민중적인 방식으로, 친일 잔존세력에게 특혜 불하되었으며 토지개혁은 형식에 그쳤다.

이런 국내외 조건 속에서 이승만 독재가 행해지는 가운데 조봉암은 족청계와 혁신계가 합세한 정당을 결성해서 이승만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원내 족청계가 혁신계 가운데서 죽산계를 제외하려 함으로써 실패했다. 죽산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6월 가칭 ‘자유당’의 결성을 추진했다. 이 두 번째 시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951년 10월 부산에서 전국농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는데 340여명의 대표가 참여하여 상설회의로서 ‘농민회의’를 발족시켰다는 사실이다. ‘자유당’ 결성시도는 ‘대남 간첩단’ 사건으로 실패했으나 ‘농민회의’의 발족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죽산은 1952년 2대 대선에 출마했는데 80만표를 득표했다. 당시 이승만, 이시영은 각각 520만 표, 76만 표를 득표했는데 당시 이시영의 running mate였던 조병옥은 “…조봉암씨에게 자리를 맡길 바에는 차라리 김일성과 타협했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2대 대선이 불법타락 선거였음은 투개표과정에 참관인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한국전쟁 후 죽산의 노선을 우리는 「우리의 당면과업 : 대(對)공산당 투쟁의 승리를 위하여」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당면과업을 민주진영의 총 단결로 규정하면서 ‘민중에의 영합’을 강조하면서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런 반면에 민주진영의 총집결체 결성과정에 영도자이신 이대통령이 선수에 서서 솔선수범하시는 것이 비교적 실현성이 많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발언을 했다.

1956년 5월의 3대 대선에 즈음해서는 ‘조직논쟁’이 있었다. 장건상이 ‘100% 이념집결체론’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죽산은 ‘용광로론’을 주장했다. 그의 ‘용광로론’은 「우리의 당면과업」에서 강조했던 민주진영 총 단결론에 입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세력이 거의 절멸(絶滅)된 상태 중 당시의 제반사정을 고려해 볼 때 장건상의 주장보다는 죽산의 주장이 현실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죽산세력은 신익희-장면의 ‘무조건후보사퇴론’에 대해서 극우세력의 입각배제를 전제로 진보당 후보사퇴를 밀약했다.

그러나 신익희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죽산은 대선에 나섰다. 이때 김준연은 “조봉암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투표하라”고 반(反)죽산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선거결과 504만 표를 득표한 이승만에 대해서 죽산은 216만 표(총득표율의 33%)를 득표했다. 이런 선전(善戰)에 대해서 죽산계에서는 자유당의 투-개표 권을 독점하지 않았더라면 죽산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죽산은 어떤 노선의 소유자였던가? 우리는 그의 노선을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대회에서 채택된 「진보당선언문」과 「진보당의 강령·정책」에서 알 수 있다.

진보당의 목표와 계급적 성격은 「진보당의 강령·정책」의 강령 중 ‘(8)당의 성격과 임무’에서 분명하다.
“우리 당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인텔리, 중소상공업자, 양심적 종교인 등의 광범한 근로대중의 정치적 집결체이며…우리 당은 모든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과 사람다운 생활을 보장하여 줄 가장 진보적인 진정한 사회적 복지국가를 이 나라에 건설하는 것을 그의 역사적 임무로 삼고 있으며…우리는 이 변혁을 폭력적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주적 평화적 방식에 의하여(의회에서 절대다수를 점함으로써) 수행하려고 한다.”

이런 ‘기본적 역사적 사업’ 설정의 토대로서 진보당의 국내외 정세판단이 강령의 전문 다음에 차례로 전개된다. ‘현존 사회주의’와 ‘현존 자본주의’에 대한 진보당의 입장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자유자본주의)’도 다 같이 부정하는 입장, 이른바 ‘제3의 길’이나 진보당은 혁명 후 러시아에서 발전을 계속한 폭력적·독재주의적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을 거부하면서 이른바 수정자본주의를 지지한다. 즉 스웨덴 등 북구 여러 나라의 사회보장제도, 영국의 자유자본주의의 지양과 자유자본주의적 야경국가의 사회주의적 복지국가에로의 민주주의적 평화적 진화를 지지한다.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변화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 필자가 1991년 5월 스웨덴에서 당시 남한의 노동운동과 국가권력의 탄압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LO(집권사민당의 정치기반인 전국적 노조조직)의 대외협력국장은 “남한의 현 상황은  1930년대 초까지 스웨덴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아담 스미드적) 야경국가에서 (케인즈적) 복지국가로의 이행은 결코 평화적인 것이 아니라 ‘폭력적(국가권력과 노동운동 세력 사이의 충돌의 결과)’인 것이었음을, 요컨대 ‘계급투쟁의 성과’였음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강령은 (4)에서 후진국가의 새로운 방향을 언급하면서 1955년 반둥회의(제3세계 국가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비동맹노선을 천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남한 사회에 대한 제국주의적 규정성에 대한 인식의 이러한 결여는 미국을 ‘우리의 위대한 맹방’이라고 규정한 근거나, 이런 세계관은 「내가 본 내외정국」에서도 분명하다. 죽산은 덜레스 국무장관에 무조건 공평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반공자유진영의 강화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사명’이라는 측면에서 재평가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유진영의 ‘람보’ 미국의 대외정책에 입각했기 때문에 한일국교를 재기(再起)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재진출이라는 각도가 아니라 자유진영의 결속과 행동통일이라는 각도에서 보았던 것이다.

주목할 만한 다른 한 가지는 민중당의 강령 중 첫 부분인 “오늘의 세계와 한국사회”에서 언급한 과학기술혁명(STR)과 자본의 소유구조와 임노동의 내부구조의 현저한 변화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진보당 역시 나름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5)제2의 산업혁명과 20세기적 사회혁명에서는 노동의 기계화와 자동화(Automation)에 기인하는 노동력 수요의 감퇴, 대중적 실업 문제는 진보적인 대규모 사회보장제도의 실시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상황판단과 함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가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뒤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진보당의 강령·정책」의 제2부는 정책부문인데 9개 부문에 걸쳐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맨 먼저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 정권의 무력통일론이 불가하다고 반대하면서 UN을 통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조국통일론을 주장한다.

2)외교·국방정책에서는 대한민국 국방의 거의 전부를 한국군이 담당함으로써 빈약한 우리 국민경제와 국가재정의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불합리를 지적하고 있다. 3)정치형태에서는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면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강조한다. 4)행정정책에서는 경찰의 엄정중립, 서울특별시장과 지사의 공선제(公選制)확립을 주장한다.

5)경제정책에서는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한 분배에 의해 사회적 정의를 옳게 실천할 것을 목표로 교통, 체신, 운수, 은행 등 주요한 제 산업부문과 거대한 제 기업체의 국유화, 중소산업의 보호육성, 농업문제와 관련해서 경자유전(耕者有田:경작자가 땅을 소유한다)의 원칙하에 농업생산력 증강, 농촌고리채에 대한 이자의 법정한도 내 계산, 소작금지, 국가에 의한 농업보험제, 산업정책으로서 생산조합의 조직을 장려, 무역의 국가 관리를 제시한다. 7)재정정책에서는 2)에서 지적한 것과 관련해서 국방·치안 등 비생산적인 재정지출을 국가 총예산의 3할 이내로 줄일 것, 시중은행을 제외한 모든 금융기관의 국가 관리화 등을 제시한다.

주목할 만한 것이 8)사회정책이다. 여기에서는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의 보장을 강조하면서 노동자의 경영참가와 이익균점의 실현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건국헌법 제18조 2항에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까지 법률로 제정되지 않았던 것이고 1962년 12월 26일 쿠테타 세력에 의한 제3공화국 헌법에서는 아예 삭제되어 오늘날까지 부활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회보장제도로서는 국민의료제도 확립, 국민연금제 확립, 제대군인의 직업보장, 주택청 신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9)문교정책에서는 점진적 국가보장제와 일반 행정기구로부터 분리·독립된 교육원 신설을 제시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진보당의 결성과정과 활동내용 그리고 정강정책을 검토해 보았다. 국제적으로는 소련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 정책으로 냉전의 해빙기운이 돌던 시기, 1957년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국시위반으로 옭아맸다. ‘진보당사건’의 1심 재판부 배석판사 이병용이 ‘정치적 날조극’이라고 평가한 ‘매카시즘적 마녀 재판’으로 죽산은 정치적 교수형에 처해졌고 진보당 역시 사멸하고 말았다.


(3) 민중당

진보당이 교수형 당한 지 꼭 35년 후 민중당이 출범하였다. 민중당의 결성과정과 활동내용을 검토할 때에도 국내외 정세를 고려해야 한다. 진보당이 결성될 시기와 비교해서 국제정세의 세계자본주의체제는 달라졌다. 35년이 경과하는 동안 한국전쟁의 침략국 중공과 미국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이룩하였고, 소련은 경제·정치적 침체상황을 타개하고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데모크라치아(민주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비 마르크스주의적인 ‘전 인류의 가치 우선론’에 입각한 데탕트 정책을 추구했다.

남한은 5·16 군부 쿠테타 이래 미·일의 독점자본의 제국주의적 착취를 전제로 한 고도성장과 주기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는 동안 세계 자본주의 내 미국의 패권(Hegemony)은 전쟁의 참화에서 재기한 일본, 서독의 경쟁에 직면했다. 남한 사회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가 됨으로써 ‘노-자간의 모순’의 해결이 역사적 실천과제가 되었다.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의 적자(嫡子), 남한 노동자계급은 수적으로 증가함은 물론 더 이상 짐승과 같은 정치적·경제적 노예상태를 거부하여 1987년 초여름에서 초가을에 걸쳐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Identity)을 찾아나서 군부파쇼에 항거했다. 이런 노동자계급의 각성과 단결은 남한 자본가계급에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켜 3당 합당이라는 ‘보수대연합’의 제1보를 내디뎠다. 동시에 노동자계급은 어용노조인 노총을 대체하고자 ‘전노협’을 결성하였다.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전민련’내에서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지향하는 세력이 전민련을 탈퇴, 보수야당과 구별되는 독자적 민중정당의 창당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창당의 준비 기구였던 ‘민연추’는 몇 달 못 되어 기회주의적인 보수야당 의존세력이 탈퇴함으로써 해체되었다. 민중당은 이런 어려움만이 아니라 당시 민중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인 전민련과의 불화, 노조의 정치활동의 금지라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민중의 바다로 진수(進水)했다.

민중당의 강령 자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의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일별한다면 강령은 크게 1.머리말, 2.민중당 창당 선언문, 3.민중당 창당의 과정, 4.민중당 강령-오늘의 세계와 한국사회, 우리는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가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의 세계부분은 1)세계사적 전환기의 시작, 2)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으로부터 분단고정화, 3)우리사회의 민중은 누구인가? 4)가혹한 착취, 억압, 좌절을 극복하려는 끈질긴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가는 1)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정부수립을 위하여, 2)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3)자주, 평화, 호혜평등의 국제질서를 위하여, 4)평화통일을 위하여, 5)민중주도의 개방적·자립적 경제구조의 건설을 위하여 6)해방을 지향하는  노동세계의 질적 발전을 위하여, 7)농업·농민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하여, 8)남성과 여성의 평등과 연대를 위하여, 9)사회복지의 실현을 위하여, 10)민중문화의 창조를 위하여, 11)인간해방을 위한 교육 12)자연과 인간의 공생으로서 환경보전을 위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민중당의 강령은 창당일정에 쫓기어 보다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거치지는 못했으나 교수위원회와 정책국의 수차에 걸친 토론, 당시 관심 높았던 ‘사회구성체론’의 성과와 관련된 토론의 성과물인 가안(假侒)과 진노추의 토론성과를 토대로 정강분과위원회의 토론을 거친 후 상임위원회의 검토를 거친 ‘강령시안’을 각급 당 조직의 당원들에게 회람하여 의견을 수렴한 성과물이었다.

강령은 수미일관성의 부족, 강령적 수준과 정책적 수준의 혼재 등 결함을 지녔으나 한국사회의 변혁을 둘러싼 당내 ‘한국사회 성격논쟁’의 이론수준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강령으로 나타나는 민중당의 성격·노선과 관련해서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우리 사회의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당의 계급적 기반으로서 민중에 “독재정권과 독점재벌, 외세의 지배 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민족구성원들”에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학생, 도시서민, 중간계층, 지식인”만 포함시킬 것인가 아니면 ‘중소상공인’도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된 문제로서 민중민주주의냐 ‘민중주체 민주주의’냐의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결국 ‘중소상공인’을 민중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두 번째 문제는 ‘민중주체 민주주의’로 결정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민중당의 노선이 ‘민중주의(Populism)'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민중당의 ’민중주의‘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당내 주류의 이러한 성향은 당내 좌파의 비판에 직면했다. 좌파에서 볼 때 주류의 입장은 합법주의적 개량주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합법주의적 개량주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처럼 노조의 강력한 견제를 받기 어려웠다. 노동조합법 제12조가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고 정당법,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정당법 시행령 제1조, 국회의원 선거법등이 법의 이름으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의 강력한 지지를 받지 못할 때 정당의 활동자금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기껏 한다는 것이 대중가수의 공연을 통한 모금 같은 방식이었던 것이다. 노조의 지지를 받기 어렵고 따라서 모든 지구당이 재정궁핍 상태인 상황에서 어떻게 활발한 지구당 활동을 벌이며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민중당의 지구당 가운데 ’중앙 지구당‘(중앙당에서 재정지원을 받아야만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지구당)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둘, 셋 정도에 불과했다.

필자가 탈당을 마지막으로 참가한 중앙위 대의원대회에서는 당무감식에 따른 지구당의 실태보고서가 조직위원회에서 제출되었는데 보고가 끝난 후 모든 보고서를 회수, 대외비로 하였던 것이다. 민중당은 정당법 제38조(제1항 제3조 :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 총수의 100분의 2 이상을 득표 하지 못한 때에는 등록이 취소된다)에 의거, 정당으로서의 비운(悲運)을 맞게 되는 서곡은 당대표, 정책위원장, 사무총장 3인이 당시의 노태우 대통령을 면담할 때 이미 울렸던 것이다.


3. 맺음말

오늘날 우리 남한사회에서 인구의 다수인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그 자신의 고유한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원리는 무엇일까? 우선 상황의 ‘새로움’, 상황의 변화를 생각할 때 ‘새로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현존 사회주의’의 거대한 일부였던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 러시아는 밝은 자본주의의 미래가 보장된 것일까?

러시아 ‘사유화 프로그램’의 초석인 정부발행 전표(Voucher)를 투기함으로써 투기꾼들은 10배 이상의 폭리를 취하고 있다. 러시아인들 말대로 “공기로부터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인가? 마피아와 같은 폭력조직의 발호, 매춘, 마약복용자의 증가 그리고 탱크 위에서 민주주의 사수를 외치던 옐친에 의한 국회의사당에의 탱크공격….

그러면 ‘현존 자본주의’의 모범생인 스웨덴, 독일은 어떠한가? 독일의 경우 콜 수상은 “만일 독일의 미래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나라를 거대한 유원지(현재의 복지국가)처럼 만들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독일정부는 1992년 GDP(국내총생산)의 33.1%인 6,330억$를 사회복지비에 지출했으나 금년에는 실업수당, 아동복지수당, 수입수당, 사회복지비를 삭감함으로써 260억$를 절감할 계획이라고 한다(『Time』, 93년 11월 1일자).

노동계급의 운동이 쇠퇴할 때 자본가계급은 공세를 취한다. 이런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 실업증대, 고용불안이 통일독일만의 문제가 아님은 긴 논의를 요하지 않는다.

요컨대 현재 남한사회에서 스웨덴식이건 어떤 식이건 간에 사회 민주주의적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자들이 과연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입각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적으로 이런 일들이 의연한 신태(新態), ‘새로움’이라면 남한에서 ‘새로움’은 무엇인가?

1987년 이래 성장한 노동자계급의 민중운동은 남한 자본가계급과 미·일 독점자본세력으로 하여금 ‘보수대연합’을 추진하게 하였다. 3당 합당이 그 제1보였다면 현재 민자당이 ‘재야세력’의 일부를 흡수하고 있는 것은 그 제2보의 일부랄 수 있다. ‘보수대연합’과 관련된 것이 남한 자본의 ‘축적의 합리화’, 절대적 잉여가치의 착취에의 의존방식에서 절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부문의 해외이전(투자)과 ‘상대적 잉여가치착취’ 방식의 확대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는 공장자동화(FA: Factory Automation), 사무자동화(OA: Office Automation)를 통해서 추진되고 있고 이에 따라 실업증가, 고용불안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한자본의 축적방식의 변화, 기술경쟁력의 재고와 직결되는 것이 ‘수능시험제’의 도입이다. 이제부터는 군대식 상명하복(上命下服)에 적합한 임금노예들이 아니라 나름으로 아이디어를 안출할 수 있는 똑똑한 임금노예들, 자본주의적 합리화에 적합한 임금노예들이 ‘경제전쟁의 사령관들’에게 공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한자본의 축적방식의 변화는 지배계급의 좌우명인 ‘반공분단’ 논리에서 ‘반공통일’ 논리로 전환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미수출의 곤란, 아세안(ASEAN)국가들의 경쟁력 등에 직면한 남한 자본가계급으로서는 북한을 호시탐탐 노리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현재 남한의 지배계급 내 합리적인 놈들은 동서독의 급격한 통일에서 초래될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식의 통일에 대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과 같은 상황이 ‘새로움’의 내용의 본질이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민중정당은 민중의 정치세력화의 중요한 한 가지 형태다. 변혁세력에게 민중의 정치세력화란 ‘민중을 위하여’를 넘어서 ‘민중의, 민중에 의한’ 정치의 소유권 탈환(expropriation) 바로 그것이며 정치와 경제의 분절(分絶), 분단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명심하면서 망각하지 말아야 할 다른 한 가지는 변혁운동의 변증법적 모순, 대다수 민중의 일상투쟁과 기존질서 전체를 넘어서는 혁명적 전복의 통일이라는 모순이다. 우리는 이런 모순된 과정으로서의 변혁운동을 염두에 두면서 대중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궁극목표를 저버리지 않는 투쟁정신 속에서 민중의 정당을 결성해 나가야 한다.

변혁운동에는 ‘용기와 끈질김’이 절대불가결한 자세임을 재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상을 결코 망각하지 말자.

“수정주의자들의 바로 이런 정책의 성격 때문에 다소 ‘새로운’ 문제라면 모든 것이. 혹은 다소 예기치 못했던 사태의 변화라면 모든 것이, 설사 그것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그치지만  발전의 기본노선에 사소한 변화를 주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항상 이런 저런 종류의 수정주의를 발생시킬 것이다.”

진보당과 민중당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과학기술혁명에 대한 강조와 그에 따른 계급변동에 대한 강조이다. 민중당의 경우에 구조의 변화에 따른 신 중간층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여러 민주단체에서 조사한 노동자의 의식구조의 결과와 다른 점에 유의해야 한다.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한국인권뉴스 201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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