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책 『인간론』은 내가 생각해온 유토피아가 그려져 있는 책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유토피아가 그대로 현실화 될 가능성은 매우 적은 것 같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성적(性的)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청소년의 성(性)에도 관대하고, 권력다툼과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그런 세상 말이다.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지배층이 있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세상이다. 아니, 그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역사에 따르면 항상 또 새로운 권력이 나타났고, 역사는 순환되어왔다. 따라서 이 책에 그려진 사상이 완벽히 실현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이 아예 없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나의 『인간론』에서 그려진 이상적인 사회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조짐들을 찾아본다.
첫 번째로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추세이다. 현대 미술을 보면, 점점 이해하기 힘든 미술도 미술로 인정하고 있고, 다양성이 추구되어 가고 있다고 보인다. 뒤샹의 <샘> 같은 것이 대표적 예이다. 뒤샹이 전시회에 변기통에 자기 싸인을 해놓은 것을 출품하려 했지만 당시에 미술로 인정을 하지 않아 출품을 못하게 했다. 하지만 곧 인정을 해주었고 지금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미술이 되었다.
이렇게 미술이라는 분야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으로 다문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다문화 정책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하나의 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적(性的) 죄의식은 점점 약화되는 추세이다. 먼저, 혼전순결에 대한 강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결혼 전에 섹스를 해봐야 속궁합이 맞는지 알 수 있다. 결혼하고난 후 안 맞는다고 이혼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 외에도 아주 많다. 이것이 일반 여론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인터넷 상에서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 여론까지는 아니어도 꽤 무게있는 의견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요즘에는 성적(性的)으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클럽이나 나이트는 사랑을 찾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성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가는 곳이다. 클럽이나 나이트에서의 원나잇스탠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은 통계가 없어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에 대한 죄의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런 자유로운 성경험을 친한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만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문란하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가 될 즈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사고를 갖게 되어 성적(性的) 자유도 더욱 크게 누릴 것이고, 성적 죄의식도 줄어들어 성(性)에 대해 더욱 솔직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청소년의 성(性)에 대해서도 아주 조금씩 관대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전에는 무조건 ‘안돼’라고 교육했지만, 요즘은 중학생 때부터 콘돔 사용법을 알려주는 추세이다. 물론 청소년의 성에 관해서는 아직도 매우 엄하고 부정적이긴 하다.
하지만 외국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은 교복을 안 입는 학교가 교복을 입는 학교보다 많고,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교복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요즘 학생들은 교복을 나름의 개성대로 꾸며서 입고 다닌다. 다들 다양한 개성을 표출하고, 청소년들이 자기 나름의 관능적 매력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고, 많은 학생들이 혼자서든 누군가와 함께든 성적(性的) 욕구를 채우고 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연령대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들은 정신적, 경험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전보다 더욱 조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기준으로 바라보면서 ‘니네는 너무 일러.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므로 사회는 이것을 인정하고 포용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매우 느릴 것 같다. 그렇다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희망적으로 본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권력다툼과 전쟁이 없는 세상이 과연 도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유토피아의 도래를 정말 낙관적으로 보고 싶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초등학생의 학급에서도 권력다툼과 전쟁이 있다. 덩치가 큰 아이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자신과 맞먹을 수 있을만한 상대에게는 권력다툼을 청해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한다.
내 책 『인간론』에서 피력한 의견같이, 나는 성악설이 맞다고 믿는다. 착하고 순해서 권력욕이 없는 사람들만 모아놓아도, 그중에서 누군가는 조금씩 군림하고 통솔하려 들다가 권력의 맛에 빠져들 것이다.
따라서 통솔하는 누군가는, 즉 지배하는 누군가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누군가의 힘을 약화시킨다면 (즉, 독재자는 안 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이상적인 세계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인간론』에서 그려진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같아 보인다. 항상 순환해 왔던 역사가 갑자기 방향을 틀기는 힘드니까 말이다. 인간이 정착생활을 버리고 다시 유목생활을 하면 원시시대로 돌아가, 내가 책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다시 찾아올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가 내 책 『인간론』에서 그리는 사회와 같아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몇몇 방면에서는 비슷해질 수 있는 조짐들이 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낙관적으로 보는 희망은 버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간행물윤리위원회나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검열을 증오한다. 그리고 나를 배신한 친했던 동료교수들도 증오한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은 나의 책을 읽고나서 한 짓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사상에 관심을 갖고서 진심으로 나를 이해했다면, 내 책에 19금 딱지를 붙이는 일도, 나를 변태로 몰아 잡아가거나 학교에서 쫓아내려고 모의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이해하고도 그런 짓을 했다면 그들은 꽉 막힌 사람이다. 자기가 옳은 줄만 알고 다양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훗날 역사책에 기록된다면, 예수를 박해하는 집권층이나 바리새인들같이 그려질 것이다. 나는 이상적인 세상, 혹은 나의 이상적인 취향을 내 책 속에 그려 넣었고, 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서 공감하기도 했을 것이며, 혹은 욕하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인간론』에서 설명하는 세계에 가까워진다면, 나는 성문학과 열린 세계관의 개척자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것이다. 나의 책을 읽고 확실히 이해한다면, 이 세상은 이상적인 세상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어떤 시각으로든 나는 한국의 성문학 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인간론』이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와 반대되는) 봉건윤리 문화의 향후 방향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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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권뉴스는 ‘성해방운동’ 실천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