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대상 서적 ]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2007년)
Christopher Hichens, god is not Great
(New York : Twelve, 2007)
Sam Harris, The End OF Faith
(New York : W.W. Norton & Company,2004)
2-2 통합의 관점과 과정신학
도킨스에 대한 비판들 중에는 그에게 신학과 종교철학에 관한 학식이 결여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진화생물학자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그런 한편, 도킨스와 히첸스는 ‘전투적’인 과학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조야한 성경 직역주의와는 다른, 과학과 종교 관계의 복잡 미묘하며 반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나름으로 설득력을 지닌 차원을 놓치고 있다. 이런 뜻에서 ‘과정신학’은 이들의 입론의 위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진화론문제.
근본주의적 성서 직역주의자들은 창조론을 일종의 공리처럼 신성시한다. 이에 반해서 과정신학1)은 창조론의 인간 중심주의를 부정한다. 인류는 생명 공동체의 일부로서 다른 실체들과 생태학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 내재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다.
둘째, 우연과 법칙의 문제.
신(神)을 절대군주처럼 보는 관점에서는 우연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은 신이 결정한다고 본다. 이런 입장과 관련되는 것이 도킨스가 비판하는 호일의 ‘비개연성(Improbability) 논증’이다. 호일은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이 고물야적장을 태풍이 휩쓸어서 운좋게 보잉747을 조립해 낼 확률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지적 설계론자들은 이런 비개연성이야말로 신의 설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도킨스의 책, 174~175).2) 이에 반해서 과정신학의 신은 절대적 결정권을 지니고 세부적으로 그것을 행사하지 않는다. 가능성, 잠재력은 복수이며 실현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인간의 자유문제.
과정신학은 신의 전지전능과 예정설을 부정한다. 신이 세계에서 성취하는 바는 다른 실체들의 대응에 의존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연약하며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생물학적-사회적 구조가 부과하는 제약에 구속당하는 한편, 인간은 신이 역사(役使)하는 것에 책임감을 지니고 참여함으로써 신의 목표를 전진시킨다는 관점이다.
넷째, 악과 고통 문제.
‘사랑’의 신이라면 왜 인간세상은 이렇게 ‘눈물의 계곡’인가라는 지극히 자연스런 의문이다. 히첸스는 왜 세대를 이어 ‘원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느냐며 일종의 ‘원죄의 연좌제’를 강력히 비판한다(그의 책, 209~210).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텔레비전 복음 전도사이자 대통령후보이기도 했던 팻 로버트슨 목사는 2005년 뉴올리언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물에 잠긴 것이 뉴올리언스의 레즈비언 코미디언 탓이라는 헛소리를 한다(도킨스의 책 360). 과정신학은 인간의 세계와 비인간세계의 고통이 죄에 대한 신의 벌이 아니라고 본다. 진화하는 세계에서 투쟁, 죽음 그리고 목표들 사이의 갈등은 보다 큰 가치의 실현에 불가결한 것이다. 신의 권능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특정한 형태의 악과 고통에 신의 책임이 없다고 본다. 민수기에는 신이 모세를 시켜서 집단강간을 수행하도록 하고(도킨스의 책, 369~370) 모세의 10계명 자체에 대를 이어 복수할 것을 명령하기도 한다(히첸스의 책, 98~99). 이런 성경의 거리낌 없는 무자비함과 관련해서 도킨스는 원죄를 저지른 아담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비판한다(그의 책, 382). 과정신학의 신은 벌을 내려 보복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고통의 구제를 위해서 인간과 함께 일한다.
다섯째, 신의 ‘남성성’과 ‘여성성’ 문제.
전통적으로 신은 가부장적 존재로서 권능, 합리성, 독립성 그리고 무감정이라는 덕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여성주의 운동의 영향을 수용하여 과정신학의 신은 ‘여성성’ 즉 양육, 감수성, 상호의존성 그리고 반응성이라는 덕성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여섯째, 종교 간 대화.
도킨스는 성경에 강조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이웃이란 ‘다른 유대인’에 그치는 것임을 비판하고 있다(그의 책, 382, 385). 해리스는 이슬람교의 배타성이 코란에 있음을 지적한다(그의 책, 32).
불신자들과 위선자들과 전쟁을 해서 그들을 엄하게 다루라. 지옥이 그들의 집이 되리라 : 악의 운명. (코란 9:73)
이런 배타적 태도에 반해서 과정신학은 세계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장려한다.
3. 이성, 윤리 그리고 영성의 삼위일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삼위일체’의 문제의식은 인간의 윤리적 근거가 종교인가? 현실의 정치가 반인간적인 상황과 그런 근거는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요컨대 현실 정치의 윤리성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으로부터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있다. 세 전사 모두 종교가 윤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종교는 평민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3)
서양의 이성주의적 전통수립과정에서 중요한 스토아 학파의 현자 세네카의 이 격언이 세 전사가 공유하는 종교관을 정확히 표현해 준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는 한편, 3인3색이다. 히첸스는 프로이트가 밝힌 대로 종교의 기원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바라는 바에 따라 생각하기(Wish-thinking)’임을 수용하면서(그의 책, 247) 종교적 신앙은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뿌리 뽑을 수 없음을 전제한다(12). 그의 극복책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의연했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저주스런 악담을 들으며 파문당하고도 의연했던 스피노자 같은 인물들을 비롯해서 계몽주의의 이성적 비판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다(256~263).
이에 비해서 도킨스는 과학적 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히첸스와 다를 바 없는 한편, 유전자 풀(Pool:유성생식을 통해서 섞이고 또 섞이는 유전자들의 집합)의 유추(analogy)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문화적 유전의 단위인 밈(meme)의 풀을 거론하고 있다(그의 책, 293~302). 주목할 만한 점은 과학적 유물론자인 도킨스가 이상야릇한 -그러나 현대과학의 첨단 분야인- 양자역학을 수용하면서 사실 ‘무아(無我)’의 현실을 - 인간 개개인의 자아뿐만 아니라 실체(substance)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 부지불식간에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단단하고 꽉 차고 치밀한 암석은 사실 ‘텅 빈 공간’(나의 강조)이며 서로 너무 떨어져서 고려할 필요도 없는 작은 입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암석은 그렇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일까? 물리학적으로는 고체 내에서 멀찍하니 떨어져 있는 역장(力場)과 관련된 것이다. 인간은 중간계에서 진화했기에 우리의 생존과 관계있는 고체성과 불(不)투과성 같은 개념들을 구축하는데 유용하게 진화되어 온 결과다.
도킨스는 스티브 그랜드의 비판, 우리는 오직 고체이고 ‘물질적인 사물’(나의 강조)만이 진짜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수용한다(도킨스의 책, 565~570). 양자역학계에서 큰 업적을 남긴 리처드 파인만은 “오늘날 우리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고 1960년대 초에 발언한4) 맥락에서 도킨스의 수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물질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며 ‘순간적’(나의 강조)으로 모여서 당신이 된다”. 어떤 동물에게 ‘진짜로’는 생존을 돕기 위해 뇌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종마다 그렇게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므로 ‘진짜로’들의 골치 아픈 다양성이 있는 것이다(도킨스의 책, 570)
도킨스의 책이름이 ‘신이라는 망상(The God Delusion)’ 그리고 히첸스의 그것이 ‘신은 위대하지 않다’임에 비해서 해리스의 그것은 ‘신앙의 종말’이다.
그의 논의는 히첸스처럼 종교적 신앙을 근절시킬 수 없다거나 도킨스 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종교에 관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학교교육을 시키고 비타협적인 지적 비판과 정치적 행동의 차원을 넘어선다. 나의 기본입장과 가장 친화적인 해리스는 히첸스(그의 책, 81~93)와 도킨스(그의 책, 326~336)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이론을 당연히 인정한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렇다. 어떤 것이 “자연스럽다” 혹은 인간에게 그것이 환경에 적응하는데 어떤 이점을 주어 왔다는 사실이 ‘현재 인간의 행복’(나의 강조)에 기여하는데 필수적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해리스의 책, 185).
요점을 말하자면 사후세계가 아닌 ‘현생의 인간의 행복’을 높이고자 한다면 서구 과학과는 ‘다르지 않으면서 같은 것도 아닌’, ‘영성적 이성’의 길을 걸어야 하며 그것은 ‘명상수행’을 통한 ‘무아의 깨달음’이다(그의 책, 204~227). 해리스의 관점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이슬람세계에 대한 무모한 선제 공격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제외하면 나의 관점과 상통하는 바가 크기에 잠시 후 좀 더 다루겠다.
가. 성경과 코란 : 오래된 엽기적 소설?
… 네 눈앞에 창자가 빠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 …
… 사탄을 숭배하는 쓰레기들아 …
추신. 이 공산주의자 창녀들아 …5)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인 공산당과 협상, 타협한다는 것은 실패의 근본이다. 북한 공산당은 반드시 평화조약 파하고 무력 남침한다. 하느님의 권세역사로 滅共北進統一 되어 북한동포 해방시키고 先知국가 된다!6)
앞의 인터넷 편지와 우편은 각각 <거기에 없던 신>의 작가이자 연출자인 플레밍에게 그리고 <오늘의 자유사상> 편집장이 받은 것이며 마지막 것은 말세복음 부흥단 ․ 새일 중앙교회라는 열성당이 전 국민을 상대로 보낸 광고(狂告)다.
이런 악의를 거리낌 없이 내뱉는 자들이 읽는 성경과 코란은 과연 윤리적인가? 그 ‘오래된 소설’에는 불교에서 3독(毒)이라고 경계하는 것 중 탐욕(貪)과 성냄(瞋)의 일화들이 적지 않다. 구약의 신명기13:12-16에서는‘증오스런 것이 있다면 그것이 속한 마을의 주민들을 살해하고 그 마을과 재물을 몽땅 불태워버리고 영원히 폐허로 남게 만들라’고 명한다. 십자군은 살육한 다음 그 재물은 사실 약탈하지 않았던가?(해리스의 책, 82). 코란의 8장에서는 전쟁의 약탈은 정당하며 불신자들에게 사후에 ‘불의 고통’을 줄 것을 명하고 있다(히첸스의 책, 181) 7)
이 소설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성되었을까? 히첸스는 그것이 ‘역진 공학적으로 만들어진(revers-engineered)’ 것임을 예수의 탄생과 관련해서 비판하고 있다. ‘역진 공학’이라는 용어는 진화론을 심리학의 영역에까지 확장시킨 ‘진화 심리학’에서 선사시대의 인간심리에서 현재의 인간심리를 찾는다는 기획을 수행하는 방식을 가리키게 되었다.8)
진화 심리학의 대표 주자들 중 한 사람인 스티븐 핀커는 이 용어를 써서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것이 “설계된” 목적을 규명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몇 가지 가정을 기초로 해서 그런 목적이 달성되려면 그것이 어떻게 공학적으로 설계되어야만했는지를 연역하는 방법을 가리켰다. 아마 히첸스는 이런 사정을 알고 성경의 조작이 진화 심리학자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누가 복음에 따르면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과세용 인구조사를 명령했을 때 예수의 처녀 탄생이라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이때 헤롯이 유대지방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다는 것이다(이하 히첸스의 책 112~122). 그런데 역사적 사실은 헤롯은 “예수탄생 이전” 4년 전에 죽었으며 그의 통치기 시리아 총독은 퀴리니우스가 아니었다.
그러면 왜 이런 ‘역진 공학’적 구성이 진행되었을까? 예수는 아마 당시 팔레스타인을 떠돌던 많은 정신 착란적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이며 이 인물을 구약의 예언에 일치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런 공작이 수행되었다고 판단한다.
나아가 처녀생식이라는 전적으로 비과학적인 소설 부분은 히브리어 “almah"가 ‘젊은 여자’라는 뜻인데 ‘처녀’라고 오역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해리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소설가들이 히브리어를 잘못 읽었기 때문에 서양문명이 2천년 동안 성적 노이로제를 성스럽게 여겼다고 빈정댄다(해리스의 책, 95). ‘자신의 성생활을 즐기라’는 조항을 새로운 십계명에 포함시킨 도킨스(그의 책, 398~9)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소설가들이야말로 ‘벼락의 피뢰침이 되어야 할 놈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코란은 유태교와 기독교의 여러 가지 신화들을 짜깁기한 것이며 마호멧은 9세 여아와 약혼하는가 하면 식도락가였으며 전투와 학살 후 약탈물의 분배에도 열 올렸다(히첸스의 책, 123~137). (계속)
주(註)
1) I. Barbour, When science meets religion (New York : Harper San Francisco, 2000), P. 174~180.
2) 앞의 책, P. 112.
3) 도킨스의 책, P. 418.
4) B. A. Wallace ed., Buddhism & Science : Breaking New Ground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3), p. 14.
5) 도킨스의 책, p. 319, p. 321.
6) 조선일보, 2007/10/05, A38면
7)“The Spoils”, The Koran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p. 109~178.
8) H. Rose, “Colonizing The Social Science”, H. Rose & S. Rose eds., Alas, Poor Darwin : Arguments Against Evolutionary Psychology (New York : Harmony Books, 2000). B. H. Smith, “Sewing up The Mind”, 같은 책, p. 121.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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