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칼럼] 욕망 금기시하는 부작용, 광신적 신앙과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마광수 칼럼] 대리배설과 표현의 자유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카타르시스는 정화 내지 배설을 뜻한다. 그것은 억압된 감정의 찌꺼기를 대리배설 시켜 줌으로써 정서의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는 것인 바, 일종의 정신 치료 효과가 있다. 그러려면 대리배설은 감질나게 은근슬쩍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찌꺼기가 계속 남아있게 되기 때문이다. 직접배설을 못할 바에야 대리배설만은 확실하고 화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대리배설을 위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양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포르노를 금지시키면 시킬수록 더욱더 음성적으로 활성화되게 마련이다. 인간에게는 잠재된 욕망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금지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잠재된 욕망은 현실에서는 금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들(딸)이 엄마(아빠)를 사랑하는 것이나,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성욕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잠재된 욕망은 금기를 부수기 위해서 존재하고, 모든 예술은 금기를 시원하게 깨주는 데 의의가 있다.

배설 즉 싸는 것이 먹는 것보다 중요하다.  서양은 정신주의적 풍토에서 배설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기피하였으나, 이는 곧 광신적 신앙, 편집광적 금욕주의,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등 갖가지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반면 서양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와 동양의 육체중심적 풍토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일원론적으로 파악하고 육체를 다스려 정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배설은 중요한 문제인데 그렇다면 카타르시스 즉, 억압된 감정 또는 욕구의 대리배설은 어떤 육체적 메커니즘을 통해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서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어차피 육체적인 배설이 아닌 바에야 정신적인 배설로 욕망을 직접 배설시킬 수는 없다. 어떤 이를 죽도록 미워한다고 해서 그를 정말로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억압된 감정이나 욕구는 연극이나 영화, 문학작품을 통해서 대리배설 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극을 볼 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어떤 이는 연민이  더 도덕적인 감정이라 하여 연민을 주된 감정으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생태계의 질서에 더 부합하는 것은 오히려 공포 (또는 공포의 이면(裏面)인 가학) 이다. 즉, 사람들은 도살장에서 죽어가는 소를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 다시 가학적으로 쇠고기를 먹는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꼬집어 ‘거지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위선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적당한 공포심(恐怖心)은 신(腎, 콩팥)의 활동을 촉진시킨다. 신(腎)은 사람의 생식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성욕의 대리배설과도 관계가 있는 장기이다. 그런데 공포심은 연극 등의 전체적 내용보다는 순간의 잔인한 장면을 봄으로써 느끼게 된다. 앙또낭 아르또의 <잔혹 연극 이론>은 그런 이치에서 나왔다. 이렇게 볼 때 카타르시스의 효과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공포심(또는 가학적 사디즘)이 신장의 기능에 작용하여 정서를 안정시키고 성욕을 대리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욕은 식욕에 앞서는 것으로서 (모든 음식물은 성욕의 결과물이 씨앗, 고기 등이기 때문에) 종족보존의 욕구와도 관계가 있고, 그래서 카타르시스 효과는 생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리비도(성욕)의 상징이라고 보았는데, 예술작품을 일종의 창조된 백일몽으로 본다면 (또는 우리가 골라서 꾸는 꿈이라고 본다면) 카타르시스의 실제적 효용은 인간의 본능 중 가장 근원적인 본능인 음(陰)의 욕구 즉 성욕과 가학욕(加虐慾)을 대리적으로 충족시켜 생활전반에 활력을 주어 일반적 소망도 아울러 달성시키는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에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표면적 의식을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한 것이고, 예술작품은 의식 이면에 축적된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여 스트레스를 풀어주어야 한다. 예술작품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근원적인 욕망을 해소시켜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따라서 외설적 예술을 양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민주적 문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인간 의식의 근원적인 욕망은 모든 금지된 것에 반항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윤리는 온통 ‘하지마라’라는 소리뿐이다. 살인하지 마라, 혼전에는 섹스하지 마라, (특히 보수적인 종교에서는) 술, 담배도 하지 마라, 심지어는 원수조차 미워하지 마라에 이른다. 이렇게 인간행동에 온통 제한을 둔 것은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한 것이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의 욕망이 궁극적으로 동물적 욕구의 실현에 있기 때문에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윤리, 도덕은 인간의 본능에는 철저히 위배되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본래 악마적 본성이 내재되어있는 존재이고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러한 금기를 깨뜨리고 싶어한다. 또한 금기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깨지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나 나처럼 순종적이고 겁이 많아 금기를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사람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금기를 깨뜨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기를 깨뜨리기에는 너무나 소심하므로 이때에 외설적 예술이 필요한 것이다.

연극이나 문학 등 예술작품 속에서 불가능이란 없다. 예술적 창작물은 상상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상상에 불가능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는 것, 내가 직접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대신해주는 것, 그것이 예술이 가지는 역할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참된 대리배설이고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외설적 예술의 효용은 인간의 근원적 본능인 성욕과 파괴욕을 표현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원초적 본능은 억압되어서는 안 되고 표출되어야 한다. 우선 동성 간의 사랑이나 둘이 아닌 다수가 하는 사랑 (그룹 섹스) 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꼭 이성에 대해서만 성욕을 느끼라는 원칙은 없고, 둘이서만 성행위를 하라는 원칙도 없다. 현실에서는 동성 간의 사랑이 점차 허용되는 추세이긴 하나, 여전히 자연의 이치에 위배된다거나 에이즈 방지, 종교적 신앙 등을 이유로 금기시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저 여자와, 또는 저 남자와 섹스해보고 싶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다만 현실이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들 점잖은 척 하면서 성욕을 우정으로 가장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관한 것도 중요한 문제다. 성기의 구조상 남성은 주로 사디스트이고 여성은 주로 마조히스트이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여성을 우위에 두는 공처가 같은 남자들은 마조히스트이고 남성을 지배하고 남성을 강간하고자 하는 여자들은 사디스트이다. 물론 형법상 여성이 남성을 강간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지만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여성이 마조히스트라는 데에 여성단체들은 반발하지만, 여성들에게 내재된 ‘강간당하고 싶은 욕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사도마조히즘을 그저 변태쯤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된다. 저번 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여류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주인공은 면도칼로 자해를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공격하는 자로서의 사디스트적인 쾌감과 공격을 받는 자로서의 마조히스트적인 쾌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마조히즘의 좋은 예이다. 사도마조히즘은 다양한 성적 행위의 표현이며 사디즘과 마조히즘도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 또한 음(陰)과 양(陽)의 상보적(相補的) 결합이라는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몸에 난 상처를 일부러 긁곤 하는데, 그것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가족 간의 사랑도 문제다. 물론 가족 간의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형제 간의 우애 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나, 우리의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면 성적(性的)인 사랑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딸인 경우는 아빠와, 아들인 경우는 엄마와 섹스를 하는 것, 혹은 남매간에 섹스를 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이 아닐까. 우리는 전자를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후자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명명한다. 그렇게 이름 지어질 만큼 그것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분명히 실존하고 있다. 그것은 불륜의 변태가 아니다. 다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런 본능이 초자아(超自我)에 의해서 억압되는 것일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열다섯 소년이 아버지를 극도로 증오하고 가출하여 어떤 소녀와 사랑을 하면서 자신의 누나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도서관 관장인 어떤 여인과 사랑을 하면서 자신의 엄마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이다. 엘리네크의 <피아노치는 여자>에서 여주인공은 엄마와 둘이서 같은 침대를 쓰는데, 남편을 정신병원으로 떠나보낸 엄마는 딸을 마치 남편처럼 구속한다. 딸은 마지막에 엄마에게 키스를 퍼붓는 등 모친을 강압적으로 사랑하는데, 동성애적 근친상간 욕구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카타르시스란 억압된 감정이나 욕구, 혹은 근원적인 본능인 성욕이나 파괴욕을 대리배설 시키는 것이다. 대리배설에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대리배설이 필요한 이유는 사회의 윤리, 도덕, 규범이 본능적 욕구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리배설은 모든 금기를 깨뜨릴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인간은 진정한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카타르시스이므로 진정한 표현의 자유 보장이 절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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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권뉴스는 ‘성해방운동’ 실천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사진= 웹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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