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심리학 강좌]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계급무의식의 대립구조 2/2 - 오세철

[레프트119 소개글]
『레프트119 준비위 결성을 위한 모임』(레프트119)은 정파·소속·입장의 차이를 넘어 변혁활동가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문제점을 함께 깊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주체를 건설 중에 있다.
레프트119는 그간 활동가들의 경제적·심리적 요인에 기인한 트라우마 등 질환과 이와 유관한 죽음이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기인한 것이지만, 특히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파시즘의 자장(磁場) 아래 놓인 활동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작용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레프트119는 파시즘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빌헬름 라이히 자료를 통해 이에 대한 해법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레프트119 운영위원 오세철 선생은 좌파진영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회심리학을 공부한 특별한 이력의 사회학자이며 독보적인 빌헬름 라이히 연구가로, 지금도 변혁운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혁명가이다. 다음은 오세철 선생의 글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계급무의식의 대립구조』중 2/2회분이다.



[사회심리학 강좌]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계급무의식의 대립구조

오세철

2. 파시즘에 대한 라이히의 문제의식

1932년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출간된 후 10년만인 1942년 8월, 그는 중보개정 3판의 머리글에서 관념철학 흐름, 즉 인간의 구조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수용을 거부하고 사회적 조건과 변동이 인간의 원천인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켜 그것을 성격구조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그 성격 구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말하면서 파시즘은 그것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던 간에 인민 대중들에 의해 탄생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대중들 개인의 성격 구조에 존재하는 모든 특성과 모순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순수하게 반동적 운동이 아니고 반역적 정서와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9)

그 성경제학 이론의 위험을 1934-37년 사이에 유럽의 파시스트 집단에게 경고한 것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공산당원들이었다. 따라서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행동이 아니라 ‘대중의 비합리적 구조의 표현’이다.
그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의사로서 나는 어떤 정당정치가도 알지 못했을 각국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정당 정치가들은 ‘노동계급’만을 알 뿐이며 그들에게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려 할 뿐이었다. 나는 있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사회적 상황 – 인간 자신이 만들고 자신의 성격의 한 부분으로서 내부에 가지고 있는 상황 – 의 지배 아래 있으며 또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나 수포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하였다.” 10)

그는 소련에서조차도 국가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엄격한 의미에서의 맑스 개념으로 보면 경직된 국가자본주의만이 존재할 뿐이라며 러시아를 혁명 이후의 ‘붉은 파시즘’에 기반한 비합리적 권력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코끼리(성 억압의 6천년)를 여우굴(300년의 자본주의) 속에 강제로 밀어 넣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난 300년간의 사회적 대책은 더 이상 파시즘이라는 대중적 페스트에 대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1931년 독일 사회구성에서 산업 노동자 비중이 60%였지만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분포에서는 경제적 프롤레타리아가 30%, 하층 중간계급이 70%를 차지했는데 그 분포는 1921년 선거의 수치와 비슷했음을 입증한다. 그 선거에서 공산당, 사회민주당이 1,200-1,300만 표, 민족사회당(NSDAP)와 독일국가당은 1,900-2,000만 표를 획득하였다.11)  

근본적 문제는 경제적 상황과 대중들의 심적 구조(이데올로기)의 불일치, 심리구조와 심리구조가 표출된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길이다. 배고픈 사람이 도둑질하고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왜 도둑질하지 않으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대부분이 왜 파업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파시즘은 두 측면에서 노동자 집단에 침투했는데, 룸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직접적인 물질적 매수를 통해, 그리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물질적 매수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수단으로 한 ‘노동자 독재’를 통해서였다. 따라서 노동자가 혁명 의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혁명당 지도부가 올바른가에 달려있다. 파시즘의 권력 장악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사회민주당의 정책이었다는 공산주의자의 주장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비참함과 보수주의적 사고 사이의 모순에 따른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실망은 다른 혁명조직이 없을 경우 틀림없이 파시즘으로 이끌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 당시의 통속적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와 역동성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라이히는 그들이 ‘맑스적’이 될 수 없는 ‘심리학’이라는 이유로 이데올로기를 무시하고 있으며, 역사에 있어서 ‘심적 생활’인 주체적 요인의 취급을 정치적 반동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에게, 그리고 ‘정신’과 ‘영혼’만이 유일하게 역사적 진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2)

이어서 그는 독일 파시즘의 이론적 축으로서의 인종이론을 비판하고 나치의 깃발인 스와스티카의 상징, “우리는 스와스티카의 군대이다 / 독일 노동자를 위해 / 그리고 우리가 밟고 지나갈 자유에로의 길을 위해 / 붉은 깃발을 높이 올리자”에 대한 분석을 한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가족분석에서는 반혁명운동이 하층 중산계급의 경제적 생존 양식과 이데올로기적 신비주의가 결합된 정치적 반동의 근거지로 시작된다고 본다.

신비주의(종교)에 대해 투쟁하는 성 경제학에 대해서는
첫째, 신의 개념, 원죄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심판의 이데올로기(사회에 의해 생산되고 가족 속에서 재생산되는)가 어떻게 개인들 속에 깊이 고착되는가?
둘째, 언제 이러한 종교의 개념들이 인간 속에 깊이 고착되는가?
셋째, 이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에너지가 사용되는가
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련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라이히의 분석은 파시즘에 대한 문제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1919년 소련 공산당 제8차 대회에서 확립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선언한 것은 넌센스라고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레닌의 사회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듯이, 파시즘도 부르주아 계급지배와 관련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파시즘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적’이며 ‘혁명적’이라고 자처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기능을 떠맡았으며, 산업부호들을 지배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떠맡았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이러한 라이히의 성경제학과 실천운동은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도 받았다. 13)

“그렇다면 오로지 배고픔과 성욕만이 역사적 원동력이란 말인가? … 이러한 넌센스는 경제적 기반에 대한 투쟁들로부터 인민을 왜곡시킬 뿐이다.”

“성적 억압에 두 계급이 포함된다는 라이히의 생각은 계급의 적대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의 책 ≪청년의 성 투쟁 ≫에서 세대 사이의 적대감을 강조한 것은 더욱 고약하다. 이는 계급투쟁이 착취와 참상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 모아져야 한다는 것을 져버리고 가족 상황에 눈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편협한 맑스주의에 대한 독해와 실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라이히는 성적 참상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정치적, 경제적 기반의 변동을 통해서만 성해방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종합

맑스와 엥겔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형적 심리사회구조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라이히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 중 하나는 히틀러의 파시즘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탈린의 ‘붉은 파시즘’(이 주제는 연재 3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이었다. 파시즘의 출현이야말로 라이히의 성경제이론의 현대적 검증을 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파시즘은 권위주의적 기계 문명 속에서 억압된 인간의 정서적인 태도이며 기계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생활개념이다. 그것은 반역적 감정과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며 보편적 인간 성격의 비합리적 반응의 총체이다. 그것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행위가 아니라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의 표현이다.

인간의 원시적인 물질적 욕구의 억압은 반역을 유발하는 반면, 성의 억압은 도덕적 방어로 닻을 내리게 하여 무의식적으로 모순, 억압에 대항하는 혁명을 제지하는 반동적 힘을 갖게 한다. 이는 보수주의와 자유에의 공포로 나타난다. 따라서 성의 억압은 정치적 반동으로 이끌고 대중을 피동적이고 반 정치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인간의 성격구조에 제2차적인 힘, 곧 권위주의적 질서를 지지하게 하는 가상적 이해관계를 만들어낸다.

히틀러는 바로 이러한 대중의 혁명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성공했다고 라이히는 말한다. 그는 대중이 가지고 있는 혁명적, 반자본주의적, 공산주의적 열망에 환상적인 만족을 주었으나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대중 심리구조의 모순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경제적 위기가 노동계급의 욕망과 행위를 유발시킬 수 있다면 대중이 혁명을 원하고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평균적 인간의 모순은 세계가 변혁되기를 바라나 그 변혁이 착취와 억압처럼 갑자기 위에서 부여되기를 원하는데 있다.

히틀러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분명하지 않은 자유를 분명히 나타내는 민족적 자유의 환상으로 대체시키고 대중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위로부터 나오고 자신의 체제를 변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종(race)개념은 대중의 일반적인 성적 자아상을 만족시키는 구실이 되었다.

이 말은 원래 순수하고 강하며 독특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독에 걸린 것 같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에 독이 들어갔음을 뜻하는 매독으로부터 ‘순수한 피’를 보호하자는 약속은 중요한 것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성적 공포와 더불어 자본가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유대인에게 돌리게 했다. 유대인은 자본가에 대한 사회주의적 증오뿐만 아니라 성적 불안의 목표이기도 했다.14)

여기서 인종이론과 결부되어 강조되었던 것은 가족이념이었다. 가부장국가는 가부장적 가족제도 속에서 재생산되므로 절대국가와 전체주의는 가족이념을 강조한다. 그 결과 ‘볼셰비키의 문화 혼돈’으로부터 가족과 국가를 보존한다는 함으로써 대중의 혁명적 사고를 파괴하고 파시즘의 폭정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두 가지 효과를 달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말하자면 파시즘의 구조는 형이상학적 사고, 추상적 윤리사상에의 강박관념, 총통의 신성예정설이 대중의 심리구조와 영합함으로써 모든 민족사회주의당(나치당)의 당원이 스스로 ‘작은 히틀러’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파시즘의 승리는 대중의 자유능력 상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대중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능력상실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의 성의 억압에 있다는 것이 바로 라이히가 꿰뚫어 본 것이었다.

파시즘도 대중의 사회주의적 열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계급 타파를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주의가 그 당시 독일 사회에서 실패한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맑스주의는 심리학이 아니기 때문이 인간의 불안과 고통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모순의 구조를 갖는 비 성숙한 대중의 성격구조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곧,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대중이 심리 구조적으로 성숙한 후,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는 책임에 대한 의식이 있을 때까지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성격구조는 자본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자본가도 있고 반동적 노동자도 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맑스의 명제는 두 가지 질문을 남기고 있다.
첫째,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며 인간의 두뇌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과,
둘째, 그렇게 형성된 의식(성격구조)이 어떻게 다시 경제과정에 반응하는가 이다.

라이히는 소련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엄격한 의미의 맑스의 개념으로 보면 소련은 경직된 국가자본주의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사용경제가 아닌 교환경제, 임노동, 잉여생산으로부터 나온다. 그 잉여가 진정한 사회가 아닌 국가에 귀속되거나 개인에 귀속된다면 그것은 모두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소련은 대중이 ‘비합리적’으로 유린되고 권위에 대한 갈망이 존속하는 한 파시즘 구조로 남아있게 된다.

사회주의는 국제적 규모에서만 그 의의가 있다.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 같은 이른바 ‘국가사회주의’는 넌센스이며 대중기만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경제의 흥성도 있었으나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성숙한 성격구조나 이념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프랑스의 도리오와 라발, 러시아의 스탈린, 핀란드의 아네르하임, 헝가리의 호시 같은 민족주의적 독재자를 양산한 것이다.

붉은 파시즘으로서의 스탈린주의는 조직화된 정서적 전염병(emotional plague)이며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파괴한다. 진정한 맑스주의는 ‘사회’라는 말이 ‘국가’로 대체되고 국제적 인류가 민족적 애국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본능이 승화되지 않으면 문명발전이 없다고 했다. 그에 있어서 문명은 인간을 자연에 대립시켜 보호하고 그 상호관계에 적응하게 하는 기관으로 보고 그를 통하여 인간성을 예술적이고 이념적인 보다 높은 심리적 활동으로 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이히는 프로이트나 신프로이트 학파를 넘어서서 사회와 인간의 깊은 구조를 발견하는데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의식의 개념을 따랐으나 거기에 그람시의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 곧 지배계급의 이념이 사회기관에 의해 전수됨으로써 지배이념이 되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심리적 억압을 다루고 있다.15)

그가 보는 역사, 사회, 인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6)

첫째, 객관적 사회과정과 그 과정의 주체적 경험은 분리되어야 하며 각각의 과정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르고 다른 에너지 원천을 가지고 있다.

둘째, 지도자는 항상 대중의지, 곧 평균적 인간 구조의 반영이다. 진보적인 동시에 반동적인 구조를 가진 평균적 인간의 모순과 마찬가지로 지도자의 사고와 행동은 자기 모순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가족 속에서 준비되고 국가구조 속에서 그 효과가 지속된다. 그리고 가족의 문제, 곧 성적 조건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보다 모든 면에서 더 오래됐고 중요하다. 이는 가족의 변화가 세계의 인간 기술 정복의 변화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셋째, 경제와 이념은 단순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경제는 이념을 결정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발달과정에서 서로 모순될 때도 있다.

넷째, 기술적으로 말해 역사의 원동력은 생물학적 에너지, 오르곤 에너지이다. 이는 성적 감정과 행복을 위한 욕망으로 표현되는데 정치, 사회, 경제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다섯째, 공동사회의 생물학적 에너지의 표현이 그 제약을 넘어서면 러시아에서 본 것처럼 퇴행이 불가피하다. 파시즘에서는 대중의 에너지가 정신적, 물질적 참상을 가져올 만큼 퇴행했는데 그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섯째, 독일 사회에서 진보적 과정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와 정치적 반동세력이 대중의 에너지를 그들의 이해에 맞게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파시즘을 구성하였다.

물론 라이히가 파시즘의 비합리성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중정치운동 대신 성정치의 실천을 함으로써 깊은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안이함을 보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론의 공헌은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구조에 대한 깊은 인식, 그것의 억압으로 나타난 대중심리구조의 반역적이고 반동적인 구조, 다시 이와 엇물리는 사회, 경제, 정치구조와 이념의 역동적 체계를 총체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공산주의를 향한 사회변동이 성숙한 인간구조의 전제 없이는 반동적 파시즘과 반혁명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세계혁명의 총체적 전략을 위한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주)
9) 빌헬름 라이히, (오세철 옮김), 「파시즘의 대중심리」, 현상과 인식, 1986, 16-18쪽
10) 윗 책, 27쪽
11) 윗 책, 45-47쪽
12) 윗 책, 45-49쪽
13) 아래 보기를 드는 비판 내용에 대한 자세한 부분은 라이히의 책「People in Trouble」(New York: Farrar, Strauss & Giroux, 1976) 180-184쪽을 볼 것
14) W. Reich, 「People in Trouble」, 167쪽
15) P.Brown, “Civilazation and its dispossessed : Wilhelm Reich’s Correlation of Sexual and Political Repression,” P.Brown(엮음), 「Radical Psychology」,(New York : Harper, 1973) 244-256쪽
16) W. Reich, 「People in Trouble」, 170-172쪽



[책소개] 오세철 지음『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빛나는 전망 2012)

"부분의 합은 총체성이 아니다"

문제는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여성문제, 생태문제를 공산주의 혁명과 동렬에 놓고, 적색ㆍ녹색ㆍ보라라는 세 가지 운동의 결합으로 말하려는 그릇된 혁명인식을 비판하는 데 있다.
여성해방의 문제가 공산주의 혁명에서 중요한 영역임에는 분명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투쟁해야 할 영역이기는 하지만 부르주아 여성해방과 구분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 주체로서 여성 노동계급의 해방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생태의 문제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적대적이었던 인간과 생태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생태 공산사회의 건설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부분의 합은 총체성이 아니며 부문에서의 투쟁과 혁명의 합이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다.

- 1부 '나의 삶' 중에서 -



[글쓴이 소개] 오세철은?
1943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노스웨스턴(Northwestern) 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직행동, 사회심리학, 사회학 분야의 공부를 하고, 1975년에 조직행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 연세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사회심리학’, ‘한국사회변동과 조직’ 등의 강의를 맡고 있다. 민중회의, 민중정치연합, 정치연대, 노동자의힘(준) 대표,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운영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사회실천연구소, 레프트119에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문화사회학방법론」(1984), 「파시즘의 대중심리」(1987), 「조직사회학」(1981), 「자본주의의 쇠퇴」(2009, 「소련은 무엇이었나」(2009)가 있고, 저서로는「맑스주의, 조직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한국사회변혁」(1993), 「21세기 자본주의와 한국사회변혁」(2001), 「사회주의와 노동자정치」(2004), 「다시, 혁명을 말한다」(2009),「좌익공산주의」(편저, 2008),「술,학문,예술,혁명의 사중주」(2012),「비판적 교양인을 위한 오세철 강의」(2012) 등이 있다.



『레프트119 준비위 결성을 위한 모임』(레프트119)
http://cafe.daum.net/left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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