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知法之義 而正法之數者 雖博臨事必難”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법조문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은 비록 널리 안다하더라도 소송에 임하게 되면 반드시 혼란에 빠질 뿐이다.
이승만 시대의 사사오입(邪詐汚入)개헌, 박정희 유신시대의 사법파동 등 남한 법치(法恥)의 역사에서 정의의 칼을 든 것은 사회적 통념으로만 인재-사실은 적지 않은 경우 인재(人災)의 중요한 일부-인 법조인들 이라기보다는 ‘유기적 지식인들’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민중’ 세력이었다.
인권운동 사랑방은 법치를 포함하는 민주화운동의 격랑을 10년간 헤쳐 나왔다. 사랑방이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인권하루소식」을 발간해 온 그 지성(至誠)이 인권의 실현에 관심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는 하나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지난 10년간 남한 사회는 민간-군부 파시즘 시대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대로 변천해 왔다. 이런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향후 ‘법의 뜻(정신)’은 무엇일까?
‘부르주아적 야만성’의 표현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있어서 그것은 현행 헌법을 생각할 때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제 10조) 그리고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재산권의 행사에 제한’(제 23조 2항)을 가하며 ‘시장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제 119조 2항)라고 할 수 있다.
경쟁과 능률을 물신(物神)화하는 ‘합리성’의 맥락에서 법치를 접근한다면 위에 거론한 ‘법의 뜻’은 그 반민중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사실상 meritocracy('유능한‘ 사람들의 통치)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실현에는 ‘건전한’ 상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실현 과정에는 ‘앎을 전제로 하는 동의’와 ‘용기’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랑방이 이제까지처럼 ‘사회적 의제’를 확대-심화시키기 바라며 특히 과학-기술과 인권 그리고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인권교육에 더욱 열성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다시 20주년에도 가슴 뿌듯함으로 자기성찰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사랑방 동지들의 건투에 경의를 표한다.
* 본문은 2003년 1월, 필자가 쓴 '인권운동 사랑방 10주년에 부쳐' 제하의 문건으로 제목을 바꿔 올립니다.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