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노동자, 자본가 & 문화적 돌연변이(1) 1/3

최형록(인문학자)

머리말

대도무문(大道無門). 삶의 여정에 있어서 온갖 허영심의 포로가 되고 타인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삶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에게 문이란 없다.

1970년대 초 미-중 국교정상화의 문을 텄던 닉슨은 ‘워터게이트’라는 지옥문을 사임이라는 통행세를 치루고 통과했다. 이제 클린턴은 ‘지퍼게이트(Zipper Gate)’라는 지옥문을 어떤 통행세를 치루면서 통과하게 될까? 은근슬쩍 넘어갈 수도 있는 문에서 검문에 걸리게 된 것은 르윈스키가 털어놓은 로맨스를 닉슨의 경우처럼 녹취당한 것, 그리고 그녀의 드레스에 남아있는 정액의 ‘유전자’ 때문이다. 로마황제에 비할 만큼 엄청난 권좌를 유지하려는 계산적 이성을 압도할만한 성욕의 폭풍우를 불러일으킨 ‘원인 유전자’가 문제일까?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제주도 전토에 휘발유를 뿌리고 거기에 불을 놓아 30만 도민을 한꺼번에 태워 없애야 한다.”315)

이것은 다름 아닌 이승만에 맞서 대선후보로 나서기 전 조병옥이 경무부장 재직 시 일어난 4・3민중항쟁에 대해서, 파시스트적 야만성을 보여준 것인데 박정희 파시스트정권 하에서 경호실장 차지철이 부마사태에 대해서 그랬던 것과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 조병옥의 그런 언행은 ‘세로토닌’316) 이 적게 분비되도록 한 ‘원인 유전자’에서 비롯한 것일까?

1985년 전남대 의대 재학 중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형 선고 후, 20년으로 감형되어 현재 14년째 수감 중인 강용주(36세). 그는 ‘양심의 자유’에 따라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15척 담 안’을 선택했다.317) ‘귀소(歸巢)본능’을 조종하는 ‘원인 유전자’보다 ‘양심의 자유’가 더욱 강한 것일까?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오펜하이머(미국의 원폭제조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였던 핵물리학자)에 대한 하원의 ‘반미행동위원회’의 불공정한 청문회에 대해서 아인시타인은 이렇게 항변했다.

           
           △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내가 다시 젊은이가 되어 생계비를 버는 최선의 방법을 결정한다면, 학자나 교육자가 되느니 차라리 함석장이나 행상인이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자유가 보장되기를 바라면서 스피노자가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직을 거절한 것은… - 헤겔과는 반대로 - 자유를 저당 잡히고 빵을 벌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318)

아인시타인의 이런 언행 역시 ‘천재성(genie)의 유전자’ 덕분일까? 평화시장에서 청춘을 박탈당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라고 자신을 그리고 자신 너머 다른 자신들을 직시하려했던 전태일(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319)

그가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불사른 행위를 물리・화학적 분자운동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언행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 우리는 유전적 요인이나 사회・역사적 환경요인(조건), 가운데 어느 한 요인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양자의 역동적 상호작용 가운데 현실이 형성됨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19세기말 제국과 식민의 시대를 너머 사회혁명을 꿈꾸고 실현하려 했던 것처럼 21세기를 바라보며 그 차이를 구별하되 ‘현존자본주의’와 거의 붕괴된 ‘현존사회주의’에 공통된 ‘소외된 인간관계’ 너머 인간해방을 지향할 때, 인간의 언행을 지금까지보다 넓은 시야에서 이해하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한국의 좌파는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면서 ‘사회구조적・역사적’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생물학적・심리학적’ 관점은 등한시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목적의식적・이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감정적, 무의식적’인 정신 상태는 도외시해오지 않았을까? 그와 동시에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유물론이라는 사고체계에 통합하는 작업을 도외시해온 것은 아닐까?

요컨대 좌파 내 ‘두 문화’320)가 분단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미의 자본가계급과 그 이데올로그들은 현대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그들 나름의 합리적 자본주의 질서내로 통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이미 1929년 대 공황기에 필자가 지적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필자의 관점은 인간의 언행을 ‘신경 세포적’ 수준에서 그리고 ‘사회적-역사적-문화적’ 수준에서, 그리고 양 수준을 통합하는 network의 수준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321)

이런 관점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고에서는 현대자연과학과 기술혁명과 관련해서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결정론 그리고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의 성과를 3회에 걸쳐서 개관할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결정론은 ‘Nature vs Nurture(자연성 대 양육)’ 논쟁과 관련된 것인데 상대적으로 유전자결정론에 대한 부분은 자본가계급의 관점과 관련해서, 환경결정론은 소련의 ‘리셍코주의(Lyssenkisme)’와 관련해서 다룰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첨단작전지도
- 유전자 검사와 인간유전자 지도


가. 유전자검사와 고용 그리고 보험


현재 한국인, 나아가서 지구촌 다수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용의 안정성’확보일 것이다.

산업구조 합리화를 ― 이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지만 ― 위한 정책으로 정리해고가 과연 불가피한가? 근로시간단축이라는 방법은 왜 무시하는 것인가? 연구개발에 투자하지 않고 부동산투기에 혈안이 되고 정치적 비자금 마련을 위해서 탈세를 일삼은 독점적 재벌이 한국전쟁 이래 최대위기의 주범이 아닌가?

그런 한편 직시해야할 것은 ‘고용불안’은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서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이 노동을 착취하는 방식으로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착취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 두 가지가 있다.

자본주의적 세계분업체제322) 속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사회관계가 고도화할수록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비중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과학기술적 성과를 생산과정에 수용함으로써 가능해지고 노동운동이 주체적으로 대응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고용의 안정도’는 달라진다.

                  

예를 들면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에 기계의 도입으로 고용, 생존에 위협을 느낀 노동자들의 ‘기계파괴운동(luddites movement)’ 그리고 구미에서는 1970년대이래, 한국에서는 1987년 이래 공장・사무자동화에 따른 ‘고용불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고용불안’을 위협할 수 있는 새로운 올가미가 마련되고 있다. 그것은 첨단 과학 분야인 분자유전학의 성과를 활용하여 노동자계급을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려는 시도이다.

1997년 10월 16일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은 사실상 고용주가 주도하고 있는 국립조사안전연구소(linstitut national de recherche et de securite)가 채택한 연구계획을 비난했다. 그 계획의 목표는 직업병에 대한 노동자들의 유전학적 체질을 탐지해 내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학적 시도의 저의는 무엇인가? CGT의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인 S. 뒤푸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을) 선별하고 배제하겠다는 이런 계획의 포기를 엄숙히 요구한다.” 왜냐하면 “직업병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323)

즉 노동자 자신의 선천적 체질 때문에 직업병이 일어난 것이라는 과학적(?) 구실로 직업병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지급을 줄이고 나아가 그것이 과연 열악한 작업환경 ― 인체에 유해한 중금속, 유독가스, 분진 등 원진레이온을 상기해보라 ― 으로부터 유발된 병이라는 것을 인정받기가 “훨씬 더 어렵도록 하겠다는 의도”라고 노동총동맹측은 파악하는 것이다.

국립조사안전연구소의 이런 계획에 놀란 국가윤리자문위는 즉각 성명서를 냈다. 즉 의장 J.-P. Changeux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질병들에 대한 체질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규명하려는, 과학적인 엄밀한 연구는 필요하다… (하지만) 알고자하는 태도가 아니라 선별하려는 태도는 윤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윤리위원회가 그런 연구를 승인하는 한편 그렇게 경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사이자 근로감독관인 투랑쉐-에브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연구는 독립적이고 투명성이 있는 곳에서만 추진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문제 관련 의사들 가운데 일부는 고용주와 공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상황의 전개를 보면서도 수동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실례로서 국회의 과학기술정책 선정 평가국에 제출된 환경에 있어서 석면의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자. 기업가들은 “공중보건의 이익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었다.”그런 경향의 논리적 귀결은 lobby이다.

1995년까지 유럽 제1의, 발암물질 석면 수입업체인 생-고뱅사와 에테르니사는 “석면 상임위원회 의원들에게 전해질 정보를 취사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립조사안전 연구소 역시 고소당했다. “이 예방기관은 응당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노-자 동수로 이뤄진 구조로 강력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연기하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또한 국립 질병보험기금 역시 비난당했다. “그 기구는 (필자: 석면관련 공업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위험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았고 따라서 과거 수년이 경과하도록 특별프로그램을 수립하지 않았으며 시급히 공공기관에 위급함을 경고하지 않았다.” 근로감독관 역시 대한민국의 경우처럼 복지부동(la passivite)이었다.

법으로 규정된 분진배출 허용치가 공장에서 잘 준수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할 근로감독관들의 “사회보장부(ministere des affaires sociales)가 1975~1995년 기간의 보고서 수를 조사한 결과 20년 동안 한 건의 보고서도 없었다”324)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전자 검사의 결과가 남용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일까? 유전자 검사와 같은 과제를 노-자 동수로 구성되고 질병보험기금의 자금지원을 받는 기구에 부과하는 안이 제시되었다. 노동자 건강의료협의의 부의장 도미니크 위에는 이렇게 말한다.
“국립조사안전연구소는 그런 과학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것은 국립과학연구소(CNRS)나 국립보건의학연구소(lnserm)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이 두 연구기관의 완전한 독립성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높다. 왜냐하면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으며 가장 민감한 결론들이 종종 공표되기 전에 미묘한 조정(희석화, 왜곡 가능성을 뜻한다-필자)을 겪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활용할 수 있는 가공할 수단으로서 유전자검사는 ‘고용불안’이라는 생존권적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하나의 생존권적 수단인 보험제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국과 같은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 보험회사들, 특히 생명보험회사들과 건강보험회사들은 치열한 시장경쟁과 관련해서 위험부담에 비례하는 보험료의 책정이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과 같은 피보험자들에게는 보험료의 상향조정으로 압박되어 생명보험이나 건강보험에 가입하기가 어렵게 되거나 해약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하버드 의대의 리사 겔러의 『공학과 과학의 윤리』에 따르면 보험회사들이 어떤 증상도 없지만, 유전질환에 걸릴 위험성이 있는 환자들에게 교묘하게 질문지를 보낸다고 한다. 응답자 917명 가운데 455명에 따르면 그들이 유전학적 진단결과를 암시한 이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연구자들의 밀착인터뷰에 따르면 보험회사들은 그와 같은 유전정보를 입수한 경우 비용보전(補塡)을 거부하거나 취소하였고 나아가 입양기관들은 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에게 유전자검사에서 ‘합격’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325) 유전자검사는 ‘고용안정성’과 ‘각종 의료보험’뿐만 아니라 이민자의 생활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쿠르드족이 이미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과 재결합하기를 원하는 경우에 DNA검사를 받도록 했다.326) 독일정부의 공식목표는 DNA검사를 통해서 반박할 수 없는 친자관계가 확인되면 신속히 비자를 발급한다는 것인데, 이민노동자에 대한 통제책의 한가지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주(註)

315)『제주민중항쟁』, 아라리 연구원 편, 소나무, 1988년.

316)『과학과 미래』, 파리, 1998년 3월호. 뇌의 화학물질인 세로토닌의 분비수준이 정상보다 낮으면 충동적・공격적 행동을 하게 되어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 35면.

317)『한겨레』, 1998년 8월 19일.

318)『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 크리스티안 마이어 외, 이온화 역, 푸른역사, 1998년, 428면.

319)『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기념관 건립위 엮음, 돌베개, 1983년, 165면. 신영복 선생은 육탈(肉脫)한 도시의 철골(鐵骨)과 적나(赤裸)가 된 정신의 뼈대를 맞대면하는 일을 시작해야함을 지적한다. 전태일의 시선이 바로 이런 것이다. 『더불어 숲』, 제2권, 중앙M&B 1998, 146면.

320) 영국의 자연과학자 C. P. Snow는 자연과학자들과 인문・사회과학자들(literary intellectuals)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음을 경고하였다. 그렇게 된 원인으로서 지나친 전문성을 들면서 교육개혁을 강조한다. 그는 새로운 교육의 모형으로서 ‘분자생물학’을 거론하였다. 『두 문화』,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 1965년.

321) 프랑스의 신경과학자이자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인 J.-P. Changeux는 이렇게 묻고 있다. “21세기에 어떤 라플라스(필자: 나폴레옹시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뉴턴의 운동방정식에 의거해서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에 걸쳐서 만물의 운동을 역으로 재구성하고 예견할 수 있다고 당대 자연과학의 결정론적 확실성을 호기 있게 확신했다)가 규범적인 선택을, 일상적으로 인류의 행복을 결정하게 될 제반가치를, 정밀하고 그럴듯하며 효과적으로, ‘신경 세포적-사회적-역사적-문화적’인 하나의 방정식으로 정리하기를 열망할 수 있을까?” 『만인을 위한 보편적 윤리?』, J.-P. Changeux편, 파리, 오딜 야콥 출판사, 1997년, 22면. 즉 이런 문제의식은 다수의 다양한 비판적 토론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Varela는 칠레태생으로 피노체트의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는 신경생물학, 이론 생물학과 인식론 분야에 있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접근방식은 F. Varela 역시 공유하고 있다. 『인식의 나무』, F. Varela와 H. Maturana, 최호영역, 자작아카데미, 1995년, 78면 등.

322) 탈식민화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에 세계인구의 가장 부유한 20%는 세계 총소득 가운데 최빈 국민 20%보다 30배 이상 많은 소득을 차지한 것에 비해서 1990년대에는 그 소득격차가 60배로 늘어났다. 또한 1970~1994년 기간에 빈국의 대외채무는 14배로 늘어났고 빈국(South)이 부국(North)에 갚은 채무액은 1980년대 중반 이래 부국으로부터 빈국으로 유입된 투자액보다 대체로 많았다. 「세계화: 새로운 제국주의?」, Jan Aart Scholte, 『사회과학연구소 동창회보』, 헤이그, 1998년, 11면~13면.

323)「직업에 대한 유전학적 선택」, 『과학과 미래』, 파리, 1997년 12월호, 7면.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철학교수로서 ‘사회생물학’에 비판적인 필립 키처 역시 이 문제를 CGT가 우려하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의 『다가올 삶: 유전학 혁명과 인간의 가능성』, 사이먼・슈스터 출판사, 1996년, 142면~149면. CGT는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기반이며, 사회당의 노동기반은 CFDT라는 별개의 노조조직이 있다.

324) 앞의 과학 잡지, 8면.

325)“인간유전학의 동향: 생명의 자료”, 비어들리, 『Scientific American』, 1996년 3월호, 79면.

326)「시사뉴스:DNA검사에 의거한 비자발급」, 『과학과 미래』, 파리, 1998년 4월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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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한국노동운동이론정책연구소(소장 김세균 교수/서울대 정치학과 ) 발간『현장에서 미래를』(1998년 10월호, 제 37호)에 게재된 것임.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수/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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