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왜 부단한 학습을 해야 하는가?

최형록(인문학자)

학교를 졸업하면 공부도 끝나는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은 물론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들 역시 재충전을 해야 한다.

민주 노동운동의 횃불 전태일 열사로부터 배워야할 점은 무엇일까? 인본주의(Humanism)와 학습.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남한 노동자들은 얼마나 열사의 삶의 태도를 온전히 계승하고 있을까? 그가 살아 있다면 노동-민중운동 내 패배주의와 개량주의-정파 간 권력투쟁-이기주의와 소비주의로 말미암아 김진숙 동지가 300일이 넘도록 목숨을 걸고 고공 농성을 해도 한진중공업 투쟁은 어정쩡한 상태에 있으며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이 22명이나 절망 속에 자결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어떻게 할까?


                  


남한 노동자들은 자본에 “실질적 포섭”을 당하고 있다. “실질적 포섭”이란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관-세계관-생활방식을 받아들여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가 그러하기에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받아온 민주 노동당이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자본의 입장에서 대미관계를 형성해온 부르주아 세력의 한 분파이자 공유재산인 사회운동을 사유화해온 유시민  세력과 야합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그 야합을 반대해온 노회찬-심상정-조승수가 진보신당을 헌신짝 버리듯 할 수 있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통합진보당 내 부정선거와 견찰(犬察)이 “간섭전”을 개시하고 있으며 공안세력이 최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재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고용 없는 성장-노인부양 문제-교육기관의 직업 훈련소 전락-1000조에 육박해가는 가계부채라는 시한폭탄 등 누적된 모순, 그리고 동북아 정세의 불안 요인인 북한의 3대 세습과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탈북자들, 19 세기 말에 비해서 21 세기 한반도의 운명에 보다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Super Power로 치달리고 있는 상황, 그리고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5대양 6대주가 지구적 “전자촌”을 이루는 가운데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의 생존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지구 온난화를 저지할 수 있는 전 지구 차원의 규제조치를 합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조건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학습은 자본주의체제의 전복을 지향해야한다. “실질적 포섭”을 안토니오 그람시는 “정서-지적 헤게모니”의 관철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변혁지향적 학습은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철저히 비판하며 “내가 너이며 네가 나”인 동체대비(同體大悲)의 형제애(La Fraternite)라는 새로운 헤게모니의 형성을 목표로 삼는다.

부르주아 헤게모니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3대 소외와 불가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3대 소외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다른 사람들과의 소외-자연으로부터의 소외다. 자신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도자기 장인과 비교해보자.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匠人)은 자신의 노동을 설계-구상하여 숙련된 손놀림으로 도자기를 만들어낸다. 도자기는 자신의 인격의 물질적-미학적 과실이기에 보람을 느끼며 노동은 창조적 예술이자 놀이이며 그런 만큼 자기인격의 실현인 것이다. 이런 노동에 어떻게 과로 혹은 스트레스 혹은 산업재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성격의 노동과는 정반대로 공장 노동자든 사무-관리직 노동자든 농업 노동자 등은 노동과정의 주체가 아니며 노동은 절대적 잉여가치 혹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의 과정으로서 노동생산성을 위해서 최대한 분업화되는 만큼 단순하고 지겹고 고된 일이 된다.

자본주의적 단순노동이라는 사막에서 디아블로 3 혹은 컴퓨터의 고스톱을 비롯한 온갖 컴퓨터 게임과 도박-경마-경정 등은 신기루와 같은 매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돈 버는 기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적되는 인격의 마모로서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문화산업의 수동적 소비자로 축소되고 피폐해진다.

이런 노동과정으로부터 인간관계는 2중으로 소외된다. 우선 착취자이자 시간의 지배자로서 자본가 계급 그리고 피 착취자이자 시간의 노예로서 노동자 계급이라는 계급적 분열로부터 발생하는 인간소외, 둘째 자본가 계급이 노동시장을 통제함으로써 발생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분단을 비롯한 노동자들 사이의 온갖 종류의 경쟁들로 말미암은 노동형제-노동자매 사이의 상잔(相殘), 바로 이것이 노동자-민중이 2중으로 인간관계의 소외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전제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경제관계로 축소-환원시키는 “경제인”(Homo Economicus) 그리고 이런 인간관의 귀결로서 “경제주의”인데 이런 가치관-세계관-생활양식이  노동-민중운동의 중심사상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이런 운동은 아무리“투쟁적이고 격렬”하더라도 부르주아지 공(恐)권력에 상대가 되지 않으며 부르주아지 헤게모니인 “법과 질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인”적 인간관과 경제주의라는 세계관은 인간을 잘 해야 짐승 혹은 짐승만도 못한 년놈들의 세계를 형성하는데 인터넷을 비롯한 온갖 대중매체에 의한 현실의 전모-실상(實相)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왜곡에 의해서 사실상의 “노예들”인 노동자-민중은 자신들이 “민주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환상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남한의 경우 이런 부르주아 헤게모니가 껍데기에 불과한 의회주의를 통해서 관철되는 노예적 환상에 더해서 반공주의적 군국주의가 세계인식의 족쇄를 더더욱 옥죄고 있다. 헌법을 깔아뭉개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기염이야말로 “민주 공화국”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는 마라(Mara:불교의 악마)인 것이다.


      
△ 일명 시민혁명으로도 불리는 부르주아 혁명은 절대왕정의 정치지배를 타도하고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수립하는 것을 말하며, 17세기 영국의 혁명(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과 18세기에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그 전형적 사례로 꼽는다.(그림= 영화 레미제라블) 


미국과 유럽처럼 부르주아 혁명을 겪지 못한 남한은 신(神)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소중함과 함께 부르주아의 이미지로 빚어진 “개인의 이기주의”의 모순을 유학-불학의 전통에서 비판하면서 “내가 너인 동시에 네가 나인” 형제애(La Fraternite)적 연대의식을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에 “경제인적 이기주의”의 극단적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Puritan)혁명기 홉스가 말한바 인간의 상황,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삶의 일상이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금수강산”(禽獸江山)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소외는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람들이 왜 토요일 혹은 금요일 저녁부터 도시로부터 탈출하는 것일까? 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찾듯 사람은 자연의 품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어머니의 품”이라는 “적소”(適所:Nitch)를 충분히 겪지 못한 어린이는 일반적으로 “인간 됨됨이”가 부족한 인간의 모습을 띤 짐승 혹은 그 보다 못한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선사시대에는 물론이거니와 1만 년 전 이래 농경이나 유목생활을 하면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공업화-도시화는 “농자 천하지 대본”(農者天下之大本)-도농의 균형 있는 발전이라는 사회구성체를 벗어나면서 “반 자연적이며 반인간적”인 삶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 3대 소외에 대한 무명(無明:무지)과 자본주의적 탐욕의 결정판들 중 한 가지가 합법적인 부동산 투기다.

이 합법화된 사악함은 결국 “4대강 사업”(邪業)으로 나타났다. 인간성을 “Human Nature"라고 말하는 어투에서 인간이 대자연의 일부임을 절실하게 확인해야한다! 어린 시절 나비와 잠자리 그리고 개구리와 대화하지 않고 봄 뻐꾸기와 호로새의 지저귐 보다 어른들의 유행가가 더 친숙하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밤하늘의 별과 대화하지 못하면서 학원으로 내몰리는 어린이들이 이 반자연적이며 ”첨단 기술적 야만“의 삶을 극복하려는 꿈을, 절실한 꿈을 키워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연두 빛인 어린이들의 심심산천(心心山川)은 학년이 오를수록 잿빛 황무지로 변해가며 그런 악화에 민감한 어린이-청소년들 중 일부는 스스로 이 지옥을 떠나는 것이다.


      


TINA(There Is No Alternative:이 세상에는 자본주의 외에 다른 어떤 대안도 없다)?
TINA(There Is New Alternative:이 세상에는 자본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있다)!

앞의 구호는 늘그막에 치매에 걸린 영국 신(辛)자유주의의 시바(Shiva:파괴의 여신) 마거릿 대처 전 수상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후자는 이런 오만방자하며 야만스런 거짓에 대한 나의 입장이며 전 세계 노동자-민중의 존엄한 투쟁구호다. 전자는 3대 소외를 인간의 운명으로 만들려는 망상임에 비해서 후자는 3대 소외를 극복하려는 용기 있는 끈질긴 지혜다.

나는 3대 소외에 대해서 자기노동의 보람-부단한 자아포월(自我抱越)과 형제애적 연대-다른 생명체들과 따로 또 함께(和而不同)를 지향해야한다고 확신한다. 이런 원대한 삶의 목표는 지성(知性)과 자비심을 일상적 삶의 축으로 삼는 부단히 지혜로운 사상학습과 실천을 함으로써만 현실화시킬 수 있다.

이 소략한 글에서는 이런 가치관-세계관-삶의 양식을 체현(體顯)하기 위해서 왜 “부단한” 학습을 해야 하는 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삶의 보람-자아 나아가 자아포월과 형제애적 연대-모든 생명의 화이부동을 명확히 이해하고 실천할 경우와 명석한 이해 없이 행동할 경우 어느 경우가 원대한 목표를 향한 효과적인 것인 지는 분명하다. 인간됨됨이(人格)의 최고수준은 “말에 의존하는 한편 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依言而離言)는 상태인데 TINA의 변혁운동을 성실히 실천하려면 우선 최소한 오늘날 삶의 조건을 언어로 명석하게 이해해야한다.

청소년기에 이해한 보람이라는 말의 의미가 초등생 시절의 모교 운동장과 같은 것이라면 40대에 이해하는 보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초등생 시절의 모교 운동장이 그다지 넓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아가 환갑에 이해하는 보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어떻겠는가?

자아-자아포월-형제애적 연대-생명의 화이부동 역시 기본적으로 형편없이 게으른 인간이 아니라면 말의 의미는 이팝나무의  연두빛이 생기를 붂돋우고 뭉게구름 같은 사랑을 하며 해바라기가 늦여름 바람에 처연한 자태를 짓고 귀뚜라미 울음 한가락마다 가을밤이 검게 검게 물들어 가며 바람이 칼이 되어 귀를 할퀴는 가운데 “망게 떡 사~려~”하는 처절함이 처연함으로 귀 전을 스쳐가는 세월을 한 해 두 해 보내갈수록 그 색조가 다채로움을 보게 되고 그 맛이 깊어짐을 느끼게 되며 피부에 느끼는 정도를 넘어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흔히 말하듯이 살아온 세월이 자동적으로 말의 넓고 깊은 뜻을 절실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일까? 나이테가 쌓여간 연륜이 지혜로운 안목-과학적이면서 윤리적인 안목으로 구성될 때 그 말은 내 속에서 우리 속에서 생생한 관념이 되는 것이다.

공자가 왜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성찰해보라”(一日三省)고 하였을까?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지 않으면 게을러지기 쉽고 현재 상태에 안일하게 머무르고 싶어 한다. 이런 생활방식이 관성을 가지게 되면 자기노동의 보람은 어느덧 집의 평수를 늘리고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게 되며 고급스레 보이는 문화산업의 상품을 소비하는 삶으로 축소된다.


                  


자아포월하려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은 자아포만(自我飽滿)이라는 비루함의 냉소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며 형제애적 연대는 전태일 열사나 젊은 시절의 패기로나 하는 일로 노래만으로 그 잔명을 이어가게 되고 생명의 화이부동은 오늘날 사돈 팔촌 보다 더 멀고 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하이에나가 본척만척하는 듯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변혁운동이 “너를 잊은 지 오~래”가 된 원인은 바로 이런 “부단한 학습”을 게을리 해온 경향에 있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회미한 기억이 되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패배주의와 방황하는 허무주의의 감옥에서 “불의스런 포도청을 과감하게 박살내려는 강력한 의지”를 스스로 부단히 상기하고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누워 자지 않고 오랜 시간 좌선을 한다”(長坐不臥)는 스님들의 부단히 정신집중을 하는 학습자세가 부족하면 3대 소외라는 고통을 낳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라는 “악”(Albert Einstein)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결의를 품고서 학습해야하는 내용은 대략 두 가지다.

첫째, 비판적이면서 개방적인 사고방식이다. 나무를 보면서도 숲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의 개발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과정이 구상과 설계가 실행과 분리되고 그 실행노동이 단순반복적인 까닭에 사물을 보는 방식이 전체를 보지 못하며 3단 논법적으로는 보는 반면 변증법적으로는 보지 못하며 그런 만큼 “사물화된”(Reified: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나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당달봉사의 눈을 보여주는 예가 “돈이 원수다”-“돈이 돈을 번다”라는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런 말에는 자본과 노동의 화해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중동 같은 “사론곡필”(邪論曲筆)을 일삼는 언론이 툭하면 경제문제에 정치논리를 개입시킨다고 망언하는 것 역시 그런 류의 반과학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물화된” 사고방식을 벗어날 때 3대 소외 각각을 총체적인 삶의 질곡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학습의 내용을 노동조건과 관련해서 임금협상을 비롯한 상대적으로 경제적 부문에 편향되지 않도록 하는 폭 넓은 접근이 절실하다. 이런 접근방식을 “삶의 의미에 대한 연기적(緣起的) 이해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한국인이 미숙한 “대화와 경청”을 반드시 포함시켜야한다. 인간관계에서 중대한 행위가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우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줄 모른다는 것은 한국인이 부정적 감정에 민감한 성향을 비롯해서 “아집(我執)과 아만(我慢) 그리고 아애(我愛:Narcissism)”가 강한 성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성향은 앞서 지적한 “다른 사람들과의 소외”와 결합해서 부정적 시너지(Synergy) 효과를 낳는다. 그런 효과들 중 중요한 것이 이른바 정파적 패권주의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결핍은 “윤리에 대한 경시 그리고 무감각”이다. 오늘날 한국은 “동방무례지국”이랄 수 있다. 윤리란 연장자에 대한 예의로 축소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4단7정(四端七情) 논쟁은 3대 소외와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의 소외”와 관련되는 것이며 인물성 동이(人物性 同異) 논쟁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관련된 것이다.

불학은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가르침인 만큼 인간 심성과 윤리에 대한 논의의 풍성함이 유학보다 넓다. 3대 소외의 보다 깊은 근원이 앞서 지적한 “아집-아만-아애”에 있다고 할 때 “집착을 내려놓으라”(放下着)라는 가르침 그리고 “타자를 나의 몸과 같이 생각해서 크나큰 자비를 베푼다”(同體大悲)라는 가르침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얼마나 이런 인간성과 윤리에 대한 심오한 전통을 “옛 전통을 본 받아서 새로이 창조적으로 계승한다”(法古創新)는 입장을 절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통합진보당의 이른바 당권파는 자신들의 이제까지의 헌신을 거론하며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내 비판 여론은 물론 진보세력의 일원임을 자처하는 적지 않은 민중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자신의 직접 책임이 아니더라도 진보적이지 않은 장관들이 자신이 관장하는 부서의 사건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물며 사회변혁 혹은 사회개혁을 실천하려는 삶을 살아왔다면! “방하착! 그리고 ”죽기를 각오한다면 살아날 것이다“(死卽必生)!

“삶의 의미에 대한 연기적 이해”를 지향한다면 경제와 정치차원뿐만 아니라 예술의 차원 역시 학습내용에 포함시켜야한다. 시와 소설뿐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 역시 보다 폭 넓게 경험해야한다. 대중가요보다 춘향가를 비롯한 판소리 다섯마당, 베토벤-바하-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서양의 고전음악을 감상하며 그 작품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민중미술뿐만 아니라 김홍도와 장승업의 그림은 물론 고흐-일리아 레핀-베이컨 등의 그림 역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감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예술작품의 감상 나아가  작품을 직접 창작함으로써 정서를 능동적으로 조성해서 삶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그 고통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상상력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서의 함양으로부터 실패를 겪더라도 정의감과 용기는  마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서야말로 과학적 세계관의 혈기인 것이다.  

명상수련을 도입해야한다. 명상(冥想:Meditation)은 산스크리트어로 Bhavana인데 “경작하다-계발하다”라는 뜻이다. “마음경작”(心耕) 즉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서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되는 필수 불가결한  수행이다. “마음과 몸은 일체”(心身一如)라는 한(韓-漢)의학의 전통은 오늘날 서양의학에서도 “심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앞서 지적한 사고방식의 병폐로 말미암아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듯이 남한인들은 건강이라면 몸과 마음을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역시 불교의 연기론적 사유 그리고 조선 주자학의 변증법적 사유라는 훌륭한 전통을 망각하는 경향 그리고 부르주아적 삶의 “사물화된”사고방식이 부정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소산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 경고하고 있는 우울증이 남한에서도 증가추세에 있는데 세계적 심리의학자인 리처드 데이빗슨은 심리치료에 명상수행을 도입해서 심리치료용 약물에 못지않은 효과를 내고 있다. 내가 강조하고픈 것은 명상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如實之見)”하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포월함으로써 부-명예-권력-음행(淫行)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과정으로서 자본주의체제의 전복에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정부권력을 장악하기에 앞서 어떤 사회집단은 이미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실로 지도자가 되어야한다”고 강조하는데 바로 이 지도집단의 자질이 헤게모니다. 이 헤게모니의 정수는 “정서-지적 윤리성”이라는 점에서 명상수행은 여실지견을 통해서 “방하착과 동체대비”의 심성을 함양하고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수불가결한 학습이 아닐 수 없다.

레닌은 “이론 없는 혁명은 없다”고 갈파했다. “부단한 학습을 하지 않는 노동자-민중은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희생하면서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는 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바치고.......그와 같은 사람들이 인류양심의 수호자들이며 혁신자들”이라고 칭송한 레닌이 “러시아에 성 프란시스코가 10명만 있었더라면 혁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텐데......”라고 말한 뜻을 깊이 되새겨 봐야한다.                              

2012-06-01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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