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사파티스트의 메시지
마르코스(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번역: 최형록
6. 파시스트적 자유주의
우리가 이미 이 영화를 보았으되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계화의 시장에 있어서 역사가 시세가 높은 생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회색빛 이미지들은 '파시즘의 재출현' 을 의미할 수 있다.
편집증이라고? 움베르토 에코는 "영원한 파시즘(18)"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파시즘은 여전히 잠복해있음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해준다. 파시즘이 확산된 전체주의의 한 가지 형태임을 알려준 다음 그는 그것의 특징들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식의 진보의 거부, 비합리주의, 문화에 대한 불신, 차이에 대한 공포, 인종주의, 개인적 혹은 사회적 좌절, 외국인 배척, 귀족적 엘리트주의, 남성우월주의,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 TV에 의해서 전파되는 질적인 인민주의, "novlangue" (빈곤한 어휘와 초보적 구문).
이것들은 우파 지식인들이 방어하는 가치들이다. "사람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염증, 부정 (否定)에 대한 구토, 예외적인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위한 구실로서 무질서에 대한 혼란을 이용하며 이런 것들은 체제, 시장의 고객이자 소비자들이 된 사람들로부터 설득력 있고 통합력 있는 새로운 독재, 중앙집권화된 억압을 요구하지 않는가 (19)?"
초대형 스크린을 보라. 이 회색빛 전체는 무질서에 대한 응답이다. "질서와 합법성" 을 강요하는 우파 지식인들의 아우성이 도처에서 높다. 파시즘세력 하의 새로운 유럽? 무섭고 동떨어진 꿈. 거대한 스크린의 이미지들. 스킨헤드 그리고 길 한구석에서의 체포, 그들은 독일, 영국, 네덜란드에 있는가? 어떤 평론가는 " 이들은 소수집단들이며 통제 하에 놓여있다"고 안심 시킨다. 그러나 혁신파시즘이 항상 면도질한 머리와 문신한 신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날 만 할 때 그것은 불길한 우파의 현신(顯身) 이다.
내가 "불길한 우파"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내가 서투른 말장난을 하고 있고 (라틴어로 sinistra는 왼손이라는 뜻) 형용모순어법을 쓰고자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주의를 다음의 문제로 끌어가고자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유럽의 정치적 유령은 서둘러 중도파로 접근해갔다. 이것은 전통적 좌파와 관련해서 명백하며 또한 극우파 정당들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20).
이 정당들은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그들의 과거와 거리가 먼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주의 신봉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 즉 선거운동을 하는 가운데 공공의 안전과 이민의 "위협"을 주장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의 제안들이 그들의 것들과 다른 것이 있었던가?
이런 태도의 배후에 파시즘이 매복해있으며 마찬가지로 파시즘은 신자유주의에 확실히 반대하지 않는 좌파의 배후에도 매복해있다. 여기저기에서 저 유명한 "제 3의 길"은 좌파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네오파시즘을 향한 발사대를 구축할 수도 있다.
내가 과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스크린 위로 쇄도하는 회색빛 이미지들이 고의적으로 우리들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고 잊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
여러분에게 빵, 잼 … 그리고 군주의 오른쪽 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도록 완비되어 있다. 그의 셔츠가 갈색이든 내심 뱀의 눈을 품고 있는 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뱀의 눈". 내 기억력이 좋다면, 이것은 잉그마르 베르그만 ( 스웨덴의 국제적인 영화감독-옮긴이) 의 영화제목으로서 나치즘의 임신을 묘사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사람들이 앉아서 영화가 끝날 것을 기다릴까? 그렇다? 아니다? 잠깐! 다른 관객들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집단을 이루고 있네! 터지는 함성! 사람들이 스크린 위로 물건을 던지고 야유하네! 그리고 저 사람들을 봐! 스크린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떠나고 있쟎아! 그들은 영사기사를 찾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 찾았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요하게 한 귀퉁이, 저쪽 높은 곳을 가리킬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무슨 권리로 상영을 방해하는 것일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플래카드를 휘두르고 있다: "우리들, 시민들은 발언하고 주도권을 쥐고 있다. 우리 권리의 요구를 활성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력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임무들 가운데 최고의 임무를 또한 요구 한다 (21)." 우리들의 임무들 가운데 최고의 임무? 누가 우리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조용히! 누군가 한 사람이 발언을 시작하네…
(역자) "파시스트적 자유주의", 마르코스의 이런 형용모순은 "놀부 같은 흥부" 보다는 "유비 같은 조조"(조조는 그의 적인 유비의 아우인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할 수도 있었으나 융숭히 대접하고 그가 기회를 틈타 도망하자 끝까지 추적하여 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제갈공명에 대한 통쾌한 비웃음과 긴박한 죽음 사이에서 수차례 이승과 저승을 왕복하였으나 관우의 보은(報恩)덕에 목숨을 건진다. 이런 유전 (流轉) 장면을 상기해 보라-옮긴이) 에 가깝고 그런 만큼 역사적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타임」지 1999년 마지막 호에서는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들 가운데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1930년대에 이탈리아 파시즘의 '두체(총통)', 무솔리니를 '탄복할만한 이탈리아 신사' 라고 말했다. 물론 뉴딜정책을 시행하자 미국의 극우 반동세력은 그를 빨갱이라고 외쳐댔다. 1937년 미 국무성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과 파시즘이 양립가능하며 "러시아 혁명의 전례를 알고 있는 불만에 찬 대중이 좌파로 기울 때 부자들과 중간계급이 자기방어를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반응이 파시즘이라고 보았다. "독일에 대한 미국의 투자는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속히 가속화되었는데 1929년부터 1940년까지 투자액은 약 48.5%로 늘어났다"(노움 촘스키, 「케믈렛 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존 케네디, 베트남전쟁 그리고 미국의 정치문화」, 보스턴, 사우스 앤드 출판사, 1993년, 20면).
파시스트와 자유주의 세력은 이처럼 협력할 수 있었으며 대통령 김대중 역시 그러함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른바 '3당 야합'을 우국충정으로 합리화했듯이 그는 집권하기 위해서 마치 민중전체의 용서를 대표하듯이 광주민중항쟁의 대립항을 이루는 '두체'와 그 졸개들을 용서함으로써 "역사적 월권행위"를 범하고 "이슬 같은 윤리"에 햇볕을 조사(照射)했다.
7. 회의적인 희망
진보적 사상가들의 과제, 회의적 희망의 과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사물의 기능을 이해했으며 고귀한 의무(noblesse oblige)를 폭로하고 분석하며 비난하고 의사소통해야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신학과 같은 자유주의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대중매체, 은행, 대기업, 군대, 경찰과 대결해야한다.
가 모든 것들이 시각의 시대에 충만해있다. 바로 여기에 그들에게 가장 크게 불리한 점이 있다. 즉 이미지의 권력에 유일한 수단으로서 말을 가지고 대결해야한다는 것. 그러나 그들의 회의주의는 이미 그런 함정을 좌절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비판적 분석을 수행함에 있어서 회의주의로 무장한 그들은 가상적 미의 기계를 그리고 현실의 비참함을 개념적으로 분석한다. 희망을 품을 합리적 이유들이 있는 것인가?
말이 메스가 되고 확성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엄청난 하나의 도전이다(파시스트적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옮긴이). 왜냐하면 이미지는 우리시대의 여왕이기 때문에. 그리고 시각의 시대의 폭정은 소극(笑劇)과 속임수의 백화점에 말을 감금시킨다. "말을 가지고 우리는 패배와 저항을 이름 짓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다른 수단이 없으며, 사람들은 영원히 말에 대해서 개방적이며, 점진적으로 우리의 판단의 모형이 되는 것이 바로 말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종종 두려워하는 우리의 판단은 말의 흐름에 의해서 파여진 하상(河床)처럼 완만하게 형성된다. 그러나 말은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을 때에만 흐름을 생성한다(22)."
신뢰성. 이것은 우파 지식인들에게는 결여되어있으나 행복하게도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풍부한 자질들 가운데 한가지이다. 그들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선 놀라움을 이어서 불안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불안이 시각의 시대의 순응주의에 의해서 절멸당해서는 안 된다. 권력에 대한(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회운동은 여전히 머언 길을 주파해야한다. 그들의 종착지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안적 조직으로서 그들의 입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부단히 나르시스(자기애 혹은 자기도취)와 프로메테우스(혁명적 저항) 사이에서 논쟁한다. 종종 거울의 이미지가 그를 다시 속인 다음 신자유주의적 초대형 시장의 새로운 병사로서 냉혹한 허물벗기가 시작된다(이 부분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동원해서 진보적 지식인이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타락하는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옮긴이). 또한 그에게는 거울을 깨부수고 배후에 숨은 현실뿐만 아니라 그와 같지 않은 그리고 또한 각자 자신들의 거울을 깨부순 다른 사람들 또한 발견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현실의 변혁은 강건하고, 현명하며, 창조적이고 전망을 지니더라도 한사람의 행위자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치적 활동가들과 사회활동가들, 지식인들도 이런 변혁을 초래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다. 이것은 일종의 집단적 노동이다. 행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분석에 있어서도 그리고 변혁운동의 제반 결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 마이클은 재료의 심각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다비드 상을 조각했다. "천사 마이클이 작업을 한 대리석 조각은 이미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사용되어 곳곳에 구멍이 나있었다. 조각가의 재능은 한계에 조응하는 인물상을 창조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최종작품의 자세를 설명해준다(23)."동시에 우리가 변혁시키기를 소망하는 세계는 이미 역사의 작업을 받았고 따라서 그것은 구멍투성이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변혁시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능을 우리는 발견해야한다.
자. 안전 그리고 사상 역시 무기임을 잊지 마시라.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추신. 어느 누가 손에 망치를 쥐고 있을까?
(역자) 당신은 평균 하루에 얼마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인구 60억 가운데-48억 명이 개발도상국가에서 살고 있음-28억 명이 하루 평균 2달러 미만(약 2400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 12억 명이 하루 평균 1달러 미만(약 1200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마르코스는 위와 같은 극빈상태에 있는 농민들의 삶의 조건을 변혁시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싸파티스트의 지도자다. 그의 메시지는 일정한 추상수준에서 바로 남한의 상황에 강력한 그리고 과학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 전편에 흐르는 "모순론적 사고"는 현실의 역동적 복잡성을 통찰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유물변증법적 분석이 결여된 희망은 실패가 예정된 미래를 품고 있는 한편 지배계급의 강고함에만 눈이 팔린 회의주의, 잘해야 마르코스가 지적한 "지적 실용주의"의 자기기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코스의 "회의적 희망"이라는 "형용모순"은 창조적 폭발성을 지닌 진지한 열정의 진솔한 표현이다.
"해방"은 여전히 열매를 맺기 위해서 풍상을 겪어야 할 꿈나무와 같다. 변혁운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현실이 끊임없는 모순의 역동적 해소과정이라고 할 때 변혁운동의 정당성, 그것의 근거는 "생명의 존엄성"을 매 상황마다 투쟁 속에서 확인해가는 것이다("변혁운동의 근거-생명의 존엄성", 「진보평론」, 2000년 여름 호 참고).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성장하여 꽃을 피운다. 변혁운동의 시작과 끝은 꽃을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흙탕 속에 있는 민중을 생각하는 데 있다. 부단한 건투를. 파사현정(破邪顯正).
※ 註
18> 앞의 책
19> 몬탈반의 앞의 책
20> 애밀리아노 프르타, 「유럽의 새로운 권리」, 헤르난 모헤노, 「구좌파와 신우파 」, 우르비 에 오르비를 읽어보라, 이탐, 멕시코, 2000년 4월.
21> 호세 사라마고, 「스웨덴에서의 강의」, 알파구아라, 마드리드, 1998년.
22> 존 버거의 앞의 책
23> 파블로 페르난데스 크리스틀리브, 「집단적 애정」, 타우루스, 멕시코, 1999년.
번역 : 최형록(2000년 8월 15일)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