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경향리크스 : 진실과 정의를 향하여

최형록 (인문학자)



파사현정(破邪顯正:삿된 것을 깨부수고 정의를 실현한다).

글쓴이의 세평

CIA 전문 기술자인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 국가안보국이 불법적으로 미국 시민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음을 폭로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추정컨대, 공안기관은 내가 무슨 책을 수입해서 읽고 있는지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29세인 에드워드 스노든, 그의 젊은이다운 기백과 용기에 아니 짐승성을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길’을 택한 점, 그리고 ‘공포를 조장하는 짐승만도 못한 악의 세력에 단호히 맞서기로 한 용기’에 깊은 공감과 경의를 표한다. 그와 함께 위키리크스의 어산지에게도 전 세계 ‘깨어있는 인간’들이 감동의 박수갈채를 보내리라 확신한다.
모든 국가에서 ‘국민의 안보의 적들’은 ‘국가안보’를 외치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놈들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사례는 어제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서 사실로 확인된 국가정보원의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개입 의혹 사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봄의 찬란한 기운 가운데 삿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한동대 수업 중 “4대강 사업과 천안함 사건”에 비판적인 강의를 한 교수분이 징계논란 속에 휩싸였다고 합니다.1) 한 학생이 강의내용 일부를 녹음, 부모에게 알리고 일부 학부모들이 ‘수업권 침해’를 명분으로 학교 측에 징계를 요구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지성”을 확대-심화한다는 대학교의 사명에 정면도전하는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업 추진과정의 반 민주성, 불법과 비리의혹, 사업의 타탕성을 궤변으로 강변하기 등을 생각할 때 4대강 사업은 “사(邪, 詐)업”이며 국회 천안함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최문순 의원에 따르면 합조단의 조사결과가 6하 원칙-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가운데 그 어떤 요건에도 맞는 것이 없다고 규정한 점(강태호 엮음, <<천안함을 묻는다: 의문과 쟁점>>, 창작과 비평사,2010년)을 생각할 때 국가안보를 빙자해서 진실과 정의를 교살하려 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떠오릅니다.

에밀 졸라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세속적 명성이 그 절정에 이른 바로 그 시점에 영예의 상징인 ‘레종도뇌르’ 수상을 포기하고 거짓을 장기로 삼고 불의의 사도들인 최고위 군부와 조-중-동 같은 언론을 향해서 <<나는 고발한다>>라는 사회적 죽비를 날려서 프랑스인들의 ‘잠든 의식’을 일깨웠지요.

“청화대(請禍隊-민중에게 화-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불의스런 권력의 하이에나들)”의 작태를 보면서 이 사회에 대한 몇 가지 진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화할 줄 모르는 독백자들

첫째, 민주주의의 언어적 기초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최소-최대의 합의의 형성”인데 이런 상식이 ‘일용할 상식(常食)’이 되지 못한 미숙함이 이런 식으로도 드러납니다.
교수분의 강의 내용과 견해를 달리한다면 ‘개성’을 살려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여 토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음험하고 멍청한 놈을 보면 법의 정신을 우롱하는 두 가지 경우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를 도로교통법으로 유린하는 경우, 노동자의 인권인 “단체행동권”을 업무방해와 손해배상청구로 겁박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역사는 골백번 반복된다  

둘째, 칼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반복되는데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소극(笑劇)으로 끝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이 경구의 역사적 근거는 이렇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종지부를 찍고 부르주아 체제를 황제체제의 고치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군부 쿠테타를 마르크스는 비극이라고 규정합니다. 그 부르주와 체제가 부르봉과 루이 필립의 왕정체제라는 고치를 거쳐서 1848년 혁명으로 다시 공화정이라는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를 다시 한번 황제체제라는 고치 속으로 끌고 들어간 사태를 희극이라고 규정합니다.

이 두 사건은 1799년(정조 치세의 말기)~1870년(고종 치세의 초기) 기간 “제행무상(諸行無常:모든 사물-현상은 늘 그런 것이 아니라 변한다)에서 중대한 정치적 대목들입니다. 이 시기 전후를 무명(無明:진화과정에서 형성된 아집이라는 고치이자 ‘감옥’에서 해방되지 못한 경제 동물적 개인주의적 인간의 상태) 속에서 살아간 ‘사회적 동물들’의 삶을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근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진전 과정에서 전개된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스탕달은 <<적과 흑>>에서 위고는 <<레미제라블>>(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4/19의 열린 공간을 폐쇄시킨 박정희의 군부 쿠데타를 비극으로 10/26의 열린 공간을 질식시킨 전두환의 군부 쿠데타를 소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법 그 뿌리를 내렸다고 안이한 낙관에 빠져있지 않았던가요?

역사를 진보의 방향으로 형성해가는 과정에 반드시 반역의 경향이 간섭한다는 사실(史實)을 직시해야합니다. 김지하의 “5적”(다섯 종류의 도둑놈들: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은 유신체제를 넘어서 여전히 건재하며 채만식의 “탁류” 역시 “死대강  邪업”이라는 “국토의 생체실험”으로 연면히 흐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합니다.
역사는 두 번 정도가 결코 아니라 골백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암적 조직과 싸우는 T세포

셋째, <경향신문>이한국판위키리크스(WikiLeaks)로서“경향리크스(www.khleaks.com)를 개설한다는 희소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키리크스는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를 비롯한 미국의 ”권력 엘리트들“이 ”제도화된 탐(貪)-진(瞋:악의-증오심)-치(癡:어리석음)“에 의거해서 국익으로 포장한 부시 행정부 등의 은밀하고 추악한 외교와 전쟁을 수행한 실상 등을 다수의 조직 내부 양심적 고발자들의 지원으로 만천하에 폭로하는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전미신문편집인회의에 보낸 서신(1953-04-16)에서 용기 있는 정직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2) “군비는 노동자들의 땀을, 과학자들의 천재성을, 아이들의 희망을 소비하는 것”, “현재 중폭격기 1대의 가격은 30개 이상의 도시에 현대식 벽돌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액수...전투기 1대는 밀 50만 부쉘(약 36리터-2말)에 해당되며 구축함 1척은 8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집들의 건설비용에 해당된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합조단의 조사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나라 국민이냐?’라고 비판적인 지성의 진심을 왜곡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의희 고별연설에서(1961-01-17) “도둑놈들이 민주주의 그 자체를(매가 닭을 그러듯이-필자) 채어갈 수 도 있다”라면서 이런 시대의 해결 주체는 “지식을 갖추고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시민들 뿐”이라고 정확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방위사업청장이라는 수컷이 건설 노동자들의 식당인 함바집 운영 비리에 연루되고3) 앞길이 9 만 리인 젊은 병사들이 추정컨대 군-산 비리로 부실한 수륙양용차를 타고 훈련하다가 혹은 헬기를 타고 가다가 이 불의스런 사회를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事人如天)”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고귀한 자유를 영원히 박탈당하는 운명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공자의 경구인 “하루에 자신을 세 번 반성한다”(一日三省)는 정신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請禍隊의 주요 구성원인 삼성 최고 경영자들의 실상을-조직적인 비자금 조성 및 탈법과 이를 감추기 위한 회계조작, 경영권 불법 세습 및 이 과정에서 저지른 법정 증거조작, 정-관-법조-언론계에 대한 광범위한 불법 로비-폭로한(그의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씨와 같은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들의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지성”이 활성화 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경향 리크스”는 주목할 만한 시도입니다.

또 하나의 사이버 광장을 통해서 21세기의 청화대-21세기의 “5적”을 엄혹하게 단죄하여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임을 비웃는 악의 세력에 정의의 칼을 단호하게 사용해야합니다.

언론자유와 사용가치-불이(不二)의 관계

넷째, 언론에 대한 통제와 억압은 민주주의에 대해서 ‘두뇌절제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지성”에 대한 테러행위가 인터넷 공간에서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전두환 시대의 “보도지침”이-월간 <<말>>지에서 사상에 대한 이 테러를 폭로하여 편집인들이 ‘국가 기밀누설죄’로 재판정에 섰다- 사이버 공간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2010년 전기통신법 47조1항이 위헌판정을 받은데 이어 내시로 전락한 국가 인권위원회도 인터넷의 정보심의-시정요구를 민간 자율 심의기구에 이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지요. <경향신문>(2011-02-17)이 사설에서 ‘방통위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 21조 제 4호’에 대해서 법원이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한 결단을 ‘방통 심의위의 인터넷 검열기능 폐지해야’라고 호응한 일은 “경향 리크스”의 개설 용기와 맥을 함께 하는 중대한 입장 표명입니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두뇌 절제수술”은 종합편성 채널 사업자 선정문제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할 때 언론의 자유가 아인시타인 역시 ‘악의 체제’로 규정한(그의 “왜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백안시 되는 “사용가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이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당초 인터넷은 “공공(公共)의 부”에 속하는 것 이었습니다. 2차 대전 후 미 정부는 수 십 년간에 걸쳐서 디지털 의사소통수단을 발전시키는 국책사업에 원자폭탄 제조 기획인 맨해턴 프로젝트에 (인플레를 감안할 때) 투입한 비용의 최소 10배 이상인 수 천 억 달러를 투입했지요.4) 민중의 혈세 그리고 연구대학들에 소속된 과학-기술자들의 지적 노동의 산물이 사기업들의 로비의 영향력으로 ‘상용화’되는 다른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의 경우에도 생산의 공공적 의미인 “사용가치”는 궁극적으로 이윤제고를 통한 ‘자본축적’의 동기에 의해서 ‘교환가치’의 의붓자식이 되어버립니다.

운동장이 민중이 “사용”해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가치”를 발휘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대기업이 상업적 스포츠를 후원하여 자신을 선전하는 공간으로 사용해서 결국 대기업의 상품판매고를 높여 ‘교환가치’를 축적하는 현상이 그런 것입니다. “사용가치”의 소외(疎外)되고 사물(事物)화된 형태로서 ‘교환가치’가 맹위를 떨치는 사회악들 중 한 가지가 ‘부동산 투기’입니다.

인간다운 삶의 필수요소들 중 한 가지인 “집”이 주거공간이라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전매차익’이라는 ‘교환가치’의 제고 대상이 되고 이 ‘교환가치’를 축적하고자 은행대출을 하고 해주는 세계는 본말이 전도된 ‘악의 체제’ 바로 그 자체입니다. 2007년 미국 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비우량 담보대출)’ 거품의 붕괴는 이런 반 이성적이고 냉혹한 체제의 인과응보인 것입니다.

“경제”라는 용어가 한자문화권에서는 원래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가지런히 만들고 백성을 구한다)임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경제는 경세제민(輕世除民:세상 사람들을 경멸하고 민중을 배제한다) 그 자체입니다.

의사소통에서 시-공간의 장애를 극복하고 “대중지성”의 형성 가능성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가 중시한 “유기적 지성인”의 형성-전태일을 따르는 노동 연구소의 사이버 노동대학(2010년 개교 10주년을 맞이하여 “전태일 대학”으로 이름을 바꿈)이 한 가지 모범적 실례-에 사용할 수 있는 공간-수단이 이윤축적을 지향하는,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지성”의 함양과는 별반 관계없거나 오히려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성 장애’의 확대-강화에나 작용하는 온갖 잡스런 게임을 비롯한 ‘문화산업’의 광대한 ‘움직이는 부동산’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이 경악스런 불의스런 삶의 조건을 유지하고자 “권력 엘리트”는 “사상 검열”을 자행합니다. 구글은 검색엔진의 70%를, 애플은 iTunes를 통해서 디지털 음악 내려받기 시장의 87%를 점유함으로써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체제 대항적 문화(Counter-Culture)의 잠재력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AT&T는 국가안보국과 협력해서 불법적으로 고객의 통신들을 감시하고 있으며 아마존과 PayPal/eBay는 위키리크스의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폭로를 ‘국가 기밀 누설’로 불온 시 하고 있는 정부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교환가치”가 가치관의 옥좌를 차지하면 모든 사물이 상품화 됩니다. 교육 역시 잠재적 개성을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지성”으로 발현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기업의 “교환가치”를 제고시키는 노예적 임금노동자를 제조하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중앙대를 접수한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한 박용성의 가치관에서 보면 앞서 지적한 그 음험하고 멍청한 학생 놈은 표창감입니다. “대학이 전인 교육의 장, 학문의 전당이라는 헛소리는 이미 옛 이야기 이다. 이제는 직업교육소라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진화론적으로 형성된 “일상적이고 평범한 악업의 성향”이 ‘소외되고 사물화된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최악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속에서도 그런 악업의 성향을 의연하게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소스 공개 운동”, “모질라 불여우”, “위키피디아”, “위키리크스” 운동은 오늘날 “전자촌”의 희망봉들입니다.

“비판적이고 정의로운” 민중은 “전화위복”(轉禍爲福:화-재앙을 뒤집어 엎어 복으로 만든다)의 자세로 국내외에서 무명 속에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악업“을 자행하고 있는 청화대 세력과 투쟁해야 합니다.

“정치는 분발함을 앞세우고 학문은 용맹정진함을 귀하게” 여긴 정조의 후예가 선택해야할 원력(願力)과 파사현정의 행동방침은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5)



1. <경향신문>, 2011-03-26 자, 9면.
2. Andrew Bacevich, "The Tyranny of Defence Inc.", <>(2011, Jan.~Feb), 74~79면
3. <경향신문>, 2011-02-18 자, 31면.
4. J. B. Foster and R. McChesney, "The Internet's unholy marriage to capitalism", <>(2011, March, Vol 62, No 10), pp. 1~30.
5. <경향신문>, 2011-02-28 자, 30면.


2011-03-29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한국인권뉴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인권뉴스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