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열강은
연약한 사슴을 먹이로 다투는데
나라의 인재들아
와룡선생은 누구인가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하고
돌아가노라
온 산에 비바람 소리
푸른 칼이 우는 구나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 꼭 100년 전 무술변법 운동의 지도자 캉 유웨이는 이렇게 허우대는 장대하나 무력한 중국의 현실에 울분을 토로했다. 2006년 현재 중국은 사슴이 아니라 약 200년 전 나폴레옹이 통찰한, 잠에서 깨어나 세계를 향해서 포효하는 사자 바로 그 자체다.
1978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대장정’에 나선 중국은 한반도 변혁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외재적(군사적·외교적) 변수로부터 동북아 차원의 한반도 변혁과정의 내재적(군사적·외교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정치적·문화적) 변수로 변했다.
남한 기업들의 중국 진출,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 과정에서 중국이 수행한 역할, ‘동북공정’ 등과 같은 일련의 사태 진행은 중국의 위상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골드만 삭스의 분석가들은 중국 경제가 2015년 경에는 일본을, 그리고 2039년 경에는 미국을 제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바는 한반도 변혁운동의 ‘국제주의적’ ―좁게는 ‘동북아시아적’― 차원에서 중국의 변화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소련이 ‘전체주의적 일국 사회주의’의 길을 걷고 결국 붕괴하기에 이르게 된 원인은 당시 볼셰비키가 고대하던 ‘유라시아 차원의 사회주의 혁명’이 전개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현재 상황에 던져야 한다.
미국 기업 연구소의 연구원 애버시타트가 한반도 전개 상황에 대해서 여섯가지 시나리오를 제기하면서 북한 체제의 내적 붕괴―민중의 식생활에 대한 정책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서서히 시작된 과정―를 가정한 것을 우선 논외로 하더라도, 남한과 북한이 교류하면서 평화공존, 자본주의적 통합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한반도 변혁을 생각할 때 중국의 영향력은 혁명과정의 함수에 있어서 필수적인 독립변수다.
남한 나아가 한반도에서 민중정권이 수립될 경우 과거 소련이나 중국처럼 일정한 기간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 단절되어도 ‘자급자족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권력의 수립 과정에서 중국이 적극 지원하거나 ―중국은 헌법에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폐기했다― 최소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할까?
이런 의문이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중국의 정권, 국가권력의 성격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여야 한다. 과연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 국가’인가?
2.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과 강택민의 ‘3개 대표’론
오늘날 후진타오 체제의 뿌리는 등소평이 모택동 노선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중국적 특징을 띤 사회주의”(1984년 6월 30일) 노선이다. 우선 등은 ‘사실로부터 진리를 찾는다’(실사구시:實事求是 ― 17세기 왕양명이 유학의 쇄신을 위해서 강조한 관점)라는 관점을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인민공화국의 수립 이래 드러난 결함들 중 하나가 생산력의 발전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민중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일까? 등은 사회주의의 길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그 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길로 방향 전환할 것인지 물으면서 사회주의를 견지한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프로그램이 ‘4대 현대화’다. 사실 ‘4대 현대화’는 1975년 주은래가 제시한 것으로 농업, 공업, 과학기술, 그리고 국방의 현대화다.
그런데 2006년 현재 중국의 현실은 등소평의 예상과는 정반대다. 즉 그는 앞서 지적한 글에서 자본주의는 중국인의 10%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며 사회주의를 견지하면서 각자의 노동에 상응하는 분배의 원리를 적용하면 부에 있어서 지나친 불평등이 초래되지 않을 것이며 향후 20~30년간 생산력이 발전하면 양극화가 결국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000만원에 달하는 이동전화기를 사용하는 부자가 있는 등 이미 도시의 중간계급이 전체 인구의 15%에 이르며, 0.5%가 전체 부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고용불안 문제가 중국에서도 국가소유 기업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면 폐쇄되고 사유화 되면서 급증했다.
2006년 현재 중국의 농촌은 농업의 집단성이 해체되어 사유화되면서 파국적 상황에 처해 있다. 중국사회과학아카데미의 계산에 따르면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불균형은 사회적 서비스, 의료와 교육 부문을 고려할 때 7:1의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공공의료는 과거지사가 되어 노동자·농민의 가정에서 누가 큰 병이라도 들면 “하늘을 부르고 땅에 호소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최근 (2006년 11월 18일) 남경에서 문을 연 ‘헝하이 외국어 유치원’은 장래의 CEO 육성을 목표로 6세 이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모든 교육을 영어 등 외국어로 진행하는데, 연간 학비가 공립의 50배인 1,200만원에 이른다. 이런 반면에 중앙정부에서 학비인하령을 지방정부에 내리더라도 무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정이 이렇기에 “때때로 중앙정부의 정책들이 종난하이(북경의 정부 소재지)를 넘지 못한다‘는 말까지 있다.
중국의 농촌 역시 WTO 체제에 편입되면서 값싼 외국 농산물, 그에 더해서 위안화의 평가절상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다. 등소평은 경공업의 생산성을 높여서 고도기술적 생산체제로 유도하려 했는데 이 정책은 일단 성공적이어서 중국이 저임 수출경제에서 고임 내수경제로 변신 중이다. 또한 중공업 투자를 은행제도와 특히 소비자 저축으로부터 유도한다는 정책 역시 성공적인 한편 저축의 장려로 말미암아 내수증대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중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온갖 형태의 부정부패가 창궐하고 있다. 600만 공무원의 급료, 리무진, 연회비용이 정부 예산의 1/4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비용은 현재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려는 ‘새로운 사회주의 농촌’ 프로젝트에 배당된 총액의 2배가 넘는 엄청난 것이다.
강택민의 ‘3개 대표’론은 사회의 선진적 생산력, 중국의 선진문화의 진보적 경로, 다수의 근본이익인데, 이 논의에서 핵심은 중국 부르좌의 성장을 ‘사회의 선진적 생산력’으로 표현한 것으로 결국 당-국가의 관료세력, 기업 경영자들, 그리고 신흥 사기업 세력 사이의 동맹이 다수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이며, 자본가들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중국은 25년간 연간 경제성장률이 줄곧 9.5%였으며, 세계 최초로 외환보유액이 1조 달러를 돌파하였다. 중국의 무역은 국내총생산(GDP)의 80%에 달하는데, GDP의 36%가 외국인 직접투자(FDI)로서 이것은 일본보다 18배나 많은 것이다.
중국의 동아시아 국가들과 남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은 1993~2003년 기간 증가해 왔다. 즉 일본과는 250%, 대만과는 300%, 남한과는 670%, 필리핀과는 1800%, 인도와는 1025% 증가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미국 재무성의 국채를 2000억 달러 이상 보유함으로써 미국이 채무변제를 하고 금리를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요컨대 남한의 경제력이 세계 200여국 중에서 10위 혹은 11위를 하고 있음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중이 많듯이 중국이 ‘포동포동’(浦東浦東―포동은 샹하이의 경제특구)해지지만 등소평의 예상을 정반대로 뒤집고 나아가는 상황에 처한 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등소평의 노선을 ‘우선회하면서 좌선회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 역사적 뿌리는 ‘문화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3. ‘문화혁명’과 ‘극좌파’의 강점과 약점
“이 붉은 자본가 계급은 통째로 부패한 계급이 되어 역사의 진보를 방해했다. 그들과 인민 전체의 관계는 지도자들과 피지도자들의 관계로부터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의 관계, 그리고 착취자들과 피착취자들의 관계로 변해 왔다. 동등한 지위에 있는 혁명가들의 관계로부터 그것은 이제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의 관계로 되어 버렸다. ‘붉은’ 자본가 계급의 특권들과 높은 급료는 광범위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중국 민중의 코뮌’을 실현시키자면 이 계급을 전복시키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은 1967년말 혹은 1968년초 집필되어 출판된 <중국은 어디로?>라는 선언서 중의 일절로서 약 40년 전 모택동주의자들로부터 ‘극좌파’라는 명칭을 부여받고 탄압되어 망각된 혁명주의자들의 통찰을 보여준다. 모택동 별세 후 심화·확대된 중국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 데 이들의 입장을 망각에서 경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살펴보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모택동주의자들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 선포하면서 경제발전 모델로 스탈린주의적 방식을 취했다. 그런 노선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지체되었다. 1957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지니면서 인민공사의 설립과 중화학공업의 육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증명되지 않은 농업기술의 시행, 인민공사의 추동성의 부족, 그리고 가뭄으로 곡물생산은 1959년 약 15%, 1960년에는 25%, 1961년에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격감했다. 이런 결과 1958~1962년 주로 농촌지역에서 특히 호남성·안휘성·산동성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는데, 최소 3000만 명, 최대 6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재앙의 책임을 지고 모택동은 권력의 중심에서 후퇴하며, 유소기-등소평이 집권하게 된다.
‘문화혁명’의 시발점은 1966년 5월 25일 북경대학생 니에 유안지 등 7명이 대자보를 붙인 것으로 본다. 이전의 정풍운동이 당내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것에 비해서, 그리고 신문에서 실명비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당내 다양한 위원회의 지도하에 진행되었던 것에 비해서 이것은 당 고위 지도자들에게 충격적인 것이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한편 이미 모택동은 당 중앙위가 중앙문화혁명 그룹을 조직해서 문화·교육 체제에 있는 우익적 이념을 숙정하도록 제안한 바 있었다. 모택동은 이 ‘대자보 운동’을 계기로 이런 구상을 실천하려 한 것인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중국 공산당의 당-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세력의 도전 양상까지 분출하게 된 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우선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들의 진상부터 알아야 한다.
첫째, 유소기-등소평 집단은 진정으로 ‘부르좌 반동노선’을 걸었던 것일까?
1950년대 중반 즉 ‘대약진운동’ 이전에 중국에서 부르좌는 계급적으로 거의 소멸되었다. 그리고 유소기는 대약진운동에서 절정에 이른 모험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견실히 지지하며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는 ‘모택동 사상을 연구하라’고 할 정도였고 모택동은 거꾸로 줄곧 그를 지지해 왔다. 사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유소기 역시 모택동과 함께 ‘관료주의’(지배적 당의 기득권으로 말미암은 정체), ‘종파주의’(비당원들에 대한 오만한 태도), ‘주관주의’(맑스주의 교육과 이념적 훈련이 부족함으로써 형성되는 편협한 관점)와 싸우는 당의 정풍운동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66년 당시 상황에서 모택동은 대중노선을 택한 반면에 유소기는 당내에 한정해서 비판과 학습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런 충돌은 곧 당내 권력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소기와 등소평은 1966년 10월에 중앙위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 사실상 권력을 잃게 된다. 당내에서 재집권하게 된 모택동은 극좌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며 여기에 ‘홍위병’이 연루되어 있다.
둘째, 남한 조중동 반동언론이 일방적으로 악마 보듯 하는 홍위병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다. 사실 홍위병 세력에는 이질적인 두 세력, 보수적 홍위병 세력과 급진적 홍위병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보수적 홍위병 세력의 지도급은 ‘정치적으로 질이 높은’ 자들로서 상급자들과 관계가 좋았으며 그 구성원들은 간부들의 자제들로서 당과 정부 관료들의 자손들이었다. 자칭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인 이들은 신문사를 폐쇄시켜 버리거나 지도급 정부관청을 습격하거나 ‘검은 문서들’(중국 공산당은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사람들에 관한 문서를 보관했는데 그들이 당 노선과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면 그것을 폭로해서 그들의 경력 전체를 짓밟았다. 그 문서는 특정 개인의 역사와 그의 (그녀의) 가족의 역사, 그리고 계급적 배경 등등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의 압수와 손괴와 같은 격렬한 행위들에 찬성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런 과격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서 급진적 홍위병 세력은 ‘정치적으로 질이 낮은’ 사람들로서 많은 단위에서 특히 대공장에서 소수파였으나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서 보다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칭 ‘혁명적 반란자들’이라며 공산당 지도부에 대해서 굽힐 줄 모르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 세력은 반(半, semi) 프롤레타리아 계층으로서 고용이 불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보다 안정적인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에 살 수 있는 거주허가증을 지니고 있으면서, 낮은 임대료, 의료 및 연금혜택을 받았으며 자녀들을 위한 교육시설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즉 반(半) 프롤레타리아 계층은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수백만 명의 임시직 노동자들로서 고용계약이 끝나면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과 함께 1960년대 초반 “고난의 3년” 시기에 농촌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수백만 명의 이전 공장 노동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문화혁명’이 가장 격렬했던 1966년 여름~1967년 가을 기간은 모택동의 노선과 이 급진적 홍위병 세력 사이의 투쟁이었고, 모택동의 마키아벨리적 국가통치술(state craft)에 급진적 홍위병 세력이 패배당하는 과정이었다.
샹하이를 비롯해서 여러 도시들에서 전개된 대규모 파업과 연좌시위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각종 혜택, 그리고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했는데, 모택동은 이것을 ‘경제주의’라고 몰아붙였다. 그런 한편 정규직 노동자들은 보다 좋은 주택과 보다 평등한 임금체계를 요구했다. 요컨대 모택동의 응답은 ‘소속 직장으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샹하이에서는 공장 경영자들, ‘모범적인 노동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모택동이 발휘한 국가통치술은 우선 정규직의 ‘질서’를 회복시켜 반(半)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격리시키며 그런 다음 반란적 활동가들이 당 관료와 타협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통치술이 표현된 것이 ‘단결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 단결하라’는 명령이었다.
모택동의 노선, 그리고 그가 판단하기에 ‘극좌’인 대중운동의 격돌이 가장 현저하게 일어난 것이 1967년 ‘샹하이 코뮌’이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흐름이 ‘극좌’파 중 선견지명이 있는 호남성위원회였는데, 특히 이 호남성위원회의 선언서 <중국은 어디로?>는 주목할 만하다.
제1부에서는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는 모택동과 호남성위원회의 입장이 합치한다. 그러나 당 간부들이 새로운 관료 부르좌지로서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다는 인식이 모택동에게는 철저하지 못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제2부에서 상세히 정확히 분석되고 있다. 관료와 관료기구가 없다면 생산력이 크게 해방될 것이며, 공장경영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담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1870~1871년의 ‘파리코뮌’과 유사한 ‘대중독재’ 국가의 수립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화혁명’이 순전히 문화적인 혁명이 아니라 인민공화국의 수립 이래 형성되어 온 ‘관료주의’ 계급의 전복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개혁주의나 평화적 이행의 여지는 전혀 없다. 낡은 국가기구를 완전히 분쇄해야 한다.”
제3부에서는 모택동의 ‘3자를 하나로 결합’하는 혁명위원회를 군과 관료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여 부르좌지가 권력을 찬탈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제7부에서는 기초조직에 입각한 새로운 혁명당을 결성하여 민중이 새로운 부르좌지를 전복시킬 것을 천명하고 있다.
호남성위원회의 한계는 사상·이론의 차원에서 모택동에 대한 ‘인격숭배’의 구심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조직의 차원에서 막강한 기존 공산당-국가를 대체할 만한 기초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속)
2006년 12월 6일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