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한반도 변혁과정의 중대한 변수, 중국 (2)

최형록(인문학자)


4. 중국의 ‘생태학적 자살’, 전 지구적 악몽

해가 갈수록 ‘황사현상’이 한반도에 해를 입히고 있다. 예전에는 글자 그대로 ‘누런 모래먼지’만 불어왔으나 오늘날 그것과 함께 중국의 대기오염 물질까지 건너오고 있다. 북경의 경우 1950년대에만 하더라도 심각한 모래폭풍 현상이 5차례 정도였으나, 이것이 1990년대에는 20차례로, 급기야 2006년 9월까지만 하더라도 벌써 8차례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사막화’인데 믿어지지 않는 사실은 중국의 전체 토지량의 1/4이 사막화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가구제조·수출을 위해서 아마존에서 열대림을 남벌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세계 20대 오염도시 중 16개가 중국에 있으며, 북경은 ‘세계 대기오염의 수도’라고 불리고 있을 정도다. 중국은 석유화학 공업과 중화학 공업 발전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2005년 현재 에너지 생산에서 세계 3위이며, 에너지 소비에서 세계 2위를,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석탄생산국이자 세계 석탄 소비의 26%를 또한 세계 6위의 유전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유류소비 제3위를 차지하고 있다.

공업폐기물을 처리하지 않은 채 방류함으로써 중국의 강들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7억명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 중국의 유기적 수질오염의 정도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인도를 모두 합한 정도에 이르며 이로써 A형 간염, 설사, 그리고 간염과 위염의 수준이 대단히 높다. 중국의 환경보호국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500대 도시 중 193개 대도시에는 전혀 하수처리를 하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오염된 식수로 인한 설사로 매년 어린이 3000명이 사망하는 경악스런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2001년 이래 신생아의 결함이 25%나 증가한 원인 역시 여기에 있다.

중국 문명의 요람 황하, 양자강, 주장강 등 7대 강의 60% 정도가 ‘인간이 접촉하기에 적절치 않은’ 강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향후 40년에 걸쳐 남북 수로변경 프로젝트에 500억 달러를 쏟아 부으려고 한다.

등소평의 ‘중국적 특징을 띤 사회주의’는 도시의 물 소비량이 농촌의 그것보다 2.5배나 많으며 물 부족에 따른 성(省) 사이의 물 분쟁 사태가 격화되고 있다. 세계적 대규모 댐 45,000개 중 거의 절반이 중국에 있는데, 홍수방지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황하는 건조화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를 ‘공학도들, 특히 수력공학도들의 독재’라고 비아냥거린다. ‘삼협댐’의 피해는 그 규모만큼이나 지대하다. 세계 유일한 민물 돌고래와 몇몇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있으며, 2006년 현재 1,600만 명이 이주해야 함으로써 실업과 궁핍한 생활에 놓여지게 되었다. 더욱이 법에 따른 약소한 보상금을 지방 공무원들이 착복함으로써 대중적인 항거와 행진, 급기야는 경찰과의 전투가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디 이것 만인가! 중국은 세계 GDP의 5%를 차지하면서 1차 에너지원의 12%를 소비하여 이제 온실가스의 배출량에서 미국 다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름 수입량이 최근 (1996~2003년) 폭증하였는데, 이런 증가량의 1/3 이상이 자동차의 폭증에서 비롯한다. 이런 현상은 WTO 체제의 나쁜 영향이기도 하다.

요컨대 오늘날 중국의 경제기적과 환경파괴는 한국의 그것과 질적으로 동일하다. 중국의 환경관련 법과 규제는 겨우 10% 정도만 실제로 발효되고 있으며, 2004년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2001~2005년 기간 설치된 하수처리 시설의 절반 정도가 가동비용이 비싸다는 핑계로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공장들의 2/3 정도가 정수시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벼운 벌금을 내고말지 가동하지 않고 있다.

2005년초 환경부 차관 판 유에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환경난민’의 발생을 경고하면서 중국의 경제기적이 “환경이 더 이상 보조를 맞출 수 없기에 곧 끝날 것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5.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

첫째, 1967년 호남성위원회의 <중국은 어디로?>의 문제의식이 2006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때 현존 공산당-국가체제를 혁파할 수 있는 움직임들은 없는 것인가?
전 중국노조연맹의 회원 수는 1억 5천만 명인데, 중국공산당원의 두 배나 된다. 그리고 외국계 기업 15만 개 중 26%에 노조가 결성되어 있으며, 소속 노동자 수는 429만 명에 이른다. 이런 세력임에도 체제위협 세력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결을 저해하는 것들은 노동시장 내 경쟁, 권력의 분할지배, 노-농연대와 노-학연대의 어려움 등이다. 보편적 현상으로서 시위를 하더라도 당면 요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구세대와 신세대 간 역사적 경험이 전수되지 않으며 맑스주의의 쇄신 혹은 맑스주의보다 폭넓고 깊은 새로운 사상체계가 아직 모색 중이라는 점이다.

둘째,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중국에서 ‘법륜공’이라는 신흥종교의 신자 수가 1992년 현재 약 8천만 명에 이르며 1999년 이래 불법화되어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중국 공산당이 이 종교세력을 탄압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가치를 배신하는 현실의 불안 속에서 이 종교세력이 기존의 당-국가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에 있음은 중국 역사에서 반체제 세력과 도교 혹은 불교 세력이 연합하여 기존 왕조를 전복시킨 전통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다.

‘성 프란시스코가 몇 명만 있었더라면…’이라고 말한 사람은 레닌이었다. “…불경이 상층부를 위한 불경과 노동인민을 위한 불경으로 구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나라 때 6조 혜능의 불경인 『법보단경』은 분명히 노동인민적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1959년 10월 22일 반선대사와 환담한 모택동이었다. 모택동은 1920년대에 불학을 연구하였으며, 변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석가모니를 찬양하였다. 모택동이 ‘이기주의에 대항하는 내적 투쟁’을 강조한 것도 이런 청년기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는 아편인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맑스주의가 스탈린주의인 것만이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위대한 볼셰비키 혁명이 약 74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그것에 못지않은 중국 혁명이 ‘자본주의적 대장정’에 나선 현실을 볼 때 생산수단을 공공소유화―사실 국유화―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이 가치관이 혁명적으로 덕성스런 수준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사유재산을 잉여노동의 착취-피착취라는 수준에서만 아니라 삶의 총체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탐욕과 증오감, 그리고 무지를 넘어서는, ‘아집(我執)’을 넘어서 ‘이타자리(利他自利)’의 ‘자비심’을 내면화하는 ‘내적 혁명’을 법-제도적 정치혁명과 병행시키지 않을 때 맑스가 실현하고자 한 사회주의는 이상향(utopia)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셋째,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을 지향하되 우리 세대는 우리의 ‘장기적 전망의 과학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자기비판성과 신중함, 그리고 ‘실용적 책임성’을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공상적’ 사회주의와 구별되려면 그 ‘과학’이 양자 물리학이나 분자 생물학, 혹은 리만 기하학의 ‘과학성’과 엄연히 다름에 유의해야 한다. 장기전망―이를테면 이윤율 하락에 입각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화양상 그리고 그것의 한국적 발현형태 등―의 예측의 ‘과학성’이 앞의 과학들과 같은 정밀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1979년 당시 박정희가 암살당하는 사태, 그후 3김을 제치고 전두환 파쇼체제가 등장한 것, 1987년 민중운동의 대폭발과 그에 이은 군부세력의 재집권 등에 대해서 남한 맑스주의자들은 얼마나 정밀하게 예측하고 대응책을 마련하였을까?

넷째, 사상·이론적 차원에서 사회적 현실과 역사에 대한 총체적 파악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인 한편, 그런 파악에 입각한 민중의 조직 역시 인간에 대한 ‘열린 마음’의 자세, 이제가지보다 폭넓고 깊이있는 인간(성) 이해가 병행하지 않는 한 성공적으로 추진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남한의 과학적 맑스주의자들이 과연 다양한 비맑스주의적 혁명세력들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우월하고 조직활동에 있어서 훨씬 더 ‘인간미’가 있었을까?


어릴 적 감명 깊게 읽은 『채근담』을 다시 읽으며 다음 구절 역시 다시 음미해 본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시대를 잘 구제하는 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무더위를 몰아내는 것과 같다.
세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세속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희미한 달빛이 가벼운 구름을 환히 비추는 것과 같다.

隋 時 之 內 善 救 時 若 和 風 之 消 酷 暑
수 시 지 내 선 구 시 약 화 풍 지 소 혹 서

混 俗 之 中 能 脫 俗 似 淡 月 之 暎 輕 雲
혼 속 지 중 능 탈 속 사 담 월 지 영 경 운


울산노동자배움터 동지들의 건승을 기원하며.
2006년 12월 6일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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