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뮌영상] 16th맑스코뮤날레: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새로운 주체형성 - 이은숙 VS 서동진

[16th맑스코뮤날레]
자본주의-가부장체제, 적녹보라 패러다임, 페미니즘

일시: 2013.5.11 15:00-18:30
장소: 서강대학교 다산관 101호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새로운 주체형성 - 이은숙(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는 주체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우선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여성‘은 자궁을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본에 의해 그 생산력을 전유당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자본주의투쟁에서 현재 대표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노동문제의 주체들인 ‘비정규직’을 생각해 보자.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대비되면서 자본에 의해 선규정된 범주의 사람들이다. 정규직과 달리 지금의 화폐중심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대받고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별 구조에서 본다면 남성과 달리 여성이 제대로 자신의 삶이나 노동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고 있지 못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처지에 있다. 이들이 ‘여성’ 범주에 들어간다.

그동안의 사회운동들 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전개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는 노동운동에 대하여 일단 우리는 그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성에도 불구하고 성 모순과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문제 설정을 완강하게 거부함으로써 결국은 자본주의와 자본이 요구하는 자본생산을 가부장적으로 뒷받침하게 되어 자본과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쳇바퀴를 돌고 있는, 가부장체제 내 운동으로 생각한다.

만약에 성 모순을 문제설정하고 현대세계를 성체계+자본주의-군사주의-제국주의를 구성요소로 하는 가부장체제로 보게 된다면 노동운동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사회운동들의 전망이 새로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의 경우, 가부장적 성체계(성노동, 성관계, 성장치) 속에서 자본운동이 이루어지고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성 모순 설정을 통해 자본에 대항할 경우 완강해 보이던 자본의 지배를 해체할 가능성이 크게 열릴 것이다.

(이은숙의 토론문 중에서 발췌)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새로운 주체형성 - 서동진(문화/과학)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주체형성』에서는 운동권 안에 항상 최근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일종의 윤리적 히스테리가 떠오른다. 생태적 가치 존중, 소통을 존중하는 삶 등 여러 단서를 붙여서만 운동을 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그리고 매일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어떤어떤 한에서의 운동이라는. 해서 발제는 “맑스주의자들 당신은 제대로 운동을 하기 위해 이런저런 단서를 지킬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는 식의 물리적인 협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문제와 관련,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큐파이 운동의 경우, 마치 우리가 99%이고 저들이 1%라고 말했지만 왜 아무 일로 일어나지 않았는가. 사회적으로는 최대치에 이르렀는데 정치적으로는 왜 최소치에 그쳤을까. 오큐파이 운동에서 사람들은 빨래는 누가할 것인가에 대해 왜 토론만 벌여야 했을까.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마치 일치하는 걸로 여겨질 때 적녹보라 패러다임이 세 가지 정치형태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사회적 연대의 정치, 동맹의 정치, 접합의 정치(포스트 맑시즘, 몫 없는 자들의 몫, 새로운 정치의 민주주의 발명 등)가 그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주체형성』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성적 적대와 성적 모순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자기 자신의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페미니즘의 끊임없는 히스테리적인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은 어떤 종류의 주체일까. 사회적 주체인가 정치적 주체인가 대체 어떤 종류의 주체인가. 주체가 있어야 연대를 하든 동맹을 하든 접합을 하든 할 테니 말이다. 발제문에 보면 노동에 의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 모든 배제된 종류의 사람들을 여성의 범주로 봐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최근 마르크스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관계의 접합하지 못했던 위기가 문제이긴 하지만, 되돌려서 마르크스주의에게 이러한 성적모순을 고려한 양질의 마르크스를 요구하게 하는 페미니즘이야말로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이유 중 하나는 페미니즘은 사회국가라고 불리는 지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 특정 사회체제 안에서의 자본주의를 염두에 둔 구성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에는 국가정책의 전문가과 테크니션으로 전락한 여성전문가들만 존재한다. 또한  페미니스트는 세계의 경우 유사 사이비 철학자처럼 되어 수행성이 어떻고 성적인 존재가 어떻고를 이야기하며 과도하게 사변적으로 철학화 되어 있다.  

노동과 자본의 적대로 불리는 사회적 관계를 생산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었다면, 페미니스트들의 성적 적대는 어떤 종류의 성적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낼 것인가.  

왜 적녹보라에서는 가족과 시민사회만 얘기하는 것일까.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나. 국가 없는 연대이론이 가능한 것인가. 적녹보라가 정치를 버린 연대의 정치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면, 말 그대로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거기에 국가는 어디에 있는지 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늘 사회를 생산해왔기 때문이다. 국가는 통치화 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연대든 동맹이든 접합이든 ‘주권적 주체’가 되어 변화가 가능하게 싸워야 하며 그 대상이 바로 권력과 국가의 문제인데 적녹보라에게 국가는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서동진의 토론문 중에서 발췌)



코뮌영상네트워크
http://cafe.daum.net/communepictures

[한국인권뉴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코뮌영상네트워크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