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원 칼럼] 박노자 교수에 대한 아쉬움과 노동귀족 문제의 해법

7월 12일자 <프레시안>에 박노자 교수의 글 “고려대 교수, 현대차 정규직 … 둘다 귀족이라구요?”가 실렸습니다. 밑에 그 글을 링크해 놓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느낀 생각을 정리하면서 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제 나름의 해법을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711132316§ion=03

박교수는 제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좋아하는 대표적 진보파입니다. (역시 소련출신으로 한국 문제를 다루는 보수파로 국민대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도 제가 좋아합니다. 북한 전공자로서 조선일보에 글을 쓰지만 합리적 보수파입니다.)

박교수는 예전에 외국인의 신선한 시각으로 한국 문제를 바라보는 좋은 글들을 많이 썼습니다. 특히 인상에 남는 글로는 한국에서 교수와 조교 사이의 잘못된 관계, 요즘말로 하면 갑-을 관계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글을 보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도 좋지요. 선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소련 출신인 그는 언어능력이 남달라 한국어 구사능력도 탁월했고, 다른 외국어도 쉽게 익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하고 있고 지금은 낑낑거리면서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박교수는 저보다 훨씬 쉽게 외국어를 익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근년에 들어와 공공연히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신문사의 공식 칼럼에서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만, 덜 공식적인 글에서는 분명히 사회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일종의 coming-out을 한 것인지 아니면 모두들 사회주의이념을 내던지는 가운데 생각이 거꾸로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는 주체사상파는 아니고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쪽입니다. 참 독특한 경우입니다.

저는 그의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념 주창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발표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글을 통해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문제들에 대해 적어도 가끔씩이라도 생각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희귀종이 되어 버린 사회주의자들은 대체로 제가 알기에는 인간적으로 순수한 분들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잘 모르고 엉뚱한 주장을 하지만, 그 순수성은 높이 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박교수가 오늘 쓴 글에 대해선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수와 시간강사 사이나 거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커다란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번 글은 꼼꼼하게 현실을 조사한 바탕 위에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떠난 노르웨이에서 생활하고 또 사회주의를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이런 식의 오류가 많아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점점 관념적으로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아쉬움을 갖게 만듭니다. 한국의 다른 많은 진보파나 보수파들처럼 현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현실에 자기 이념을 덮어씌우는 식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많은 한국의 진보파나 보수파는 ‘신자유주의’와 ‘종북좌파’ 이외에는 도대체 분석 개념을 갖추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지요. 박교수도 이번 글에서 신자유주의를 가지고 현실을 단순하게 재단했습니다.

박교수가 대학에 관해 한 이야기는 대체로 타당합니다. 다만 몇 가지 정확히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대학도 대학 나름이라, 고려대 교수처럼 연봉이 1억 5천만원쯤 되는 곳은 극소수입니다.

저희 대학은 그보다 훨씬 적고 저희대학보다 적은 곳도 꽤 있습니다. 저희대학 정교수연봉은 현대차 생산직 평균보다 적고, 조교수-부교수-정교수 전체 평균 연봉은 현대차 생산직 연봉보다 훨씬 적습니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박노자 교수는 현대차 연봉에 대해 잘못 알고 있습니다. 현대차의 정규직 연봉은 약 1억원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작년에 저희 학과에서 교수채용 공고를 냈는데, 그 전공에 해당하는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특이한 분야가 아니라 거시경제학 분야였습니다.) 현대차 정규직 지원율이 수백 배인 것과 크게 차이납니다. 저는 이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란 원래 돈보다 자유시간 또는 명예를 선호해서 선택해야 하는 직종이라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돈-권력-명예를 나눠갖지 않고 독점하는 게 문제이지요. 선진국 교수들도 전공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금전 면에서는 그렇게 높게 대우받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아직도 한국교수의 금전적 보상은 지나친 면이 있지만, 개선되어 가는 방향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박교수는 고려대교수와 시간강사 월급을 비교했는데, 비교 방식이 약간 이상합니다. 고려대 교수와는 고려대 시간강사를 비교해야겠지요. 고려대 시간강사료는 몇 가지 등급이 있는데(교육부 “대학알리미” 통계), 평균적으로 2013년 현재 시간당 6만원 정도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주당 9시간을 강의한다면 월 200만원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니 박교수가 말한 금액(120~130만원)보다는 높습니다. 물론 고려대에서 9시간 강의를 맡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비하면 50% 정도 상승한 셈입니다. (현재 국공립대학의 시간강사료는 7만원, 사립대학의 경우는 4.5만원 정도입니다.)

여전히 시간강사의 보수는 매우 낮고 개선되어야 마땅합니다만, 시간강사(비정규교수) 노조의 조직력과 사회적 여론의 힘으로 이렇게 개선되어 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현실을 절망적으로만 보지는 말자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박교수는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귀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하면 1년에 3800시간까지 일하고 한달에 270~280만원 받는 정규직 노동자를 귀족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귀족”의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리 나옵니다. 도대체 육체적인 노동은 사냥 정도밖에 하지 않던 중세의 귀족을 염두에 둔다면 현대차 정규직은 귀족이 아닙니다.

그러나 원래 노동귀족(labor aristocracy)란 말을 엥겔스가 처음 사용했을 때, 그는 이런 중세귀족을 염두에 두고 노동귀족이란 말을 사용한 게 아닙니다. 노동자 계급 내부의 특권층을 지적한 용어입니다.

그런 엥겔스의 정의에 기초할 때 현대차 정규직은 충분히 “노동귀족”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따져 봅시다.

물론 현대차 정규직 모두가 연 3800시간씩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잔업과 특근에 의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중소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도 그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는 많습니다. 현대차 사내하청이나 협력업체를 보십시오.

그리고 작업 중에서도 힘들고 위험한 노동은 비정규직에게 떠맡기는 경우가 흔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명찰도 다르고 실제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업신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정규직을 귀족이라 부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요.

다음으로 현대차 정규직이 한 달에 270~280만원을 받는다고 박교수가 쓰고 있는 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보너스가 없는 달에 잔업이나 특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그렇게 받을 수는 있겠습니다. 또 이것저것 적금 많이 들고 집에 순액으로 그 정도만 들고 가는 달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현대차의 정규직 생산직의 총연봉은 이것저것 다 합쳐서 약 1억원입니다. 이건 언론뿐만 아니라 현대차 직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고, 또 노조 간부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입니다.

이쯤 되면 “노동귀족”이라 불러도 문제없지 않은가요. 그런 노동귀족의 입장이니 그 자리를 자식에게 세습하려고 국민들의 비난을 깔아뭉개고 단체협약을 고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특권의 세습이 바로 귀족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박교수는 비정규직은 한 달에 100~150만원 선을 받는다고 글에서 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부정확한 사실입니다. 청소부나 식당종업원은 아마도 그 정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현대차 비정규직은 그보다는 훨씬 많이 받습니다. 현장 사정에 밝은 전문가에 따르면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연봉은 6천만원이 넘습니다. 그러니 월평균으로 따지면 100~150이 아니라 월 500만원 정도입니다. (다만 이는 잘 나가는 현대차와 관련된 경우이고, 일반적으로 사내하청이나 하청업체 노동자의 경우는 당연히 이보다 사정이 훨씬 못하지요.)

참고로 1차 벤더(하청업체) 정규직의 경우엔 거대기업(만도 같은 경우)은 8천~9천만원, 중규모는 5천~6천만원, 소규모는 3천~4천만원이라고 합니다. 2차 벤더는 2천~4천만원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현대차 비정규직은 그런 대로 괜찮게 받는 편입니다. 이런 대우 역시 비정규직이 노조를 만들어 격렬하게 투쟁한 성과입니다. 하지만 정규직과 거의 같거나 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의 절반 정도밖에 받지 못하니 화가 나고, 그래서 쟁의가 계속되는 것이지요.

제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으로 규정했는데, 이 셋 중에서도 ‘억울함’의 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그게 현대차 비정규직에도 해당되는 것이지요. 차라리 사업장이 다를 경우에는 그런 억울함이 덜하기 때문에 분규가 별로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박교수는 고전적인 사회주의자로서 “우리 노동자들이 다같이, 하나의 함성으로 자본가측에다 ”Basta", "그만“이라고 힘차게 외쳐보자”(Basta는 ‘이제 그만’이란 뜻입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마르크스의 외침이 적어도 현재로선 몽상인 것처럼 박교수의 주장도 몽상입니다. 중소기업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자영업자나 자본가보다 처지가 나은 1억 연봉의 현대차 정규직들로 하여금, 자본가를 타도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하라는 거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노동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찌해야 할까요. 이제는 꽤 여러 사람들이 거대기업 정규직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특권적 지위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뾰족한 대안을 내놓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비판으로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도덕적 비판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도덕적 비판을 하는 사람들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면 달리 행동할 자신이 있나요. 1억원 연봉을 받는 걸 스스로 깍을 자신이 있나요. 그럴 자신이 없으면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일찍이 마르크스도 “도덕적 비판이 아니라 비판적 도덕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달리 말해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게 실현 가능한 대안일까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산별노조를 통한 해결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노동조건이 비슷할 때라야 산별노조가 가능합니다. 이미 노동자 내에서도 귀족-평민-천민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산별 차원에서 임금을 통일적으로 협상하는 진정한 산별노조는 불가능합니다.

실제 노동조건이 그리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보건의료노조의 경우를 봅시다. 여기서 서울대병원노조는 산별조직인 보건의료노조를 탈퇴했습니다. 다른 병원보다는 상대적으로 조건이 나아서 함께 협상하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현격한 차이가 있는 사업장끼리 같이 실질적인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건 거대기업 노동자들이 대부분 혁명투사이거나 아니면 석가-공자와 같은 성인군자이기를 바라는 자세입니다.

거대기업 노동자 스스로 자제하면서 스웨덴 식의 연대임금제도를 도입해주기를 바라는 것 역시 어불성설입니다. 한국과 같은 노동시장의 분단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런 제도의 도입은 가능하지만, 이미 한국처럼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제 해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거대기업정규직이나 공공부문 노동자가 불법을 저지르는 재벌총수나 다른 특권층과는 달리 합법적으로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무슨 범죄집단처럼 비방하는 일은 불필요하고 옳은 일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법적 윤리적 문제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문제인 것이지요. 이런 점을 인정해야 이들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저항이 적어야 개혁이 원활해집니다. 비판을 하더라도 구조적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추자는 말입니다.

그런 전제 하에서 저는 두 개의 그룹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부문과 거대기업입니다. 공공부문(‥공사 등)에 대해선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으며 대신에 민주적 견제가 가능합니다. 쉽게 말해 정부예산이나 감독을 통해 연봉을 조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과거엔 박봉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공무원의 현금보수는 다른 나라나 한국의 다른 직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반드시 아주 높다고 단정짓기는 힘듭니다.

다만 공무원 이외의 공공부문, 특히 금융과 관련된 공공부문의 보수는 납득하기 어렵게 아주  높아보입니다. 아마도 우리 나라 금융부문의 보수가 높고, 그에 견주어 같이 높아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금융관련 공공부문의 보수를 조정할 때, 과연 필요한 인재의 확보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선 제 자신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아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공무원의 직업안정성과 연금제도는 민간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어 고도성장시대가 중성장-저성장 시대로 되고,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직업안정성과 연금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습니다.

또한 과거의 국가주도적 개발체제는 끝났으므로, 인력의 올바른 배분이나 사회적 위화감의 해소를 위해 공무원과 민간부문의 상대적 격차를 조정할 필요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점점 확산되고 있고 또한 가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공무원 보수의 경우 2009년과 2010년에 동결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공무원의 대표직종인 교사들의 연봉은 2007년과 2011년에 걸쳐 1인당 GDP의 2.1배에서 1.7배 정도로 하락했습니다. 그렇지만 공무원들은 단체행동권이 없기 때문에 내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무원의 지지를 일시적으로 잃을 각오를 하면 정권이 공무원과 공공부문의 보수(연금 포함)를 조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정권이 그런 개혁을 해나갈 수 있도록 여론이 조성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공무원과 공공부문의 부당한 특권에 대한 비판적 지적은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거대기업 노조의 경우입니다. 이는 시장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개입할 수 없습니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시대라면 또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경우에 대한 해법은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는 재벌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복지확충입니다.

재벌개혁(“부당한 갑-을 관계 해소” 포함)을 통해 중소기업들의 수익이 향상되면 자연히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거대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부당한 격차도 줄어듭니다. 이게 경제민주화인 것이지요.

다음으로 사회적 복지를 확충하면 역시 거대기업 노동자들과 여타 노동자들 사이의 실질적인 생활격차가 줄어듭니다. 예컨대 거대기업에서는 대학등록금을 회사에서 대신 내줍니다. 그런데 만약 대학등록금이 내려가면 여타 노동자들도 혜택을 봅니다. 그리해서 자연히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줄어드는 것이지요.

이런 걸 ‘사회적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지 확충을 위해선 지금보다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재벌총수뿐만 아니라 거대기업정규직으로부터도 세금을 더 거두면 이것도 노동자 사이의 격차 축소에 기여합니다.

거대기업노조들은 사회적 복지확충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사복지가 사회복지를 대신하니까요. 그래서 이들이 중심이 된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 역시 사회적 복지확충에 강력하게 힘을 쏟지 않는 것이지요.

결국 한국의 거대노조들은 보수파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진보파라고 하기도 뭣한 어정쩡한 존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노동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는 수구파적 성격도 갖고 있습니다. (진보-보수, 개혁-수구의 구분에 대해선 제 책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11장을 참조.)

따라서 노동시장의 개혁이나 복지확충의 문제는 거대노조나 민주노총(한국노총)에 맡겨둘 수 없는 과제로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이 문제를 이끌고 갈 조직된 사회세력이나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민단체가 이런 데 신경을 더 쏟아야 하고, 또 시대를 내다보는 정치인이라면 그냥 복지의 확충이 아니라 노동시장 개혁과 복지확충을 같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사회적 복지확충은 임금격차를 줄여 중소기업에서의 노동자 근속연수를 늘립니다. 그리해서 노동자의 숙련을 향상시키고 따라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면 거대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의 교섭력이 높아지고 정부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높은 임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게 독일 식의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을 낳을 수 있는 기반입니다.

게다가 사회적 복지확충은 ‘좀비’ 중소기업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사회보장이 취약해서 정부가 중소기업을 제대로 구조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복지가 확충되면 중소기업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이것이 바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과노동시간에 대한 규제도 격차 해소에 기여합니다. 예전에 토요일-일요일 특근에 대해서는 주당 12시간이라는 잔업시간 제한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대차-기아차에서는 평일에 잔업을 2시간씩 하고, 추가적으로 토-일요일에 특근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근로기준법의 추가근로 규제 정신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만약에 이 시간을 잔업에 포함시키면, 자연히 현대차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도 줄어듭니다. 그리고 이리해서 연봉은 줄어들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도 개선되는 것이지요.

토-일요일에도 공장 나가서 일하는 삶이 어찌 바람직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부의 규제 변화를 통해 '바람직하지 못한 균형상태'에서 '바람직한 균형상태'로 옮아 가게 됩니다. (게임이론에 관심이 있으면 Nash 균형을 생각해 보시길.)

게다가 정규직의 줄어든 노동시간을 채우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을 고용한다면 일자리 늘리기에도 도움이 됩니다. 현재 국회에 이를 위한 법안이 상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재계는 물론 노동계도 반대하고 있어서 제대로 통과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재계는 고용확대에 부담을 느끼고 있고, 노동계는 당장의 수입감소를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의 노동계는 노동계 전체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현대차 정규직 같은 노동귀족만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노동계의 반대에 대해선, 점진적으로 특근을 줄여나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반발에 대처하면 어떨까 싶습니
다. 그리고 이리해서 노동자들이 당장 금전적으로는 손해를 보지만 삶의 질이 개선된다는 점을 통해 설득해나가야 하겠지요. 시민단체 등에서 바로 이런 문제를 들고 나갈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재계의 반발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대안을 내어놓으면 어떨까요. 예컨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르바이트를 동원해서 공장을 돌리면 노동자 고용을 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르바이트에 대해선 350%의 특근수당을 줄 필요가 없으니 금전적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더라도 이 아르바이트는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선 훨씬 대우가 좋을 것이니 대학생이나 대리운전사 등 응모자는 많이 몰려들 것입니다.

혹시 그런 미숙련자로 공장을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자동차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여름 휴가 때 이런 아르바이트를 동원해 공장을 돌리는 것을 보면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 현대차에서 퇴직한 노동자들을 토-일요일의 아르바이트 근무에 일을 맡겨 지휘감독하게 하면 기술적 애로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유휴인력을 활용하는 효과도 갖게 되니 여러가지로 의미가 큽니다.

사실 토-일요일 특근을 통해 현대차 정규직이 누리는 금전적 이익이 만만찮은 만큼 이를 바로잡으면 "노동귀족 문제의 완화, 아르바이트의 대우 향상, 유휴인력의 생산적 활용"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이 법안에 대해선 노동부에서도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법안은 야당이 아니라 새누리당의 감성태의원이 발의한 것입니다. 물론 민주당에서도 동의하고 있지요. 따라서 보수층의 반발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학계, 언론계, 시민단체에서 힘을 보태면 통과가 가능한 법입니다.

한편 위와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 사이의 격차가 완화되면 기업들의 구조조정도 쉬워집니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에서와 같은 격렬한 저항이 잘 안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건 기업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결국 자본이나 노동 대다수의 win-win 게임입니다. 노동귀족들의 경우도 (노동시간 단축 이외의 경우에는) 직접 자신들의 임금을 깍자고 나서는 게 아니니까 저항하기 힘듭니다.

이처럼 복지를 확충하고 대신에 기업의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회적 대타협입니다. 과거에 언급했지만, 장하준 교수처럼 재벌개혁을 반대하고 복지를 확충하자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사회적 대타협입니다.

요컨대 복지확충과 노동시장 개혁이 상호 맞물려 있는 것이지요.(당연히 재벌개혁도 이들과 맞물려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노동시장을 바로잡고 노동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에서 바로 이처럼 복지확충과 노동시장 개혁이 선순환을 이루었다는 것을 보면 원리적으로 필요하고 또한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박교수의 자본주의 비판과 유토피아적 사고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구체적인 현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며, 현실적인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인물인 그가 이런 과오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겠습니다.

2013.07.12

김기원 (방통대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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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권뉴스 최덕효 대표는 7월 21일 김기원 교수(한국방송통신대학교)와 웹2.0 정신에 의거한 정보공유(홈페이지ㆍ블로그, 언론 미발표분)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김기원 교수는 그간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를 비롯하여 다양한 영역의 문제에 대해 대안 제시와 함께 진보진영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바 있으며,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도 침체된 운동이 일어서는데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김기원: 서울대 경제학과(박사), 일본 동경대 사회과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미국 유타대 객원연구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한국인권뉴스는 김기원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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