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에서는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따위로 시대구분을 하곤 한다. 그리고 고대에서 현대로 내려올수록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인간사회가 발전을 이룩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암흑시대’라고까지 부르며 경멸해 마지않는 서양 중세기의 미신적 신권주의(神權主義)나 ‘마녀사냥’ 식 도덕적 테러리즘이 현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나는 쉽사리 역사발전론에 동의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인 미국이나 한국의 일부 지배 엘리트 사회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는 ‘성에 대한 집단적 히스테리 현상’ 같은 것을 보면 특히 그렇다. 수구적 봉건윤리를 외치는 일부 사회단체나 매스컴은 ‘음란하다’는 막연한 감(感) 하나로, 성의 기쁨을 솔직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패륜아로 몰아 온갖 사회악의 주범인 양 몰매질을 한다. 그리고 ‘성에 대한 이중적 기만’ 심리가 몸에 밴 일부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신이 나서 거기에 동조한다. 이런 몰상식한 선동 행위는 ‘나라 걱정’이나 ‘도덕성 확립’의 가면을 쓴 중세기적 마녀사냥에 다름 아니다.
성문제에 대한 편집증적 모럴 테러리즘 말고도 과거에 우리는 편집증적 매카시즘에 따른 마녀사냥을 겪은 바 있고, 지금도 자학적 금욕주의에 바탕한 ‘쾌락 박멸운동’ 즉 ‘행복 박멸운동’이 수많은 정신질환자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높은 학력을 가진 ‘고상한’ 지식인들이요, 겉보기엔 멀쩡한 지도층 인사들이다) 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정치나 군사 면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삼국지』나 『플루타르크 영웅전』 같은 책을 보면서 우리는 고대의 전쟁이 인명을 경시하는 무자비한 살육전이었다고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휴머니즘이 강도 높게 외쳐진 20세기라 해서 전쟁방식이 더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6천만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되고 6백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되는 등, 고대의 전쟁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살상이 있었다.
원자폭탄의 개발 등으로 무기는 ‘발전’했을지 몰라도, 인간의 삶은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더 비참해졌다. 중국의 삼국시대나 서구의 로마시대 때의 전쟁은 그래도 창과 칼을 갖고서 싸우는 전쟁이어서 오히려 피해가 적었고, 현대전에서처럼 폭탄의 공중투하로 비전투원까지 무차별 살상하는 경우도 없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학’은 발전했을지 몰라도 정치 행태는 하나도 진보한 게 없다. 권력자의 칭호가 바뀌고 권력기구의 명칭만 달라졌을 뿐, 고대나 현대나 정치인들은 모두 쓸데없는 ‘힘겨루기’로만 시종하며 피지배자를 강권으로 유린하는 것이 예사인 것이다.
특히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정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강대국이라고 해서 곧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나라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강대국이란 언제나 국민들의 삶보다는 국가 자체의 ‘힘’에 중점을 두어,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해 보겠다는 동물적 가학욕구로 뭉친 소수 지배자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명제를 내건 대표적 역사학자는 아놀드 토인비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이 명제에 바탕하여 위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증명한 책 『강대국의 흥망』을 썼다. 케네디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쇠락을 예언해 출간 당시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는데, 그는 군사비 지출이 과중하면 국가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미국의 운명을 암울하게 진단했다.
그는 유사 이래 세계의 강대국들이 어떻게 흥망의 과정을 밟았는지 추적하면서, 군사적 야망과 국내 경제력과의 상대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한 나라가 흥할 때 그에 걸맞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쇠퇴 국면에서도 똑같은 규모의 군사력을 유지한다면 몰락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나라는 국력 (경제력)에 걸맞은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힘써야만 몰락을 피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군사력이 과도한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의 쇠퇴와, 그와 반대 입장에 있는 일본의 ‘강대국으로의 부상’을 예언했다.
그는 과거 유럽 역사에서 스페인과 영국이 저지른 잘못을 미국이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참다운 국력은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 문화, 국민성 등 비군사적 부문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군사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성장과 번영을 희생시킬 경우, 다시 말해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배분되어야 할 자원이 지나치게 군사비로 배분될 경우, 그 나라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폴 케네디의 지적은 옳다. 다만 그가 예언한 것처럼 일본이 ‘진짜 강대국’이 될지는 의문이다. 일본 역시 경제발전에 따른 오만함으로 인해 차츰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의 인권이 보장되고 복지정책이 확립된 나라를 ‘진짜 강대국’이라고 볼 때, 일본은 진짜 강대국이 되지 못하고 과거의 전철을 되밟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국가로든 개인으로든, 인간은 ‘힘의 과시’를 위해 자학적 파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역사는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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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