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제롬(Fred Jerom) 지음『아인슈타인 파일』
1. 현명하지 않은 어떤(Ein) 돌(stein)
1953년 6월 13일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X교수가 조언하듯이 시민불복종이라는 부자연스럽고 불법적인 힘을 채택하는 것은 하나의 악을 다른 하나의 악으로 공격하는 것이다”96)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는 이 X를 ‘극단주의자’라고 부르며 만일 “시민들이 X박사의 조언대로 증언을 택한다기보다 감옥행을 택한다면 … 우리의 대의제도는 마비될 것이다”97)라고 주장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은자(hermit)의 나라’에서 미군이 노근리 학살을 자행하고 남북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지옥 같은 전쟁’이 서서히 황혼녘에 접어들 때, 링컨이 암살당한 나라에서 진행되던 일이다.
당시 상원의원 매카시는 X를 ‘미국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그 X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었다. 여기에서 증언이란 상원 국내 안보 소위원회 혹은 하원 비 미국적 활동 위원회에서 자신이 ‘반미국적’이 아니며 ‘반공’에 투철함을 고백하는 ‘사상검증’을 가리킨다. 즉 아인슈타인은 ‘매카시즘이라는 광기’에 복종하지 말기를 촉구한 죄 값으로 남한의 조선・동아와 같은 미국의 유력지로부터 ‘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인류문화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들 가운데 하나이며 물질세계에 대한 ‘인식의 무혈혁명’을 의미하는 E=mc²의 ‘발명자’98)를 「뉴욕타임스」는 ‘몹시 현명하지 못하다’고 중상 모략했다. 이런 중상모략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53년 위의 ‘사상검증’에 소환된 프라우엔글라스에게 아인슈타인이 보낸 서신의 내용이었다.
“… 소수의 지식인들은 이런 악에 대항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간디적 의미에서 비협조라는 혁명적 방식을 … 위원회 앞에 소환된 모든 지식인들은 … 투옥되고 경제적 파탄을, 요컨대 이 나라의 문화적 복지를 위해서 자신의 사적복지를 희생할 각오를 해야 … ”99)
천재과학자로서만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경탄한다면 그의 인격 전체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춘향가’에서 이몽룡이 빠진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에 견줄만한 이 걸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지극히 복잡한 이 세속적 세계에서 이 ‘몹시 어리석은’ 인물을 이해하려면 그의 정치적 활동을 반드시 고려해야한다. 아인슈타인은 수차례에 걸쳐 “나의 삶은 방정식과 정치로 양분 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100)
이 책은 이제까지 간과되어온 아인슈타인의 정치적 활동을 미 연방수사국(FBI)국장 에드거 후버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비밀스런 전쟁’을 통해서 보여준다. 저자는 기밀 해제된 FBI의 ‘아인슈타인’ 파일을 분석하는데 그 파일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3류 추리소설 수준이다. 그런 한편 연방 수사기관과 의회의 ‘사상검증’ 위원회 그리고 이민귀화국의 맹목적 ‘반공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려했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대소 전진기지’로서 남한의 국시(國是)였던 ‘반공주의’와 ‘적색 콤플렉스’ 그리고 KCIA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 유용하다. FBI는 약 1 천만 명의 미국인들에 대한 파일을 보관하고 있는데 저자 제롬의 가족 역시 광범위한 파일의 대상자였던 만큼 저자가 ‘기저귀 찰 적부터 적색분자’라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읽을 만하다.
2. 미국의 반공주의와 파시즘
미국 지배계급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지극히 편협한 정신 상태는 이미 자연과학의 역사에서 불멸의 족적을 남긴 아인슈타인 부부가 나치스를 피해서 미국에 입국하는 과정에 놀랄 정도로 여실히 드러난다.
1932년 12월 초 부영사 가이스트는 비자발급 면담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당에 소속해있거나 동조하고 계십니까? 예를 들면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혹은 무정부주의자 입니까?” 당시 AP 통신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이단 심문’ 같은 것이라고 규정하며 격노했다. 이런 ‘이단 심문’적 반공주의의 망상을 보여주는 것들 중 한 가지가 1932년 11월 22일 국무성에 보낸 ‘여성 애국자 조합’의 서신이다.
“심지어 스탈린 그 사람조차도 아인슈타인만큼 세계혁명의 ‘예비적 조건’과 궁극적으로는 무정부상태를 진흥시키고자, 그토록 많은 국제적 무정부주의 - 공산주의 집단들에 가입하고 있지는 않다 …”
미국의 이민 및 귀화국은 FBI의 도움을 받아 아인슈타인을 ‘바람직스럽지 않은 이방인’으로 규정, 시민권을 박탈하여 추방하려고 비밀공작을 수행했다. 이 기관은 에드거 후버가 주도한 1920년 1월 2일 밤의 ‘파머 기습공작’에 참여하여 외국인 공산주의자 1 만 명을 체포하는 데 한몫을 하기도 했다.
이 책은 자유주의가 ‘그들만의’ 자유에 득이 된다면 파시즘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역사적 증거를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스페인 내전에서 반파쇼세력을 정력적으로 지지했다. 이를테면 그는 1938년 봄 스페인의 반파쇼세력에 대한 미국의 무기수출 금지의 철회를 위해서 프린스턴대학교의 일부 교수들과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런 흐름과 대조적인 것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절대적 신봉자인 미 제국주의 기업의 친 파쇼적 행태이다. 미국의 석유회사들은 무솔리니 세력이 이디오피아를 침략하고 있을 때 호경기를 구가했으며 텍사코는 파쇼 프랑코장군에 대한 연료의 주 공급자였다. 그리고 스탠더드 오일 등은 1941년까지 히틀러의 독일과 사업하여 이윤을 챙겼다.
아인슈타인을 때려잡을 원대한 망상을 하고 있던 후버는 나치스의 비밀보안경찰, 게시타포의 대장 힘러에게 1937년 몬트리올의 세계 경찰대회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1940년 봄과 여름에 아인슈타인 관련 FBI문서를 육군정보국에 보냈을 때 이미 미국 내 나치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후버는 아인슈타인을 ‘스파이’와 연결지으려는 ‘비밀전쟁’을 수행하는 데 ‘흥행대작’으로서 ‘케이블 드랍 작전’을 진행시켰다. 그것의 플롯은 1929년~1932년 기간 극동 소련 스파이들이 베를린 소재 아인슈타인의 집을 케이블 전송지로 이용, 2중 암호 메시지를 모스크바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후버는 정보제공자인 G-2 (독일주둔 육군 정보부대)의 ‘소스(정보원)’의 신원을 파악하여 가능하면 증언해주기를 바랬다. 이에 대해서 ‘소스’는 자기 대신 나치의 게시타포를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 극우주의자들과 나치스의 관계는 2차 대전 후에도 지속된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1945년~1968년 기간에 ‘페이퍼클립 작전’을 수행, 나치에 부역한, 로켓전문가 폰 브라운과 우주공간 의학 전문가 시트루골드를 비롯한 자연과학자 1600명을 미국으로 이민시켰다, 이들과 함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나치정보원들의 영입이다.
즉 미국은 1947년 히틀러의 스파이 총책 겔런을 비롯한 나치 정보원들의 협력과 참여로 CIA(중앙정보국)를 창설하는데 겔런은 소련에 관한 자신의 마이크로필름 파일을 제공했다. 미국의 ‘파시즘 포용’ 정책은 일제의 세균전 실험부대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의 포용 그리고 한국전 발발과 함께 A급 전범을 석방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101)
3. 냉전과 매카시즘 그리고 사회주의
냉전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부터 베트남이 사회주의적 통일을 이룬 1970년대 중반까지의 국제관계를 가리킨다. 이 기간에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과 같은 ‘열전’이 일어났음에도 왜 ‘냉전’ 이라고 부를까?
이 시기 소련과 미국을 각 진영의 맹주로 삼은 양대 진영이 묵시록적인 군사적 대결로 치닫지 않은 것을 ‘냉전’이라고 지칭하는 것인데 이런 ‘공포의 불안한 균형’은 ‘상호 확실한 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 - 미친 -라고 약칭)를 할 수 있는 핵무기의 상호보유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상호이해’ 가운데 1957년 모택동은 자본주의의 궁극적 패배를 초래할 수 있는 가능한 하나의 방도로 핵전불사를 생각하는 한편 미국은 소련의 주요도시 20개에 대한 핵공격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102)
이런 맥락과 관련되는 사건이 ‘푹스’ 사건이다. 미・영・캐나다는 원폭을 개발한 ‘맨허턴 프로젝트’의 모든 연구 성과를 검토, 국가 안보를 저해함이 없이 공개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과학논문의 선별작업을 하기로 합의하여 3국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위원회의 영국측 대표가 푹스였는데 그는 원폭의 기밀을 소련에 넘겨줌으로써 1950년 2월 체포되었다.
후버는 이 푹스를 아인슈타인과 연루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했던 것이다. 이 사건 역시 후버를 비롯한 FBI의 간악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작전을 위해서 정신병자인 독일인 여자 하이네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 해들리 박사를 강요하였는데 그는 결국 FBI의 정보원이 된다.
매카시즘이라는 광기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미국정부는 핵전쟁의 발생에 대비해서 ‘둠즈데이(Doomsday:최후의 심판일) 청사진’103)을 수립, 시행하고 있었다. 즉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스버그 근처 ‘지하 국방성’이나 버지니아주 베리빌 근처 벙커를 비상 지휘본부로 삼고 전국의 상황을 통제한다. 각 가정에서는 원폭피난처를 세웠으며 기업들은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특히 초등학생들은 ‘숨기’가 교과과정의 일부였다.
둘째 군-산-학-연 복합체(Complex)의 가동이다. 국방성은 기초과학 연구에 자금지원을 했는데 195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전자공학 연구자금의 약 85%를 국방성에서 지원을 하였다. 이런 성과는 상용화가 가능한 단계에 민간 사기업에 넘어갔다. 더욱이 메사추세츠 공대의 경우 1960년 정치학과가 경제학과로부터 분리되면서 공공연히 CIA의 자금지원을 받았으며 학생들은 사이공의 빌라에 머무르면서 평정(Pacification) 프로젝트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104)
매카시광풍 시기에 ‘사상검증’ 위원회에 소환장을 받은 사람들은 고발자들이 누구인지로 몰랐으며 따라서 그들을 반대 심문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원의 비미국활동 조사위원회는 기록을 요구하는 고용주들에게 6만명 분에 달하는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1950년 7월 26일 후버는 모든 지부에 맨해턴 프로젝트의 참여자 에드워드 텔러가 공산당원인지 동조자인지를 결정해서 보고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사실 텔러는 헝가리 태생으로 1919년에 일시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집안이 몰락하였고 이후 소련 공산주의에 비타협적인 입장을 평생 고수하게 된다.105) 그는 원폭 보다 10배나 가공할만한 수소폭탄의 개발을 지도했으며 레이건 행정부의 ‘별들의 전쟁’의 입안자이기도 했다.
그는 1954년 매카시즘이 절정을 이루었을 때 맨해턴 프로젝트의 ‘과학의 정치가’106)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불리한 증언으로 크나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원자력위원회의 청문회는 “정부가 그 자체의 영혼 그리고 정부와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어떠한 개인의 영혼도 탐색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20세기 미국의 ‘이단 심문’의 광기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미시시피의 파시스트 청년들은 “칼 마르크스를 불태워버려라! 프로이트를 불태워버려라!”라고 외치며 ‘금서들’을 불살랐다.
아인슈타인은 1949년 5월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적 『월간평론』창간호에서 “왜 사회주의인가?”107)를 기고했다. 그는 사회악의 진정한 뿌리가 ‘경제적 무정부상태’에 즉 ‘합법적인 경제적 잉여의 착취’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비극적 상황의 유일한 타개책으로서 그는 ‘사회주의 경제의 수립’을 주장한다.
이것과 함께 필수불가결한 것이 교육개혁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능력개발 뿐만 아니라 상호부조의 이상을 지향하는 것으로 권력과 성공을 영광시하는 가치관을 대체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소련의 ‘현존 사회주의’를 의식한 듯 계획경제가 개인의 완전 노예화와 함께 진행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관료주의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적 난제의 해결이 사회주의에 중대함을 강조한다.
아인슈타인이 이해하는 사회주의에는 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목표가 있다. 현실적 위기의 성격은 이기주의에 갇혀 개인주의적 생존이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은 학교교육과 언론・출판을 통해서 경제적 자유주의의 ‘무자비한 무한 경쟁’과 ‘능률’ 그리고 이것을 통한 개인적 ‘성공’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교육의 목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사회에 봉사’하는 것임을 천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의 사회주의관은 종교관과 함께 이해해야한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감정 혹은 정서와 사고, 행동 그리고 궁극적 목표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데108) 개인주의의 극복방안으로서 ‘우주적 종교감정’109)을 제시한다. 그의 종교관은 스피노자의 철학에 기초를 둔 것인데 아인슈타인의 윤리적 성찰은 별도의 글로 다뤄야한다.
생각하건대 아인슈타인을, 진정으로 선량한 인도의 민중이 간디에게 수여한 ‘인격의 왕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투쟁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인 ‘사상의 자유’에 책임 있는 행동으로 ‘용기’라는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바로 자유 중의 자유를 ‘생물’로 확인시키고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주
96) 로널드 클라크, 『아인슈타인 : 삶과 시대』(더 월드 퍼블리싱 컴퍼니, 1971년), 598면.
97) 프레드 제롬,『아인슈타인 파일』(세인트 마틴스 출판사, 2002년), 241면(이 서평의 면수는 번역서가 아니라 이 영문판의 면수임).
98) ‘발견자’가 아니라 ‘발명자’라는 용어는 물리학적 개념 그리고 실험을 비롯한 경험의 관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인식론에서 비롯한다. 삐에르 뒤이이예, 『아르키메데스로부터 아인슈타인까지』(파리, 페이야르, 1988년), 353~354면.
99) 앞의 제롬의 책, 239면.
100) 앞의 책, 서론, 22면.
101) 필자의 “생명공학 : 생명에 대한 공(恭)학인가 공(恐)학인가”, 『진보평론』.
102) 에릭 홉스보옴, 제8장 냉전, 『극단의 시대』(빈티지 북스, 1996년), 229면과 233면.
103) 『타임』, 1992년 8월 10일자, 24~31면.
104) 노움 촘스키, “냉전과 대학교”, 쉬프린 편집, 『냉전과 대학교』(뉴 프레스, 1997년), 181-183면.
105) 앨런 라이트먼, “에드워드 박사와 텔러씨”, 『연구』(파리, 2002년 12월호), 60~69면.
106) 제럴드 홀턴, “오펜하이머 재판”, 『아인슈타인, 역사 그리고 여타의 열정』(전미 물리학 출판사, 1995년), 205-220면. 그는 매력적인 천재의 전형이랄 수 있는데 심지어는 중국어, 산스크리트어까지 진지하게 연구했다.
107) “왜 사회주의인가?”, 자크 메를로-퐁티와 프랑스와즈 발리바르 편집, 『아인슈타인 선집 제5권 : 과학, 윤리, 철학』(파리, 쇠이유와 국립과학연구센터, 1991년), 181-186면.
108) “절박한 도덕적 요구와 그것의 기원”, 앞의 책, 177-181면.
109)“목표‘, ”종교와 과학“, 앞의 책, 165-167면 그리고 155-158면.
▒ 출처:『진보평론』2003년 가을호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저서: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 영역: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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