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거목이 은둔한지 5년이란 세월이 안타깝게 흐르고 있다. 서준식 선생, 그는 날조된 ‘학원(서울대) 침투 간첩’으로 17년(7년 만기, 미전향 이유 10년 추가)을 감옥에서 보낸 후 사회에 나와 △사회안전법 폐지 여론화 △비전향장기수 문제 에 대한 여론화 △ 강기훈 씨 ‘유서대필’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 △92년 인권운동사랑방의 설립 등 인권운동의 저변확대와 대중화에 온몸으로 헌신했다.
그의 은둔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인권운동의 범위와 방법론>을 놓고 동료들과 갈등을 빚다 인권운동사랑방을 탈퇴(2004년)한 것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에 대해 서준식은 자신의 책 『서준식 옥중서한』에서 “사실상 (인권운동사랑방 후배들로부터) 쫓겨난 것”이 “지금도 치명적”라고 적었다. 그의 나이 65세, 한참 일할 나이에 서준식의 은둔이 주는 운동적 화두는 무엇일까.
이를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설립 5년차인 1998년,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10주년 기념토론회에서 '진보적 인권운동을 위하여-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 인권운동의 한 초상'이란 제목으로 발제한 서준식의 생각을 되새겨보는 것은 운동의 진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준식은 발제에서 “인권운동은 ‘진보’를 뚜렷이 자각하는 운동으로 재편성됨으로써 진정 인간의 존엄 실현과 인간해방을 위하여 복무하는 운동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여성, 장애인, 정신대, 북한동포돕기> 운동에 대해 그 성과와 함께 ‘운동 전망’과 관련한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네 분야의 ‘부문운동’에 대해 “이들 분야의 성공은 전체 인권운동에서 볼 때 다소 특수한 예”로 “이들 운동 당사자들의 열성과 헌신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여성과 장애인 분야 경우는 막강한 이익집단의 압력을 배경으로 이들과 정치권을 이어주는 튼튼한 파이프를 십분 활용한 데서 오는 성공이었”으며 “정신대와 북한동포돕기의 성공은 우리 국민들이 가진 열렬한 민족적 정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지적한다.
'여성, 장애인, 정신대, 북한동포돕기'는 행복한 운동
활동가들, 소수자 인권보다 자기 단체 유지 급급한 수준
또 “사안의 성격상 이 네 분야의 운동은 초기 동력만 붙는다면 보수언론을 포함한 광범위한 기득권층을(심지어는 ‘인권’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정상배마저도!) 쉽게 끌어들일 가능성을 가진 ‘행복한’ 운동”으로 “이런 조건은 실용적으로 생각할 때 이들 운동의 분명한 이점이지만 동시에 대중의 진정한 고통의 원인을 증언하면서 현실의 구조를 넘어야 할 운동의 사명을 명심할 때 언젠가는 결별해야 할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참여연대 등의) 작은 권리 찾기 운동은 90년대 이후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에 편승, 영합하는 기회주의적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운동단체들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활동가들이 정신없이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많지 않고 소외된 소수자의 인권을 위하여 기동적으로 헌신한다기보다 대체로 자기 단체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수준”이라고 밝힌다.
서준식은 “(운동조직이) 자신의 단체의 주관심사가 아닌 사안에 대하여는 대단히 소극적”이며 이는 “민중으로부터 외면 당할 수밖에 없는 자기만족적인 운동구조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권운동이 사회권을 계속 외면할 때 그것은 언젠가는 한국의 인권운동 전체로서 ‘진보’에 역행”하게 될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당시 운동 10년차였던 서준식 선생이 인권운동사랑방 후배 등 운동진영과 충돌하며 고뇌했던 지점을 간접 시사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시효가 완료된 ‘87체제’ 버전이 다분히 내포된 현 시기 진보좌파운동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는 특히 운동이 권력화로, 사유화로, 그리고 생활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단체와 활동가?들에게 해당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서준식은 총체적이고 전역적이어야 할 운동이 부문의 조직이기주의와 지역에 갇힌 데 대해 은둔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87 체제’와 기회주의 신기득권층은 가라 !!“
서준식 선생 연보
1948년 일본 교토 출생
1967년 고교 졸업 후 한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 법학과 입학
1970년 둘째 형, 서승과 함께 북한 여행
1971년 서승과 함께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됨
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판결
1978년 징역 7년 만기와 동시에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 결정
1980년 교도 당국의 처우에 항의, 18일 간 단식 투쟁
1987년 사회안전법 철폐와 석방을 요구하며 51일 동안 단식 투쟁
1988년 석방.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 전개
1989~1991년 민가협 공동 의장
1991년 6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관련 구속
1991~1993년 강기훈 공대위 집행위원장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 창립
1993~1995년 전국연합 인권위원장
1996~1997년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레드헌트> 상영으로 구속
1997년 KNCC 인권상 수상
2004년 인권운동사랑방 탈퇴
2005년 독일 행
2007년 함부르크대 철학과 입학
2008년 귀국
1948년 일본 교토 출생
1967년 고교 졸업 후 한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 법학과 입학
1970년 둘째 형, 서승과 함께 북한 여행
1971년 서승과 함께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됨
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판결
1978년 징역 7년 만기와 동시에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 결정
1980년 교도 당국의 처우에 항의, 18일 간 단식 투쟁
1987년 사회안전법 철폐와 석방을 요구하며 51일 동안 단식 투쟁
1988년 석방.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 전개
1989~1991년 민가협 공동 의장
1991년 6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관련 구속
1991~1993년 강기훈 공대위 집행위원장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 창립
1993~1995년 전국연합 인권위원장
1996~1997년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레드헌트> 상영으로 구속
1997년 KNCC 인권상 수상
2004년 인권운동사랑방 탈퇴
2005년 독일 행
2007년 함부르크대 철학과 입학
2008년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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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