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때는 2001년 1월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경기도 북부. 포천의 동물고아원에서 상주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 멘탈 상황이 불안정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환청과 환시가 매우 심하기도 했고. 동물들과 지내며 나름 복구해보자 시도하던 때였는데. 포천 그 깊은 산속의 컨테이너 숙소에서 지독한 피비린내와 역겨운 냄새들이 괴롭혔다. 그 냄새의 진원지를 모를 리 없다. 어디에나 있으니까. 무언가 거대한 것이 몰려오는 그 느낌. 참혹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1993년 대학시절. 동두천의 미8군부대가 있는 동네에서 당시 홍대총여학생회와 함께 '기지촌활동'을 하였다.)
포천 청산고개의 그 산자락에서 버스를 한번만 타면 동두천 미군부대 앞에 갈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버스를 잡아타고서 동두천에 내려 물 두 병을 샀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의 가장 큰 미군부대가 있는 그 정문 앞에서 물을 뿌렸다. 그리고 '미군아 이 땅을 더럽히지 말고 물러가라'고 외쳤다.
정문에서 수위들이 나와서 제지를 하였고, 내 수첩을 이리저리 뒤져서 나의 가족에게 연락을 하였다. 미군부대 앞에서 그렇게 추운 겨울 몇 시간을 앉아서 “미군아 물러가라” 목놓아 부르짖다 지치는 동안 부대 앞을 지나가는 버스의 미군들이 “크레이지”라며 조롱하고 알아듣지 못할 상스런 말들을 내뱉고는 지나갔다.
그날 큰오빠 부부가 미군부대 앞까지 데리러 와서는 그리고 남양주의 모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어디 공기 좋은 곳에 요양하러 가자며 산으로 산으로. 그렇게 미친자 취급을 받으며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 병원을 퇴원 후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전신마비가 수개월간 지속이 되었는데,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만 있었다. 문밖에서 언니와 어머니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는 “정하를 정신병원에 보내자, 평생 가둬두자” 하였다. 돈은 형제들이 모아서 보태주겠다 하고.
그 소리를 들은 직후부터 치사량이 될 때까지 약을 모았다. 그리고 어느 날 약병을 발견한 어머니는 오열하셨다. 참으로 지금도 묻고 싶다. 내가 정말 미쳐서 그랬겠는가?
(나는 강제감금 시설에서 '운동'을 하다 가족들의 몰이해나 이해관계로 끌려온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의 정신병원과 각종 강제감금 시설에는 이런 사례가 비일비재할 것라고 판단하며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 이정하 활동가(3D애니 컨텐츠 개발자)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자주적인 자립의 실험을 위해 준비 중인 파도손 문화예술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강제감금실/공식명칭 CR실 - 이정하 그림)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