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실천의 여러 갈래는 우리 주변의 세계, 특히 현대에 있어 경제적 특성을 분석하는 정치 철학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특정 정치 철학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정치적 실천을 이끈다.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특정 국면에서는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정치적 실천에 애로가 될 수 있지만, 이것이 그 정치 철학에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 자체는 위기가 아니다. 정치 철학의 위기는 내부 모순이 있을 때, 즉 제시하는 목표가 그 철학이 믿는 다른 어떤 특징과 논리적으로 충돌할 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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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정치 철학이 제시하는 사회주의 목표가 현재 국면에서 다소 달성하기 어려워졌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좌파의 현재, 즉 좌파의 약화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위기를 불러 온 것은 아니다. 반면에 자유주의라는 정치 철학은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제시하는 목표가 자유주의 자체가 소중히 여기는 세계에서 논리적으로 성취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다시 말해,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 논리적 모순이 있으며, 이에 대해 자유주의는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직면한 위기는 바로 이러한 성격의 근본적 위기다.
근대 자유주의는 전간기의 자본주의 위기 동안 볼셰비키 혁명에 대응하여 개발되었으며, 자본주의를 초월하지 않고도 그 위기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유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했다.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와 국가 개입으로 조절된 자본주의의 결합이 인간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틀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의 제도 하에서 국가는 계급 국가가 아니라 사회적 "합리성"을 대표하며, 다른 어떤 제도적 틀보다 더 잘 수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자발적 작동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오작동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오작동이 아닌 경우에도 사회적 합리성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이 자발적 작동을 조정하기 위해 경제에 개입할 수 있다. 영국 경제학자 케인스가 큰 역할을 했던 이 자유주의를 케인스는 "새로운 자유주의"라고 불렀으며, 국가 개입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려 했던 이전의 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와 달랐다. 구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경제가 항상 "완전 고용" 상태에서 작동한다고 잘못 믿었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는 그것이 구성하는 제도적 틀 내에서 타당성 여부를 따지지 않더라도 (제국주의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등 여러 이유로 전혀 유효하지 않다) 자본, 특히 금융 자본이 세계화할 때 그 유효성을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우리는 본질적으로 민족적인 자본을 관장하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세계화된 자본과 대결하는 국민국가를 갖게 되고, 그러한 대결에서 국민국가는 자본의 도피를 촉발할까 두려워 세계화된 자본의 요구에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장 열렬한 '새로운 자유주의자'도 인정하듯이 국가가 사회적 합리성의 화신으로 행동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자유주의의 전제는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과 해당 국가에서 기원한 자본이 작동하는 영역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케인스가 글을 쓸 당시와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가정은 유효성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세계화된 자본이 그런 행동에 동의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국가의 행정부가 여론의 압박을 받아 사회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조차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위기의 뿌리는 세계화 현상에 있지만, 이 위기는 대규모 대중 실업이 나타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위기 국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는 케인스가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문제로서, 국가의 개입을 통해 극복하지 않으면 볼셰비키식 혁명에 취약한 체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를 괴롭히는 과잉 생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케인스가 제안한 '수요 관리(demand management)'의 추구는 더 큰 국가 지출이 위기의 만병통치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노동자 계층의 희생으로 세수를 늘려 추가 국가 지출을 조달하는 것은 총수요를 증가시키지 못하므로 위기를 완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수요 관리를 위해서는 부유층의 희생으로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거나 추가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더 큰 재정 적자를 통해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그러나 추가 국가 지출에 도달하는 이 두 가지 방법, 즉 부자 증세와 재정 적자 확대는 모두 세계화된 금융 자본에 의해 억제되고 있으며, 따라서 위기에 대한 국가의 재정 개입 여지를 없애버린다. 물론 국가는 통화 정책을 통해 개입할 수 있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통화 정책은 매우 무딘 수단이기 때문에 민간 지출을 늘리기보다는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부추겨 위기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내에서는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없으며, 케인스의 '새로운 자유주의'는 도태되고 말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막다른 길이나 교착 상태는 자유주의 정치 철학의 위기가 된다.
이러한 막다른 길에 진입한 경제는 유럽의 사례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EU 국가(당시 15개국)의 실업률은 장기간 3% 미만을 유지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실업률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7% 이상을 유지해 왔으며, 국가의 개입으로도 실업률을 낮추는 데 실패했다.
세계화된 자본과의 대결에 직면했을 때, 단일 국민국가가 개입하여 총수요를 늘리고 실업률을 낮출 수는 없기 때문에, 세계화된 금융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 통제를 시행하거나 (모든 국가가 비슷한 국가 지출을 확대하므로) 다른 국가와 함께 재정 부양책을 시행하여 수요를 확대하는 국가로부터 자본 이탈을 견제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본 통제는 결국 무역 통제를 필요로 하며, 이는 자본과 상품 및 서비스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흐름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본 성격을 침해하는 것이다. 국제 금융 자본은 이를 사활을 걸고 반대할 것이므로, 이러한 과정은 독점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프로그램에 국한되지 않는 대안적인 계급 동원을 필요로 하다.
두 번째 방법은 모든 국가에 걸쳐 진정으로 조정된 (공동의) 재정 부양책이 되려면, 주변부를 지배하려는 경향이 내재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보여줄 수 없는 정도의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기껏해야 주변부에 재정 긴축을 강요하면서 중심부 내에서 조정된 재정 부양책을 도입할 수 있지만, 이는 제국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를 시도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제국주의 강화를 자유주의가 인정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유주의의 패배, 즉 인간의 자유에 대한 비사회주의적 대안으로 제시한 자유주의의 패배를 의미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위기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의 딜레마이다. 대규모 실업으로 임금이 하락하고 노동 조건이 전반적으로 침체하거나 악화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내에서 자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초월하지 않고는 이러한 물질적 현실을 극복할 수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계급 동맹이 필요하다(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로 회귀하자는 이야기는 독점 자본주의의 병폐를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항상 신화적인 '자유 경쟁 자본주의'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조롱했던 것이다). 실업률 감소를 위한 중심부 국가들 간의 조정된 재정 부양책을 묵인하고 주변부를 그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배신이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실패했다. 케인스주의, 즉 새로운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함께 도탄에 빠졌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외피에 갇혀 있는 경제를 현재의 침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다른 버전의 자유주의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원문] https://peoplesdemocracy.in/2024/0512_pd/crisis-liberalism
[번역] 참세상 번역팀(일부 기계번역의 도움을 받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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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서 가르쳤다. [참세상]은 이 글을 동시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