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세상은 복잡하고 힘들고 괴롭다. 오늘 뉴스만 봐도 그렇다. 서울 전셋값은 폭등세로 돌아섰다 하며, 지속되는 인플레이션 가운데 식품 가격 줄인상, 신촌 구로 등지에서 또 발생한 100억대 전세 사기 등의 뉴스가 이어진 가운데, 올 여름은 역대 가장 최고로 더울 것이고 장마와 태풍 역시 역대급일 거라는 예측이 쏟아진다. 그런 뉴스들을 넘겨보다가 갑자기 속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1차 전지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발생한 폭발, 화재 사고로 출구를 찾지 못한 노동자 22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뻘건 화염과 총소리를 방불케 하는 폭발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폭발 파편의 영상이 속속 올라온다.
기후 비상사태, 에너지 식량 경제 위기, 사회경제적 불평등, 후퇴한 민주주의 등의 큰 얘기들까지 꺼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미 힘겨운 일상과 노동, 그리고 불안의 하루 하루 가운데 그 같은 현실을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웰빙, 행복, 건강의 뜻을 함축한 ‘웰니스’(wellness)라는 말이 열풍이라는 그 반대편에 2000년대 이후 20여 년이 넘도록 증가 추세였던 자살률도 그 사회적 통증이 드러난 현상일 것이다. 매일 3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나라에서 자살은 사망 원인 4위인데, 그중 10~30대 연령 집단 내에서는 암, 심혈관계 질환 등을 제치고 사망 원인 1위라 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률은 줄곧 증가 추세였다. 별로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은 1980~90년대 자살률이 연간 10만 명당 10명이었던 데 반해 1997년 IMF 이후 자살률이 치솟으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 자살률은 10만 명당 30명에 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한국 자살률은 OECD 국가 중에서 거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임을 자랑하고 1인당 국민소득 3만 5,000달러 시대의 한국 사회임에도 이렇게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바로 그 높은 국민소득을 얻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 점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또 OECD 자살률 1위는 OECD 합계출산률 꼴찌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살고 죽는 일이 다 사람의 처음과 끝에 위치하고 있는 일일진대, 살 만한 세상이 아닌 이 나라의 삶과 죽음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출구를 찾지 못해 화염과 연기 속에서 질식 당해 죽음을 당한 노동자들의 뉴스가 깊게 와닿는 이유도 우리가 같은 조건의 방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쉼’ 없는 사회의 불안감과 우울감
서울 은평구의 한 마을에서 연구자로 살고 있는 저자 이승원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면서도 우울감으로 가득하고 불안으로 내몰리는 원인을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에는 불안감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쉼’이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존엄한 쉼’이 우리의 존재를 지속시킨다는 의미를 담은 “레퀴에스코 에르고 숨”(Requiesco ergo sum 나는 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공재, 커먼스, 자기결정권, 자원접근성 등의 개념이 필요하고 그 결과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의자’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쉼’이라는 것은 그냥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정지 운동’이 필요한 것인데, 정지停止, 즉 멈추기 위해서는 관성에 대한 반작용만큼의 힘이 필요하고 동시에 정지는 새로운 힘을 모으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한 멈춤과 ‘쉼’의 의식적 노력이 없는 가운데 사람들은 잘 살려고 할수록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해 자기 계발에 몰두하거나 소비와 레저를 통해 풍요로움에 도취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은 소수이기에 존재적 박탈감은 피할 수 없다. 그 결과 미래의 노동을 담보로 빚을 내 욕망을 실현하고, 또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금 ‘쉼 없는 노동’과 ‘불안정한 노동’에 자신을 밀어넣는다. 무한 순환의 무간지옥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자살에 내몰린 사람들의 절규에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외침을 부르짖는 정당, 사회운동 조직, 단체, 사회적 기업 등이 있지만 그리고 온갖 개혁 담론이 오히려 넘쳐나고 있지만, 저자가 보기엔 그것은 ‘살려달라’는 외침에 그저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묻는다. 난파 당한 배에 구조선이 닿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승객들 스스로 이용할 수 있는 구명보트와 구명조끼가 충분히 있고 그들 스스로 그것을 직접 관리, 이용할 수 있으면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커먼즈, 우정과 환대의 출구를 향하여
저자는 난파 상황을 예비해 배치해 둔 구명보트와 구명조끼 같은 것을 일컬어 커먼즈(commons)라 말한다. 커먼즈는 누구든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고 향후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보상해도 되는 모두의 공동 ‘자원’이자 ‘결정권’, ‘집단’을 일컫는다. 커먼즈는 중세 유럽, 영주에게 소유권이 있으나 지역 주민들이 공동 관리, 사용했던 목초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이야기는 올해 초 출간돼 화제를 모은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한디디 지음, 빨간소금, 2024)로 이어질 수 있다. 한디디는 ‘커먼즈’가 공유지, 공유재, 공동자원 등으로 번역되다가 그냥 ‘커먼즈’로 불리는 건 온전히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히려 ‘커먼즈’는 다양한 비유들로 더 잘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 이승원은 그래서 마을의 우물, 공동 수로, 함께 쓰는 정자나 상여, 그리고 구명보트와 구명조끼, 계나 품앗이 같은 사회적 관계망, 협동조합의 자산과 규칙 등의 비유를 들고 있다.
커먼즈 담론은 내가 이해하기론 늘 미래로 유예되는 해방의 시점을 현재로 가져온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맞이하는 위기와 문제 순간을 자본이 포획해내도록 두지 않게 해준다. 자본에 포획되면 그건 더 많은 불안, 노동, 부채의 무한순환 루프에 갇히게 되는 반면, 커먼즈를 통한 스스로 해결하는 길을 걷는다면 해방의 출구를 지향하는 더 많은 관계망, 자원, 권한을 얻게 된다.
개념 상자 연결하기
이 책은 200여 쪽의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그 밀도는 결코 짧지 않다. 단순히 현대사회의 문제 현상을 진단하고 커먼즈라는 중간 기착지를 건너 ‘무엇을 할 것인가’로 나아가는 구조는 아니다. 수많은 논자, 저자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들의 독특한 개념과 논리를 서로 연결시킨다. 그것을 짧은 서평에 축약하기보다는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게 이 책의 특징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이름들을 생각나는대로만 적어보자면 아이작 아시모프, 알베르 까뮈, 브랑코 밀라노비치, 천정환, 김태환, 프란츠 카프카, 애거서 크리스티, 한병철, 지그문트 바우만, 조르조 아감벤, 마사 누스바움, 한나 아렌트,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캉, 폴 라파르그, 알랭 드 보통, 프랑크푸르트 학파, 프란츠 파농, 푸코, 이반 일리치, 김종철, 어슐러 르귄, 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허먼 멜빌 등이 잠깐씩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글루미 선데이>나 <오발탄>, <나의 아저씨> 같은 영화와 시, 드라마, 노래도 저자의 사유가 걸어가는 데 디딤돌이 되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론, 사상가, 예술가, 작품들을 이해하거나 외워야 하거나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정답지도 아니다. 읽으면서 그냥 흘러가면 된다. 그보다는 이렇게 많은 개념과 이론과 논리를 연결해 어떤 길을 모색하는 사유와 글쓰기의 흐름, 특히 1인칭의 시점에서 쓰는 글쓰기의 흐름이 최근 들어 참 보기 드물었는데, 오랜만에 그런 책을 읽어서 반가웠다. 가히 ‘논객의 시대’였던 2000년대 초중반을 떠올리게 한다. 찬반과 호불호와 친소 관계는 달랐지만 싫건 좋건 그들의 책들이 널리 읽혔던 시대였는데 지금은 그 2000년대의 논객들, (이라고 쓰고 남성 지식인이라 읽어도 무방한) 그들은 대개 선거판의 기호에 포개진다. 그들은 (홍세화의 표현을 거칠게 흉내낸다면) 좌파의 논리를 폈지만 좌파의 삶을 살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책을 들고 부박한 시대를 건널 수 있었던 건 그나마의 개념, 이론, 도구 상자들을 갖고 실제와 현상에 연결해 이런 저런 실천과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 노력, 흐름이 결핍된 것 같은 느낌이다.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또는 흘러가야 하는지, ‘운동’의 현재와 미래가 뿌옇고 불분명한 때도 없던 것 같다. ‘정권 타도’를 외치는 소리야 언제나처럼 있지만, 그 레토릭의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제도 정치의 표나 지지율로 쉽게 포획되어 버리는 그 거리의 움직임을 ‘운동’이라 부르기는 참으로 난망하다. 야당(들)로 환원되어 버린, 그나마도 2년 후로 유예된 정치 일정 말고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대중운동의 각급 단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총합(‘총합’이 성명서의 마지막 요구사항처럼 그저 나열되기만 하면 되는 건지 뭔지도 불문명하지만)을 ‘운동’이라 하기도 그렇고, 또 그 다양다종한 ‘각론’의 풍부함과 복잡함이 다 따로 헛도는 듯한 느낌도 버릴 수 없다. 법안으로 번역되는 사회운동의 요구와 의제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되어 버린 게 아닌지 씁쓸할 때가 있다. 그건 우리가 상상하는 해방의 기획조차도 현실적 힘과 한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책읽기의 시간만이라도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과 이론, 상상의 도구들을 갖고 이 사람, 저 사람, 이 개념, 저 조직 등을 버무리고 연결시켜 새로운 걸 창안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는 데에 이 책도 하나의 참고지가 될 수 있겠다. 정자가 놓여 있는 느티나무 아래 무더위를 식히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공유지에서의 ‘쉼’처럼, 방향성을 갖지 않는 사유의 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그 같은 독서 경험을 갖는 쉼에 될 수 있기를, 책읽기가 쉬면서 강해지는 담금질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다시 언덕길을 오를 힘을 얻는 정지운동의 계기가 되기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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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돌규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