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미국의 탄생
미국의 테일러(Taylor)는 ‘과학적 노무관리’를 통해 생산과정을 장악함으로써 생산성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Taylorism). 이러한 방식의 생산관리는 이른바 ‘포드주의(Fordism)’를 통해 기술적으로 구현되었다. 포드주의는 자동차 생산공정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대 노동과정의 통제와 지배방식의 원형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는 미국인들에게 ‘예측 가능한 삶’을 제공했다.
생산양식의 변화로 말미암은 ‘예측 가능한 삶’은 여가 시간을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소비와 연결되었다. 좁게는 먹거리, 주류, 패션 등에서부터 넓게는 디지털미디어, 해외여행 등 인류가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의 보폭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쟁과 분쟁 대한 지원과 개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미국은 오랫동안 경제 대국의 호황을 누렸다.
요컨대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 유럽경제의 미국 의존도는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자금 유동성이 풍부해진 미국의 기업들은 유럽의 전후(戰後)지원으로 인한 수출을 늘렸고, 이는 미국이 세계적인 금융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주요한 기여를 했다. 위대한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 시기 뉴욕(미국 동부)의 한 풍경을 포착한 소설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이다.
풍요의 시대 '천상의 눈'-스페인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자란 미국 화가 프랜시스 쿠가트(Francis Cugat,1893~1981)의 작품 ‘천상의 눈(Celestial Eyes)‘. 위대한 개츠비의 초판 표지로 썼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도서관 소장. 출처 : 위키미디어
위대한 개츠비
미국 중서부 도시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개츠비는 장교가 되어 일하다가 미모의 여성인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개츠비가 유럽으로 떠나자 둘은 헤어지게 된다.
이후 데이지는 시카코 출신의 부잣집 아들인 톰과 결혼한다. 종전과 함께 귀국한 개츠비는 데이지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재산을 모은 뒤 미국 동부에 있는 데이지의 집 근처에 호화주택을 짓는다. 연일 파티를 벌이며 호화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던 개츠비는 소설의 주인공인 닉을 만나게 된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구요? 아뇨, 가능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가 나를 사랑했던 시절처럼요.”
개츠비는 지난날 데이지와 함께 나눴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데이지와 함께(라고 믿었다) 꿈꿨던 모든 물질적 풍경과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한다. 개츠비의 저택에는 연일 오케스트라가 울려퍼지고,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밤을 새워 춤추고 노래한다.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있어서 모든 꿈을 이루기 위한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개츠비는 그 꿈을 위해 그 어떤 어둡고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고, 닉을 통해 데이지와 재회하기 위한 계획을 꾸민다. 개츠비의 아메리칸 드림은 성공했을까?
위대함의 역설
닉은 개츠비의 삶과 엮이게 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어딘가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남발했고, 관심 없는 것에 대한 관심을 연기했다. 최고급 시설의 호텔에서도 반드시 불편함을 발견하고,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찾아 헤맸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데이지는 결혼한 남편에게 정부(情婦)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행한 삶을 지속한다. 화려한 삶이 주는 안락과 쾌락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치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욕망의 굴레를 감각한 닉은 누구나 꿈꾸는 세계(화려하고 안정적인 삶)에 대한 의심과 환멸을 품게 된다.
마침내 개츠비의 야심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개츠비의 ‘아메리칸 드림’은 개츠비의 쓸쓸한 장례식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닉은 동부를 떠나며 개츠비가 종종 마당에 나와 바라보던 데이지 저택의 불빛을 떠올리고는 개츠비와의 지난 날을 회상한다.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철저하게 그들과의 냉소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모호한 표현이나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피츠제럴드의 특성 때문인지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에서 번역 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어쨌든 위대한 세계의 실상은 실망스러울 가능성이 높다. 위대하다는 말은 좀처럼 현실로 구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구호로 유명해졌다. 트럼프는 미국의 위대함을 앞세워 당선되었다. 트럼프가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민자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이라는 환상 미국 그 자체적인 욕망의 울타리를 방어해줄 적임자는 자명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가 명명한 위대함은 피츠제럴드가 얘기하는 위대함과 같은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트럼프의 당선에 누구도 쉽사리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못하고 자신 또는 자국의 계산기에 골몰하는 오묘한 풍경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개츠비적 위대함’ 만큼 적절한 표현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미국의 번영을 떠받치고 있는 약탈적 체제의 한 풍경을 끊임없이 조소하고 냉소한다. 그리고 뉴욕의 화려한 불빛에 흘러 다니는 사람들의 공허를 들여다본다. 트럼프의 구호처럼 ‘위대함의 역설’은 오늘날의 미국을 다시 표현하고 있다. 피츠제럴드식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위대하지만 위대하지 않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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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한내와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