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많은 이들이 독일 재정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해 왔다. OECD 국가들 사이에서 독일의 재정 기조는 점점 더 이례적인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출처: Brändle & Elsener (2024)
독일은 주요 경제국 중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가장 낮다. 이처럼 강력한 재정 긴축은 예상대로 낮은 수준의 공공 투자와 전반적인 거시경제 불균형을 초래했고, 그 결과 독일 경제는 해외 수요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됐다. 한편, 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독일 국채(이른바 ‘유동 국채’)는 점점 희소해졌으며, 유럽중앙은행(ECB)의 자산 매입 정책이 이러한 부족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출처: Bundesbank
독일연방은행(분데스방크)이 직접 언급했듯이, “거래 가능한 자산의 감소는 점점 더 자주 유동성 부족을 초래했고, 이는 시장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금융시장 내 변동성과는 별개로, 독일의 저축자들은 마이너스 금리를 감내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준의 공공 부채 운용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제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따라서, 자민당(FDP)을 제외한 독일의 주요 정당들이 부채 제한(debt brake)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긍정적인 소식이다. 다만, 정당 간 이견이 존재하며, 어떤 방식으로 개정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해 개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중요한 문제인데,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민주당(CDU)과 사회민주당(SPD)이 연정 협상 과정에서 부채 제한 완화를 논의하기로 합의하면서, 이 사안은 독일뿐만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어떻게 3분의 2 찬성을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합의가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다뤄지는 점은 의외다.
CDU와 SPD의 입장에서 정치적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타당한 선택이다. 이는 녹색당이 이들의 강경한 입장에 동조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설명).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국제적인 논평가들조차 이를 확정된 사안처럼 받아들이며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내 진보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CDU-SPD의 제안은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심각한 고민을 요구하는 문제다. 녹색당은 역사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CDU-SPD의 전략에 동조하며 자신의 핵심 정책을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체제의 새 연정이 실제로 의회 내 다수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협상하도록 압박할 것인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논의는 지난 글에서도 시작했으며, 어제는 독일어 진보 경제 매체 Surplus의 웹사이트에서 다시 다루었다. 나는 해당 매체의 발행인 중 한 명이다. 아래는 해당 글의 영어 버전이다.
이번 주 독일발(發) 뉴스가 글로벌 금융 시장을 뒤흔들었다. 사실, 지금 같은 시점에는 작은 뉴스 하나에도 시장이 크게 반응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을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투자자들이 이미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CDU와 SPD가 새로운 연정을 위한 초기 협상에서 국방 지출을 위해 부채 제한(debt brake)을 완화하고, 인프라 투자를 위한 5,000억 유로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새롭게 발행될 부채 규모가 총 1조 유로에 이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조 유로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지만 시장은 일부 독일 보수파가 보인 과민 반응과 같은 패닉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독일 국채(Bund)의 추가 발행 소식은 시장에서 매우 환영받고 있다. 독일 국채는 늘 공급이 부족한 상태였다. 설령 독일이 향후 10년간 1조 유로를 추가로 차입한다고 해도, 부채 비율은 GDP 대비 60%에서 85% 수준으로 증가하는 데 그칠 것이다. 이는 여전히 미국이나 유로존 평균보다 낮은 수준이다. 다만, 이처럼 대규모 독일 국채가 발행되면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독일 채권 금리가 다소 상승할 것이다. 현재 독일 국채 금리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이며,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내 다른 국가의 채권으로 이동해왔다. 이들 국채는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높지만 수익률이 더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독일이 대규모 고품질 국채를 발행하면, 유럽 내 신용등급이 낮은 국채 발행국들은 더욱 큰 압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영향은 메르츠 총리 체제하의 독일 정부가 브뤼셀의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회와 협력해 유럽 방위 채권을 추가로 발행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 모든 채권은 높은 신뢰도를 가지며, 투자자들의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유럽이 재정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만, 이렇게 대규모로 채권이 발행되면 차입자와 대출자 간의 균형이 변화하게 된다. 고신뢰 채권 공급이 증가하면 채권 가격은 하락하고, 이에 따라 채권 수익률(금리)이 상승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자금 흐름에 수조 달러 규모의 재조정을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거대 투자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금융업계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다.
결국, CDU와 SPD가 2009년 부채 제한 규정을 도입했던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독일이 적극적으로 차입해 투자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변화이며, 환영할 만한 일이다. 드디어 독일이 유럽의 경제 성장과 방위 역량 강화를 위해 리더십을 발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을 마련하고, 유럽의 방위 체제를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절실한 과제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부채 제한 철폐와 독일 주도의 유럽 투자 확대를 요구해 왔다. 이제 그 목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거시경제적 논리만으로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독일 정치권이 부채에 대한 비정상적인 강박에서 벗어나 확장적 정책 기조를 수용한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한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첫째, 경제 과열이 초래할 부작용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둘째, 재정 지출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셋째, 이러한 경제 정책의 역사적 전환점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추진될 것인가.
첫 번째 문제, 즉 구조적 변화에 대해서는 진보적 비전이 필요하다. 두 번째 문제, 즉 지출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현재 CDU-SPD의 계획을 명확히 거부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세 번째 문제, 즉 정책 결정 과정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CDU-SPD의 제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다.
현재 독일 경제는 추가적인 수요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다. 실질 임금은 팬데믹 이후 감소했고, 산업 생산도 둔화되었으며, 장기적인 경기 침체 위험도 있다. 하지만 독일 사회는 가격 충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대규모 신규 투자가 이루어지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또한, 독일의 구조적 변화는 지역별로 불균형하게 나타날 것이다. 성장 지역에서는 생활비 상승 압력이 심화될 것이고, 이를 어떻게 조절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를 넘어, 경제적 변화의 본질이 본래 정치적인 것임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독일 사회는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더 빠른 성장과 실제적인 구조 변화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1조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하면서,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alles beim alten bleibt)"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규모 재정 지출이 이루어진다면 변화는 불가피하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를 누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이다. 또한, 이번 변화는 단순한 성장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전체의 구조를 변화시킬 것이다. 과거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 시기의 대규모 구조 변화가 사회적 안전망을 통해 수용 가능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대규모 인프라 투자 기금이 조성된다면, 성장 지역에서 밀려나는 계층을 위한 실질적인 공공 주택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CDU-SPD의 계획에서 국방과 인프라가 우선순위로 설정된 것은 명확하다. 반면, 에너지 전환과 기후 위기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사회 정책 또한 기존 예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며, 국방과 인프라에 따른 부채 상환 부담으로 지속적인 압박을 받을 것이다. 이런 우선순위 배분 방식은 진보적 정치의 관점에서 매우 문제적이다.
부채 제한 철폐와 대규모 투자 확대를 지지하면서도, CDU-SPD의 편향된 계획을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계획은 마치 국가적 필요에 따른 기술적 해결책처럼 포장되고 있지만, 실상은 특정 정당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안보에 대한 최대 위협이 러시아인지, 아니면 기후 위기와 아동 빈곤인지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CDU-SPD의 제안은 이런 논쟁을 회피한 채 특정한 우선순위를 강요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번 결정의 향방은 녹색당에 달려 있다. 녹색당이 CDU-SPD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중대한 정치적 실수가 될 것이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천억 유로 규모의 재정 지출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며, CDU-CSU가 추진하는 기후 정책 후퇴를 철회하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 만약 이를 CDU-SPD 협상팀이 촉박한 일정 안에 해결할 수 없다면, 서두를 이유가 없다.
독일 민주주의는 단순하지 않다. 글로벌 채권 시장이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독일 국채에 대한 투자 수요는 충분하다. 약간의 기다림이 그들의 관심을 꺾지는 않을 것이다.
[출처] Chartbook 358 Debt brake dilemmas for progressive economic policy in Germany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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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