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Valeria Nikitina
신자유주의는 세계 자본주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생산을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전하려는 자본의 의지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적 요소였는데, 이는 북반구 노동자들이 훨씬 낮은 임금을 받는 남반구 노동자들과 경쟁하도록 만들면서 북반구의 임금을 억눌러 왔다. 동시에 이러한 이전은 남반구에 존재하는 방대한 노동 예비군을 소진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남반구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크게 높아지기 때문에, 그 결과 남반구 노동자들의 임금은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생산성이 어디에서나 증가하고 있음에도 실질임금 수준은 거의 증가하지 않으며, 그 결과 세계 경제 전체뿐만 아니라 각 개별 국가 내부에서도 산출에서 경제적 잉여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게 된다.
소득 단위에서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비중이 잉여를 획득하는 사람들보다 더 크기 때문에, 경제적 잉여의 비중이 상승하면 산출에 비해 소비 수요가 감소하고, 그에 따라 총수요 수준이 낮아진다. 따라서 경제적 잉여 비중의 증가는 과잉생산 경향을 낳게 되며, 이는 경제적 침체와 더 높은 수준의 실업으로 나타난다(이러한 실업은 종종 노동참가율 감소를 통해 위장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주택 거품 붕괴 이후 세계 경제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침체와 높은 실업 자체가 곧바로 막다른 골목의 증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국가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케인스주의적 처방은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전혀 작동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총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한 더 큰 국가 지출이 재정적자나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만 재원 조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더 큰 국가 지출이 이미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더 높은 세금으로 충당된다면, 총수요는 거의 증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00달러의 국가 지출이 노동자들에 대한 동일한 금액의 세금으로 충당된다면 총수요는 증가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어차피 이 100달러를 소비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 일어나는 것은 단지 수요의 성격이 노동자들의 소비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일 뿐이며, 총수요의 증가도, 따라서 침체와 실업의 완화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융자본은 재정적자와 부유층에 대한 더 높은 세금 모두에 반대한다(금융자본가들이 바로 부유층의 중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는 여전히 국민국가로 남아 있는 반면 금융자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세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는 금융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어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국민경제를 몰아넣은 곤경을 국가 개입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자유주의가 허용하는 국경 간 자본 이동의 무제한성 때문에 신자유주의 자체에 의해 차단된다. 그러므로 이 막다른 골목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신자유주의는 그것 자체의 틀 안에서는 극복할 수 없는 위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이 막다른 골목에 대응해 온 방식은 신파시즘을 촉진하는 것이었으며, “타자화”를 통해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담론을 만들어내고 특정 종교적 또는 민족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조성하는 기업-파시스트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을 분열 상태로 유지하여 침체와 높은 실업에 시달리는 국가들에서 독점자본의 지배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막으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신파시즘조차도 경제 문제를 영원히 우회할 수는 없으며, 언젠가는 경제적 의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는 분명 그러한 의제를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적 견해는 몇 가지 주장을 내세운다. 그것은 어떠한 위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이 위기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트럼프와 유사한 신파시스트들의 등장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보며, 트럼프의 행동을 전적으로 정신이 불안정한 개인의 행위로 치부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트럼프가 불안정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빠져 있는 이 막다른 골목의 맥락 속에서 그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다.
트럼프의 전략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남반구를 그 체제 안에 계속 가두어 두는 것을 구상한다. 이는 그의 공격적인 관세 정책과, 이러한 압박을 통해 인도와 같은 국가들에게 강요하는 무역협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인도와의 협정은, 미국이 이전보다 더 높은 관세를 인도 상품에 부과하는 반면 인도는 미국 상품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낮은 관세를 부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도가 특정 시점까지 특정 규모의—그리고 훨씬 더 큰 규모의—미국 상품을 구매하도록 의무를 지운다.
“시장”을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는 원칙적으로 이러한 수입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트럼프는 미국에 관한 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인도로부터 어느 시점까지 얼마만큼 수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유사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이는 “시장”에 맡겨져 있다. 따라서 이 무역협정은 미국은 신자유주의 규율을 따르지 않지만 인도는 이를 따르는 협정이며, 협정에서 제시된 차별적 관세율 역시 동일한 구조를 보여준다. 즉 인도는 사실상 미국 상품에 대해 자유로운 수입을 허용해야 하지만, 미국은 인도 상품에 대해 관세를 통해 자국을 보호한다.
이러한 무역 전략의 목적은 인도 및 미국과 유사한 협정을 체결하게 될 남반구 국가들에서 일부 경제 활동의 위치를 미국으로 이전시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침체와 높은 실업을 남반구 국가들로 전가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며, 위기의 부담을 남반구 국가들의 어깨로 떠넘기려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협정들은 식민지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트럼프의 전략은 식민지적 상황을 다시 연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혹은 세계를 재식민지화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남반구의 광물 자원, 특히 석유 자원을 장악하려는 현재 미국의 시도 역시 동일하게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탈식민화는 남반구 국가들이 자국의 자연자원을 통제하려 했던 훨씬 더 어려운 경제적 탈식민화 과정의 전 단계였다. 그리고 이들이 경제적 탈식민화에서 거둔 성과는 상당 부분 소련의 지원 덕분이었다. 만약 신자유주의가 이 과정을 되돌리는 움직임을 시작했다면, 트럼프의 전략은 그 되돌림을 완성하려는 시도다. 베네수엘라(국가들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와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이러한 경제적 탈식민화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왜 미국이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훼손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가 보여주었듯이, 규칙 기반 국제 질서 안에서도 재식민지화 시도는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막다른 골목을 미국(그리고 글로벌 북의 다른 국가들)에서는 신자유주의를 폐기하는 방식으로 극복하면서, 동시에 남반구에서는 그 적용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면,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넘어서는 것은 제국주의에 있어 필수적인 일이 된다.
신자유주의의 막다른 골목을 극복하기 위한 이러한 제국주의적 전략은 동시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이는 이 체제가 모든 사람의 생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약속조차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그 잠재력을 소진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체제 전체로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며, 일부 국가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다른 국가들을 그 아래에서 더욱 심한 예속 상태에 놓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여기서 곧바로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남반구의 정부들은 이러한 불평등한 무역 협정과 그러한 협정이 보여주는 재식민지화에 동의하는가.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남반구의 노동자들, 영세 생산자들, 심지어 소규모 자본가들조차 이러한 재식민지화로 인해 피해를 입겠지만(예를 들어 인도-미국 무역 협정은 특히 인도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중심부 자본과 밀접하게 결합한 독점 부르주아지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크며, 남반구의 정부들, 특히 신파시스트 정부들은 바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다시 말해 재식민지화 프로젝트는 탈식민화를 이끌어냈던 과거의 반식민 계급 동맹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출처] Imperialism’s Strategy for Escaping the Cul-De-Sac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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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