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지지와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미국 대학생 시위. 출처: PPJC
68혁명
1968년 5월 세계는 혁명의 물결로 뒤덮였다.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는 프랑스 대학생들이 3월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데서 시작되었다. 끌려간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학교에 무장한 경찰병력을 투입하며 강경 대응했다. 거리에서는 학생들과 경찰들이 대치했고, 구타당하고 끌려가는 이들의 모습이 전파를 탔다. 5월 10일 거리에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5월 13일 프랑스 노조가 24시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드골 하야”를 요구했다. 투쟁의 불길은 거세졌다.
이 운동은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를 거부하는 운동이었다. 반전 평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학교와 노동현장에서의 평등을 요구했다. 교육문제 해결도 요구했다. 히피 문화를 만들며 사회전반으로 확산했다. “먹고 사는 것을 넘어 억압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불의를 애써 못 본 척하며 사람들을 출신과 숙련기술에 따라 나누는 이 꿈쩍도 하지 않는 사회!”를 거부하며 “프랑스 대학생들의 주동자 없는 시위”가 세계를 뒤흔든 것이다.(68운동 당시 구호 중 하나. 2007, EBS)
프랑스에서 시작된 68혁명은 미국, 독일까지 번졌고 멀리 중남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도 전공투(전학공투회의)가 거센 흐름을 이뤘다. 도쿄대, 와세다대 등에선 학생들의 점거로 입학생을 뽑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68혁명의 불씨는 베트남 전쟁 반대 흐름에서 비롯되었다.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대치는 1955년부터 계속되었다. 그러다 1966년 6월 미국의 하노이 폭격으로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전쟁은 1975년까지 이어졌다. 미국은 10년 동안 이 전쟁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세계 최고의 군사력이라는 평을 의심받았고 국제적 지위는 하락하고 있었다. 명분 없는 전쟁은 반전 운동과 여론에 밀렸다. 결국 미군은 철수했다. 부정적 인식 때문에, 목숨 걸고 베트남에 갔던 미군 병사들은 참전 사실을 숨겨야 했고 외상후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았다.
한국은 베트남에 전투병을 파병했다. 8년 동안 총 34만여 명 규모였다. 반대 의견에도 추가 파병을 하면서 정부는 미국의 차관 등을 확보했다. 이들의 피가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66-1972년 사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송금된 금액은 8억 7250만 달러에 달했다. 군납, 건설, 용역 기술 등에 종사한 이들과 한국 군인의 송금액을 합한 것이다. 현대, 한진, 대우, 금성 등 굵직한 기업들이 ‘베트남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공산화를 우려하던 미국이 한국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한국군들도 고엽제 피해, 외상후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깊은 관련이 있음에도 한국에선 반전 평화 요구도, 혁명의 물결도 일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68혁명을 모른 채 살고 있었다. 군사정권에 정보를 통제당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68년의 반전 평화 투쟁과 혁명은 우리와 무관했을까.
향토예비군과 국민교육헌장
한국도 긴장이 격화되었다. 1.21사태 이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250만 명이 향토예비군에 속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월 10일 파리회담이 열려 베트남 평화 협상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 날, 한국 국회 본회의에선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목적이 제정 당시보다 확대되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반대했지만 공화당과 무소속 의원들의 힘으로 국방위 안 그대로 통과되었다. 법의 골자는 “북괴 무장공비의 침투가 있거나 그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 이를 소멸하기 위해 제1예비역과 제1보충역 및 지원자로 향토예비군을 조직한다. 다만 필요한 경우 제2예비역과 제2보충역도 편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국회는 18세 이상의 국민 대상, 신고제를 내용으로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도 절차를 생략하고 통과시켰다. 심지어 이 본회의에서 국무총리는 “가을부터 원하는 학교에 대해 중·고·대학교에서 시범학교를 정해 군사교육을 실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경향신문 1968.5.10.)
이 ‘군사학’은 1969년부터 고등학교 필수과목이 되었다. 남학생은 목검 훈련을, 여학생은 간호 훈련을 받았다. 교련은 유사시에 고등학생들을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이 수업은 1988년 11월 25일 폐지가 결정되었다.
1968년 12월 5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었다. 박정희는 친히 헌장 제정 관련 회의에 참여했다. 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된다. 학교 들어가면 글보다 먼저 배워 외우는 게 국민교육헌장이었다. 교과서 맨 앞에 실렸다. 이를 외우지 못하면 매를 맞아야 했다. 외우기 웅변대회도 열렸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회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강제 낭독은 사라져갔고 1994년 말에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지구상 어디에서 일어나든, 평화 요구와 혁명의 물결은 독재자에게 위협적인 것이다. 하물며 젊은이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기성세대를 거부하며 사회를 재조직하겠다고 나선 것은 더욱 위험하다. 사회통제와 의식의 사전 제압이 필요할 것이다. 군사훈련은 “내가 살려면 죽여야 한다”는 ‘현실주의자’를 길러내는 교육이다.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는 훈련은 그 자체로 통제와 복종 시스템을 강요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북 대치 상황에 놓였던 한국 사회 곳곳엔 여전히 전쟁 분위기가 지배했다. 일상의 삶이 전쟁터로 조직되었다.
2024년 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된 이후 대학가의 시위는 미국 전역을 넘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세계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이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잔혹한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이자 인류의 연대를 촉구하는 평화 시위이다.
전쟁은 무기와 폭력으로 진행되지만, 전쟁의 그늘은 세기를 지나 인류를 위협한다.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국경선이나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 속에 있다.” - 미셸 푸코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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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은 『전노협백서』 발간을 계기로 노동운동 자료를 모으고 노동자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역사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가스공사노동조합 30년사』,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사』 등이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