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대 컴퓨터로 자본이 그린 세상
1983년 가을, 인공지능 제5세대 컴퓨터의 출현이 예고되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다.
컴퓨터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를 이해하고 추리하고 판단”한다. “일정한 격식을 갖춘 기계 언어만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나 영상, 도형 등도 스스로 인식”하는 컴퓨터다.(경향신문 1983.9.14.) 기계를 넘어선다. 그때의 상상력으로 그린 세상은 이렇다.
“해가 뜨면 커튼이 자동으로 열리고 온도 습도 조명도 자동으로 조절된다. 컴퓨터 단말기의 뉴스 버튼을 누르자 관심 있어 하는 기사가 프린트 되었다. 그때 커피향이 퍼진다. 주방기구가 자동으로 점화되며 제때 식사 준비를 마쳤다. 밥을 먹고 나서 단말기로 회사 사장과 얼굴을 보며 통화한다. 간략히 보고하고 결재 서류를 올렸다. 편지 쓸 게 있으면 불러만 주면 컴퓨터가 알아서 받아썼다. 한편 부인은 컴퓨터를 통해 경주 여행을 위한 옷을 샀다. 크레디트카드 번호를 컴퓨터에 집어넣어 자동으로 대금을 지불했다.”(경향신문, 1983.10.3.)
위의 경향신문 기사를 읽고 chatgpt가 그린 그림
교통순경, 얼굴 없는 선생님, 보험서비스, 배우자 연결, 전산세무, 경영인, 전자 눈을 가진 형사, 참석자 없는 회의, 만병을 추적하는 자동진단기, 제도기 없는 건축설계, 올림픽 진행자, 인스턴트 패션, 온라인 해외여행 예약, 세계와 연결하는 전자 쇼핑, 서류더미 사라지는 사무실, 컴퓨터로 안방서 회사 일(경향신문 1983.8.-9. 기획 시리즈) 등이 인공지능 컴퓨터가 가져다 줄 미래였다. 한편에선 “모든 것을 컴퓨터가 해주면 사람은 무엇을 할까?”, “컴퓨터를 통제할 방법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40년이 지나 자본이 상상한 사회는 현실이 되었다. 자본은 기계화,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고 상품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다.
노동자에겐 고용불안
한국 자본도 90년대 들어 인공지능 개발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 출발선은 산업정책의 기본 원칙을 ‘민간의 자율과 경쟁’으로 명시한 ‘공업발전법’의 시행(1986.7.1.)이었다. 유망 유치산업육성과 사양산업 합리화 생산성 향상 사업을 중점 지원하는 내용이다. 이후 자본은 빠르게 변했다. 산업의 중심은 노동 집약 산업에서 자본, 기술 집약 산업으로 이동했다. 자본 간 경쟁이 강화되었다. 금리자유화는 변화에 속도를 더했다. 86~88년 38.7%를 차지하던 노동집약적 상품의 수출 비중이 93년 상반기에는 24.2%로 떨어졌고 55.5%였던 자본 집약제품 비중이 72.1%로 증가했다.(한겨레신문 1993.11.6.)
“국제경쟁력이 한계에 달한 산업”에 종사하던 많은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어갔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에서 1989년 한 해 동안 1만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경인지역과 부산, 대구의 전자 섬유 신발업 휴폐업이 이어졌다. 공장 자동화도 빨랐다. 산업구조조정은 제조업 부문에서 남성 노동자 감소, 비제조업부문 여성 노동자의 임시고용, 파트타임 고용 증대를 초래했다. 생산과정의 자동화, 산업구조조정에 맞서 노동자들은 고용안정 투쟁을 전개했다. 아울러 실업보험제도의 도입, 부당휴폐업 및 해고제한에 관한 특별 입법 제정, 직업훈련 기술 교육 강화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구조조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투쟁 또한 4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AI시대에 던지는 질문
지난 역사에서 자동화와 과학화의 흐름이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생산성의 증감에 대한 논의로 집중되었다. 반면, 현시대의 AI는 인류사회가 이룩하거나 누리고 있는 공동체의 존폐 자체를 묻고 있다. 문화, 과학, 건축, 생산, 환경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과거의 과학화 흐름이 직업이나 생산수단을 대체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인간 혹은 사회의 직접적인 대체를 예고하는 수준이다. AI가 예술의 창작을 넘보고 역사적 관점에 의문을 던지며, 사실관계와 맥락적 판단을 대신하려 한다.
사회운동이 새로운 사회를 맞아 던져야 할 질문은 AI의 기술적 측면과 과학화에 따른 노동환경의 변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질문의 방향을 바꿔 인류사회의 존재 그 자체의 의미 혹은 사회운동 자체의 목표와 의미를 재검토·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사회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과거처럼 ‘자본에 의한 시장점령’ 혹은 ‘산업적 인클로저’ 현상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AI가 불러올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노동자가 87년에 외쳤던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구호를 이제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바꿔 질문해 볼 때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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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은 『전노협백서』 발간을 계기로 노동운동 자료를 모으고 노동자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역사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가스공사노동조합 30년사』,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사』 등이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