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Chris Lawton
출판 혁명의 시대
한국 사회에 독서 열풍이 불었던 시기가 몇 차례 있었다. 그 처음이 해방 공간인데, 일제의 억압 없이 한글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출판 혁명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사회과학 분야, 그중에서도 ‘좌익’ 서적이 많이 출판되었고 읽혔다. 당시의 정치적 열기와 통일 사회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미군정의 좌익 탄압 정책에 따라 ‘좌익서적’ 압수가 빈번해지고 사상투쟁이 퇴조하면서 이 판도는 바뀐다. 책은 사상 서적에서 문학서, 번역서로 그 추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 문학’이 대세를 이뤘다. 전후 한정된 자원으로 공급된 책들은 ‘교과서’ 중심이었다. (⟪서울 2천년사 37⟫ 참고)
1948년에 농촌 간이문고 설치를 시작한 이래 독서주간 실시(1954년), 한국독서인구개발공사 발족과 독서신문 발간(1970년), 책의 날 지정(1987년)까지 책 읽기 확산을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독서 이데올로기
“때로 말썽의 씨가 되는 불량도서를 추방하는 일을 더욱 강화하고 양서 보급에 박차를 가해야” 국력이 향상된다. (동아일보 1970.7.15.)
독서는 국가적인 사업의 성격을 띄었고,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독재 정권은 독서를 통제하고 조직함으로써 독자들의 사상을 규제하고자 했다. 1969년 9월 24일에는 독서주간을 맞아 국민독서연맹이 발족하기도 했다. 이사장은 이후락(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후일 중앙정보부장)이 맡았다. 연맹은 “직장 문고를 설치해 광범위한 독서 운동을 전개하는 게 목적”이었다. “종업원 5명 이상의 직장마다 한 개씩의 문고를 설치하도록 장려하며 교양 문학, 여성 아동, 직업서, 잡지 등 우량도서를 선정 영업주의 요구에 따라 설치를 도와준다. 가정 대출을 해 가정문고 역할”까지 하도록 했다. (조선일보 1969.9.23.)
1969년 문화공보부가 선정한 우량도서는 <문화> 컬러판 어린이 세계 명작, <교양> 한국 명인 시선, 이웃사촌 <역사> 소년소녀 그림 국사, <문학> 청녹집, <과학> 자연과학 이야기 진집, 그리고 <교양> 소년소녀 승공 교육 문고, 통일의 길, 자유의 나라 등이었다. (동아일보 1969.10.8.)
저항의 책 읽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70년대 후반 유신체제에서 인문 사회과학 분야 책이 다시 인기를 끈다. 대학과 언론 분야에서 쫓겨난 이들이 책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였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이후에는 책이 언론의 역할까지 했다. ‘금서’ 구해 읽기가 번졌고 곳곳에 금서를 구할 수 있는 서점도 있었다.
노동자도 책 읽기와 글쓰기에 열중했다. 가난으로 박탈당한 배움을 갈구했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싶었으며 정당한 권리를 찾고 싶었다. 야학에서, 소모임에서 독서가 필수였다. ⟪장길산⟫, ⟪토지⟫, ⟪태백산맥⟫ 등 역사소설부터 ⟪파업⟫ 같은 노동소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까지. 나아가 노동자가 노동을 글로 표현하는 일이 현장에서 지역에서 활발했다. 구로에서 마산창원에서 노동문학회가 만들어졌다. ‘박노해 현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독서의 흐름은 곧 역사의 흐름과 연결되어 왔다.
독서의 계급성
한편 책의 가치는 독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서에도 있다며 제본술을 강조하거나(경향신문 1949.1.22.) 인쇄공장은 문화의 산실이라며(동아일보 1955.11.28.) 책 만들기의 중요성을 얘기해왔지만, 막상 책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노동 가치는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인쇄공 몇 명이 기계 한두 대를 갖고 좁은 공간에서 비집고 서서 일하는 곳에서 노동자들은 소음과 제판과정에서 발생하는 공해물질인 크롬산에 노출되어 있었다. (매일경제 1984.6.16.) 기계화되었다고 하지만 인쇄소는 여전히 영세하고 열악하다. 그리고 오늘날 이곳은 점차 이주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2024년 윤석열 정부는 출판산업 예산을 전폭 삭감했다. 이제 정권은 굳이 지역으로 산업으로 독서를 조직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는 듯하다.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성인 중 책을 읽는 이의 비율은 40.7%였다. 가구 소득별로 보면 200만 원 미만은 18.9%, 200~300만원 미만은 28.2%, 300~400만원 미만 39.3%, 400~500만원 미만 46%, 500만원 이상은 54.8%가 책을 읽는다고 했다. 가난할수록 독서와는 멀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국가권력이 장악한 제도교육과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미디어에 의해 넘칠 정도로 채워지는 의식세계는, 특히 한국처럼 제도교육이 민주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지배세력이 요구한 것만으로 채우게 된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지 못했지만 지배세력이 요구한 내용으로 채우지도 않았다. 설령 채웠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이뤄지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지배세력에 대한 복종의 자발성에서 과거에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보다 오늘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더 강한 것은 그 때문이다.”
- 홍세화, <생각의 좌표> 中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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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은 『전노협백서』 발간을 계기로 노동운동 자료를 모으고 노동자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역사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가스공사노동조합 30년사』,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사』 등이 있다. 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