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역사로 벌이는 무의미한 전쟁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의 좌상. 출처: 백범김구기념관 홈페이지

윤석열 대통령이 또 반국가세력을 언급했다. 19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해 폭력과 여론몰이선전·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민 분열을 꾀할 것”, “이러한 분열을 차단하고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높일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19일부터 열흘간 실시되는 을지 자유의 방패(을지프리덤실드, UFS)’ 훈련(을지연습)을 염두에 둔 것이다이 훈련은 다양한 시나리오를 전제한 군관의 대비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실시된다각 부처 등 관공서를 비롯한 공영방송 일부까지 이 훈련에 참여한다대통령의 발언은 올해의 훈련이 북한의 침공과 남한 내 반국가세력의 호응을 염두에 두고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걸로 느껴진다. ‘국가 총력전 태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 주목한 포인트는 이번에 처음으로 북한의 핵공격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가 포함된다는 점이다북한의 남한을 겨냥한 핵공격 시나리오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여기선 논외로 하자보수세력의 시각에서 보면 어쨌든 이 점은 나름대로 역사적 대목이다그렇다면 대통령의 메시지도 이 지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그런데 그게 아니라 반국가세력에 힘을 준다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느닷없이 가짜뉴스와 사이비 지식인의 폐단을 경고했다이러면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실 반국가세력’ 운운의 레파토리는 역사가 깊다보수정권 시기 특히 주목받는 시대착오적 스토리인 월남 패망의 교훈’ 따위의 얘기가 그렇다양심적 시민이나 자유주의자지식인 등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월맹공산군이 행동을 개시하자 공산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내 한순간에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더라는 식의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미국 상·하원 합동 의회 연설에서도 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부정하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운동가인권 운동가인 양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앞서 월남 패망의 교훈을 떠올리게 하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드러내 온 거다.

대통령이 이런 인식을 하고 있다고 하면실천적 차원에서 통치 기구는 무엇을 해야 할까먼저 반국가세력을 사전에 솎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누가 반국가세력인지를 걸러내야 하므로 검열이 강화되어야 하며 사상검증으로 볼 수 있는 갖가지 일들이 논란 속에 진행되어야 한다이러한 사회는 자유민주주의의 사회인가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전체주의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핑계를 대는 권위주의 사회에 불과하다.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독재를 정당화했던 군부독재 시절에 이미 다 겪어 봤다.

남에게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엘리트주의인 척하는 포퓰리즘이나 기득권을 개혁하겠다고 나서며 포퓰리즘인 척을 하는 엘리트주의는 이미 21세기 정치의 클리셰다윤석열 정권은 여기에 전체주의 핑계를 대며 자유민주주의인 척하는 권위주의라는 유사품을 추가한 셈인데이들 모두는 왜 당당하게 스스로를 무엇이라 칭하지 못하고 꼭 남을 반대하거나 막아내자는 맥락에서만 자기를 규정할 수 있는가그건 실제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다시 되풀이되는 역사 전쟁을 봐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어디까지나 역사의 시각으로 보면어떤 나라가 언제 건국이 되었다는 것을 무 자르듯 정하는 게 가능하겠는가미국의 건국일은 언제인가일본의 건국일은프랑스는딱 하루를 정해 말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각국이 대략 건국일에 준해서 기념하는 날은 있다그건 뉴라이트 일부가 주장하는 대로 국민주권영토가 갖춰진 시점이었는가 등의 여부와는 상관없다그 나라 사람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싶은 바를 기념하는 것이다미국은 독립을 결의한 1776년 7월 4일을프랑스는 바스티유 감옥을 시민들이 습격한 1789년 7월 14일을 기념한다입헌군주국인 일본은 신화적 존재이면서 어찌됐건 1대 천황으로 기록된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하는 기원전 660년 2월 11일을 기념한다.

뉴라이트가 건국절’ 이슈를 제기하기 전까지는 최소한 일상과 정치의 영역에서 건국과 정부수립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았다그럴 필요도 없었다정치적 영역에서 뉴라이트가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참여정부가 친일파재산환수법 등을 추진하면서다이때 보수정치는 두 가지 트라우마를 자극받게 되었다첫째는 그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친일파 또는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제강점기 전후에 기득권을 누렸던 계층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이는 이승만의 친일 청산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둘째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을 고착화시킨 원흉이라는 비판이다양쪽 모두에 대해 보수정치로서는 별로 할말이 없는 처지다이 아픈 구석을 지속적으로 공격받자니 독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뉴라이트의 건국절과 식민지근대화론은 이 두 가지 문제를 이론적 논리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해소해주는 도구다. 1948년에 없던 나라를 새로 만든 것이니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그렇게까지 큰 흠이 될 수 없다일제의 강점 역시 기분이 좀 나쁘긴 해도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됐고 친일파라는 사람들 역시 크게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니 그렇게 미워만 할 일이 아니다이게 뉴라이트 이론을 보수정치가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즉 정치권에서 뉴라이트의 부상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민족주의적 드라이브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된 셈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뉴라이트 드라이브는 현실 정책의 정당화를 위해서도 쓰였다남한단독정부 수립이 정당하다면 갈등유발적 대북정책도 정당화된다구태여우리는 하나란 감성적 구호로 대화와 협상을 지향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이 대목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했다는 가짜뉴스’(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가 지금까지도 활용된다.

분단은 아쉬워할 필요가 없으며단독정부 수립으로 태어난 대한민국은 당당하다!

한미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자는 맥락에도 뉴라이트 사관은 도움이 된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서는 과거사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데뉴라이트의 이론을 활용하면 일본의 무성의한 대응에 눈을 감아주는 게 어느 정도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권이 이 문제에 대해 헌법의 임정법통론을 근거로 ‘1919년 건국설을 공식화하며 민족주의 드라이브를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이들 입장에서는 ‘1948년 건국이 곧 애국이고 1919년을 중시하는 김구파는 빨갱이란 극우파 논리에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1919년 건국설을 말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런 핑퐁게임(?)으로 보면 윤석열 정권에서 다시 ‘1948년 건국설이 힘을 얻는 건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그런데상황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잘 봐야 한다윤석열 정권의 특징은 뉴라이트 인사들이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하고건국절 주장 인사들이 건국절 얘기는 안 했다고 한다는 거다이들이 갑자기 닭이 울기 전에 그리스도를 세 번 부정하는 베드로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윤석열 대통령은 뉴라이트인가이걸 먼저 따져봐야 한다신기하게도 윤석열 대통령은 뉴라이트의 양대 논리인 건국절과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후보 시절부터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한 일이 없다오히려 ‘1919년부터의 네이션 빌딩즉 과정으로서의 건국이라는 식의 그들 나름으로는 정답에 가까운 발언이 공식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이종찬 광복회장 등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되는데어쨌든 이런 점을 보면 윤석열 대통령을 전형적인 뉴라이트로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뉴라이트라는 이론적 도구 없이도 뉴라이트라는 기획이 애초 이루려 했던 바를 실천하고 있다이게 놀라운 점이다앞서 봤듯 정치권에서 뉴라이트가 활용된 건 갈등 유발적 대북정책과 과거사 정리 없는 한미일 군사협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특히 대일정책에 있어서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은 방식으로일본에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비가역적으로 양보하는 정책을 흔들림 없이 펴고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아마 뉴라이트 인사들도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보수 내의 균열이 촉발되었다윤석열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이종찬 광복회장의 이탈이 이를 보여준다윤석열 정권 식의 대일외교는 보수정치조차도 정당화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오직 처음부터 그러한 결과를 꿈꿨던 뉴라이트만 이 정권의 외교 노선에 박수를 보낼 수 있다이 정권 요직을 뉴라이트 출신들이 죄다 차지하고 있는 것은한 발 떨어져서 보면 결국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윤석열 대통령은 왜 이런 방식의 대미대일외교를 고집하는 것일까문재인 정권이 고수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것과 완전히 반대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이런 설명이 아니라면 윤석열 대통령을 심리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그건 평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어쨌든 이런 거라면 이 정권에서 뉴라이트의 득세는 윤석열 대통령이 뉴라이트인가 와는 관계없으며심지어 뉴라이트가 아직 뉴라이트가 맞는지조차도 큰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파적 지향으로만 따지면해방정국에서 ‘1919년 건국론을 반대할만한 사람들은 오히려 좌익이다이승만은 김구와 단독정부 수립 등을 두고 대립했지만 임정법통론을 반대한 바 없다여운형이나 심지어 박헌영의 시각에 이입해서 해방정국을 사고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김구파와 이승만파가 대립하며 이승만파가 김구파를 좌익이라고 매도하는 것처럼 돼버린 오늘날을 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신념에 핵심이 없고한쪽이 다른 쪽을 공격하고 반대하기 위해 억지 논리를 짜내고 공격받은 쪽이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반격을 가하는 구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다.

반국가세력’ 발언 역시 마찬가지다. ‘반국가세력이 실제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그렇게 주장하는 것으로 상대를 반대하는 맥락을 강화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진보가 위선과 동의어처럼 여겨지고 그러한 위선을 방법이야 어찌 됐든 무너뜨리는 것이 오히려 진보인 것처럼 여겨지던 지난 대선 직후였다면 이런 반국가세력’ 드라이브도 확장성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이제 이념과 역사를 갖고 벌이는 이런 일련의 소동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그저 서로 반대하는 기성 정치의 맥락에 빨려 들어가면 이렇게 된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충분하다.

덧붙이는 말

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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