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의미가 부여됐던 재보궐선거가 예상대로의 결과로 끝났다. 거대양당이 각자 유리한 지역에서 유리한 그대로의 성적을 거둔 것이다.
애초 이번 재보선은 언론이 ‘미니 재보선’으로 이름을 붙일 만큼 규모가 작아 큰 의미 부여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여의도 정치권과 주류 언론이 주거니 받거니하며 의미를 키운 결과 전남 영광군수 선거는 호남 맹주 결정전으로,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는 한동훈 독립 전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출처: 더불어민주당
영광군수 선거의 경우 애초 기대를 받았던 조국혁신당이 3위로 밀리고 진보당이 약진해 2위를 기록한 대목이 눈에 띈다. 이는 영광군수 선거가 철저히 조직 선거로 치러졌다는 방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광군수 선거는 참여도가 대단히 높았다. 선거 최종 투표율만 70.1%였고 정량평가를 하기 어려운 선거 과정의 여러 특징적 장면까지 종합하면 선거의 열기는 가히 ‘역대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표율이 낮을 때는 조직이 잘 갖춰진 세력이 유리하고 투표율이 높을 때에는 ‘바람’을 타는 세력이 유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러나 투표율이 일정 수준 이상까지 더욱 높아지면 조직을 갖춘 세력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바람’으로 높일 수 있는 투표율엔 한계가 있는데, 그 이상으로 투표율이 높아졌다면 그것 역시 조직이 이례적 수준으로 가동되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영광군수 선거에서 나타난 현상이 정확히 이것이다. 여론조사는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진보당의 3강 구도를 예측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조직을 갖추지 못한 조국혁신당이 크게 밀린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 조직의 후반 결집은 애초 예상된 것이었다. 진보당 역시 잘 알려진 특유의 조직력을 가동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선거 결과는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국혁신당이 더 선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지 모른다. 조직력에서 뒤처진다면 캠페인으로 극복해야 한다. 지난 총선에서 확인된 이른바 ‘호남 민심’은 윤석열 정권과 더 강하게 맞붙어 싸울 것을 원하는 거였다. 호남 지역에서의 조국혁신당 돌풍도 그런 차원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아무래도 당해본(?) 사람이 더 잘 싸우지 않겠는가?’, ‘더불어민주당에게 180석을 몰아줘 봤지만 정권만 빼앗기고 답답한 상황이지 않는가?’ 이런 정서가 반영된 결과였다는 거다. 그런데 ‘호남의 맹주’를 두고 힘을 겨루는 거라면 아무래도 이런 구도에서 갖게 되는 조국혁신당만의 강점(당 대표가 바로 그 ‘조국’이라는!)은 사라진다. 더군다나 조국혁신당은 더불어민주당을 ‘호남의 국민의힘’에 비유하면서 그 프레임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니 공중전으로 지상전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방식의 전략은 아무래도 어려운 상황이 된 게 아니었을까 한다.
덧붙이자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조국혁신당의 혼란은 당의 진로를 두고 증폭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조국혁신당이 이번 재보궐선거에 대응하는 모습은 더불어민주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따로나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건 불가능한 과제에 가깝다는 거다. 애초의 목표는 뭐였는가? ‘조국혁신당으로도 제3당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므로 안심하고 지방선거 공천을 신청하십시오’라는 메시지인가? 그렇다면 대선과 총선도 그런 노선으로 치를 각오와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인가? 여러모로 불투명한 점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재보궐선거는 조국혁신당이라는, 여러모로 진기한 모델의 한계를 드러낸 기회가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호남이 ‘이재명의 민주당’을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별개의 차원이다. 영광군민들, 여기에 곡성군민을 더한대도 이들이 호남 전체를 대표하는 것조차 아니다. ‘호남의 맹주’를 가리는 싸움의 결말은 할 수 없이 다른 기회에 확인해야 할 판이다.
오히려 ‘이재명의 민주당’ 입장에서 곤혹스러운 것은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의 성적일 것이다. 애초 여론조사는 박빙승부를 예고했다. 윤석열 정권이 워낙 죽을 쑤고 있는데다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이 현재진행형으로 확산되고 있어 선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실제 투표를 진행해보니 상당한 격차로 국민의힘이 승리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경북 안동 출신의 이재명 대표의 입장에선 일각의 지적대로 지난 총선에 이어 영남에서의 확장성에 대한 대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TK 출신의 강점을 발휘하는 것도 일단은 PK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의 경우는 중앙정치에서 이슈화되는 방식이어야 관계보다 집권세력 내의 역학 구도에서 더 극적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애초 여당은 지난해의 강서구청장 재보궐선거의 교훈도 있고 하여 ‘조용한 선거’를 치르겠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용산과 당의 갈등 관계가 심상찮아지고 대통령실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에 ‘면담’ 일정을 통보하면서 시점을 재보궐선거 이후로 잡으면서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 결과는 집권 세력 내 지형을 바꿀 정도의 문제가 돼버렸다.
여론조사 결과가 시원찮게 나오는 상황에서 보수세가 강한 부산 금정구에서 패배한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통령실 일부와 친윤계는 총선에 이은 한동훈 체제의 지도력 실패가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할 심산이었다. 이에 맞서 한동훈 지도부는 김건희 여사 논란과 이를 감싸기만 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식이 민심의 이반을 불러 일으킨 것이라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언급했다.
10월은 여당에 어려운 시기다. 국회 내에선 김건희 여사 의혹이 거의 모든 상임위에서 다뤄지는 형태로 야당 주도의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국회 밖에선 명태균 씨 관련 소식이 방송과 신문 뉴스를 뒤덮고 있는 상황이다. 한동훈 대표 측의 용산을 향한 요구의 수위는 사과에서 활동중단, 그리고 기소 필요성에 더해 ‘김건희 라인’에 대한 인사조치로 높아져 갔고 이는 재보궐선거의 승패를 둘러싼 논쟁 구도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이겨야 다음 수를 편하게 둘 수 있는 한동훈 대표 입장에선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한다. 한동훈 대표가 부산 금정구에 6번 방문하고 ‘종단 도보 유세’ 등을 감행한 모습 등은 이 결과로 연출된 것이다. 앞서도 반복 언급했지만 그렇잖아도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다. 당력을 쏟아 부었으니 그에 걸맞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한동훈 대표 측은 이 결과를 놓고도 ‘승리 방정식’ 등을 시사하며 특정한 방향의 맥락화를 시도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압박해 김건희 여사를 정치적으로 무력화해야만 여당이 살 길이 생긴다는 점을 이번 재보선을 통해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제 눈길은 윤석열 대 한동훈의 ‘독대’ 혹은 ‘면담’ 자리에 쏠린다. 한동훈 대표가 주장한 김건희 여사의 사과, 활동 중단, ‘김건희 라인’의 정리 등이 어디까지 수용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러나 사실 용산의 대응 수위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17일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에 관한 김건희 여사 처분을 예정대로(?) 불기소로 처리한 걸 보면 그렇다. 재보궐선거 다음날, 서울중앙지검 국정감사를 하루 앞두고 이뤄진 이러한 처분은 정서적으로는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검찰의 만행에 가까운 조치이지만, 건조하게 논리적으로 보면 김건희 여사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법적 쟁점이 해소됐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사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걸 수도 있다는 거다. 최근 보도를 보면 제2부속실 설치에 대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는 얘기도 있다.
용산이 내놓을 카드는 아무래도 이 정도다. 그러면 ‘독대’ 혹은 ‘면담’이 성과를 거두느냐 마느냐는 한동훈 대표가 여기에 만족하느냐 마느냐에 달린 거다. 만일 재보궐선거가 한동훈 지도부의 패배라는 결론으로 끝났으면 한동훈 대표 입장에선 용산과 합의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을 거다. 상대가 진심으로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본인이 살기 위해서라도 “재보궐선거 패배 이유는 김건희 여사와 대통령”이라는 주장을 더 강하게 제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이후의 정국 운용을 위한 옵션을 고민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일단은 미진한 수준이라도 합의를 통해 성과를 내는 모양새를 만들고 나머지는 “다음에 또 하자”고 하는 거다. 지금으로서는 그 가능성이 좀 더 높지 않을까 한다.
출처: Unsplash+Philip Oroni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여의도 호사가들이 떠들 수 있는 얘기 자체는 여러가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에는 선거가 그 자체가 갖는 본래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대 대의민주주의 하에서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최근에 와서는 그 양상이 갈수록 더 하향평준화 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애수를 여실히 느끼게 한 것은 서울시 교육감 선거였다. 후보단일화 이야기 말고 무슨 쟁점으로 어떤 싸움을 한 것인지 잘 기억에 남지 않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이런 꼴이 되자 바로 조선일보는 차라리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당연히 직선제는 만능이 아니다. 많은 경우 직선제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완전한 것처럼 포장해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역할에 머무르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선제를 폐지하는 게 직선제의 한계나 직선제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런 정치와 제도가 제자리 걸음과 후퇴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이상한 선거를 보면서, 이 세상의 이런 부당한 딜레마를 깨는 게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혹시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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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