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경제학"이라 불리는 분야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학문이다. 칼 마르크스는 경제학이 가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고전 정치경제학과 속류 경제학(vulgar economy)을 구별했다. 후자는 생산의 영역이 아닌 교환의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그로 인해 모든 시장 참여자가 동일한 위치에 있는 듯 보였다. 이로써 생산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착취의 사실이 완전히 은폐되었다.
마르크스가 이 학문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논의한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잉여가치의 기원과 관련된 그의 중심적 관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학문에 침투하여, 주류 경제학이 하는 것처럼, 시스템을 고립된 것으로만 바라보고 제국주의 현상을 우회할 뿐만 아니라 암묵적이고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 전통에 속한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고의적으로 진실을 흐리거나 의도적으로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들은 "직업의 폭정"에 종속되어 있다. 이는 학계 생활의 사회학적 연구 대상으로 별도로 다뤄져야 할 현상인데, 동료들의 인정, 직업적 경력, 승진, 출판물 및 수상 등이 모두 학문적으로 '허용된' 초점의 범위 내에 머무르는 것에 의존하게 된다. 제국주의와 같은 주제를 언급하며 이 범위를 벗어날 경우 큰 대가를 치러야 하며,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범위 내에 머무르는 쉬운 선택을 한다.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의도적으로 부정직한 것은 아니지만, 제국주의의 역할을 배제하는 전체 서사가 구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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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지만, 주류 경제학이 제국주의의 역할을 어떻게 은폐하는지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첫 번째 예는 성장 이론과 관련된 것으로, 여기서 지배적인 관점은 자본주의 경제의 경제 성장률이 노동력의 자연적 증가율, 나아가 인구의 자연적 성장률에 묶여 있다고 본다.
이 관점은 총수요의 역할을 무시하며, 마르크스가 강하게 비판했던 소위 '세이의 법칙’(Say’s Law)을 믿는다. 이 법칙은 총생산된 것은 자동으로 시장에서 수요된다고 주장하며 미시적 수준의 불일치는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 과잉생산 가능성은 부정한다. 게다가 이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19세기 초반까지 자본주의의 광산 및 플랜테이션에서의 인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2천만 명의 노예가 아프리카에서 '신세계'로 이송되었다. 마찬가지로 노예 무역이 끝난 이후, 약 5천만 명의 인도와 중국 노동자들이 1차 세계대전 전까지 계약 노동자나 쿨리 노동자(coolie labor,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주로 아시아에서 열악한 조건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했던 이주 노동자들)로 열대 또는 아열대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이 움직임은 같은 기간 자발적으로 '신세계'로 이주한 5천만 명의 유럽인들과는 별개로, 이주로 인해 해당 지역 원주민들이 점유하고 있던 땅에서 축출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인구 이동이 자본주의의 인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이루어졌는데, 자본주의가 자국 내 인구 증가율에 맞추어 순응한다고 믿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류 경제학이 주장하는 바이다.
물론 이 이론이 단지 제국주의가 없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며, 자본주의가 직면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오토 바우어(Otto Bauer)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국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는 주류 경제학의 목적이 아니며, 자본주의의 인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대규모 인구 이동을 인정하는 흔적조차 없다. 게다가, 만약 특정 시기나 연속적인 시기에 노동력이 어떤 주어진 수치가 아니라면 이 이론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도 없다. (모든 '생산 요소'의 완전 고용이 매 시기의 소득 분배를 결정하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영향력이 없는 이론을 언급하며 쓸데없는 비판을 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2013년 출판된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영향력 있는 책 ⟪21세기 자본⟫에서 피케티는 대륙 간의 노동 이동과 그 중 상당수가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이동을 무시하며 소득 분배의 변동에 대한 모든 설명을 이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두 번째 예는 무역 이론과 관련있다. 여기서는 오랫동안 모든 국가가 자유무역을 통해 더 나아진다는 주장이 존재했다. 이 주장은 국가가 무역에 개방되기 전과 후 모두 자신의 모든 '생산 요소'를 완전히 활용한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그러나 생산 구성은 변화하게 된다. 모든 국가의 생산 구성이 변화하면 세계는 자원을 최적으로 활용하게 되어 더 많은 상품 묶음을 생산하게 되고, 모든 국가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역은 따라서 국가들 간의 다윈적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무역 이전과 이후에 생산 요소를 완전히 활용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총수요 부족이 없으며 세이의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명백히 어리석은 가정이다. 세이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 총생산량은 세계 수요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수요가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생산하게 되면 팔리지 않은 생산물이 발생해 역효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한 국가가 더 많이 생산하게 되면 그 초과 생산물은 다른 국가의 몫을 빼앗는 형태로만 판매될 수 있다. 자유무역은 모든 국가를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국가에게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이는 결국 국가 간 시장 쟁탈전을 초래한다. 이 시장 쟁탈전은 제국주의의 근간이며, 자유무역이 모든 국가를 더 나아지게 한다는 논리로 이 사실을 은폐하는 것은 제국주의를 눈가림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자본주의의 옹호자이자 강력한 반사회주의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조차 세이의 법칙을 거부하며 시장 쟁탈전, 나아가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의 주요 저서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그는 “19세기 후반 정통이었던 국내 자유방임과 국제 금본위 제도 하에서, 정부가 국내 경제적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장 쟁탈을 통한 경쟁뿐이었다”고 적었다. 케인스는 여기서 정부 개입이 실업을 완화할 수 있다면 외부 시장 쟁탈전이 필요 없고 제국주의 전쟁도 필요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정부 지출이 국내 생산자들을 위한 국내 시장을 확대하려면 외국 생산자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이는 자유무역이 정부 개입이 있을 때조차 유익하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반복되는 자유무역 논리는 총수요 부족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제국주의의 원인 중 하나인 시장 쟁탈전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사실을 무시하는 데 기반한다. 자유무역 논리는 세이의 법칙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통해 제국주의 동기를 은폐하며 무역을 모든 이에게 유익한 것으로 묘사한다.
특히 놀라운 점은 이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되며, 기계 생산 제품의 수입으로 식민지 경제의 국내 수공업 생산이 파괴되어 탈산업화가 발생한 것이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임에도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류 경제학의 노력은 이 사실을 은폐하고 제3세계의 대량 빈곤을 중심국과의 무역과 분리시키며 이론적으로 자유무역을 모두에게 유익한 것으로 제시하는 데 있다.
주류 경제 이론에는 제국주의의 필요성과 역할을 은폐하려는 은밀한 시도가 존재한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이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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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서 가르쳤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