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Benjamin REE | Norway | 2024 | 103min | Color | Documentary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즐기던 한 젊은 게이머 ‘마츠 스테인’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온라인 친구들이 유가족에게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의 비밀스러운 생애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
<내언니전지현과 나> People in Elancia
박윤진 | 한국 | 2020 | 83min | Color | Documentary
운영진에 버림받은 게임 '일랜시아'
일랜시아 17년 차 유저이자 감독은 무법천지 게임 세계에 여전히 남아있는 유저들을 찾아가 묻는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아마도 2002년 쯤이었던 것 같다. 초기 온라인 게임은 요즘 온라인 게임과는 달리 굉장히 불친절한 게임이었다. 그래서 가이드북을 구매해 지도가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펴놓고 게임을 하거나 가이드북이 없는 경우 지나가는 유저를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어봐야 했다. 1999년에 출시된 넥슨의 MMORPG [일랜시아]의 초보 유저였던 내가 당시 게임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신기한 몬스터가 나오는 사냥터도, 숨겨져 있는 맵의 위치도 아니었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저기 지나가는 유저의 머리스타일이었다. ‘저 머리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 걸까?’
당시에는 이런 가이드북에서 여러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일랜시아]를 처음 시작할 때는 두 개의 머리스타일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유저들끼리는 그 두 개의 머리스타일을 ‘기본머리’라고 불렀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번 돈으로 아무리 새로운 옷을 사 입어도 머리스타일이 기본머리면 초보 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머리스타일을 바꿔야 고수같아 보일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야자수 머리스타일’을 하고 예쁜 치마를 입고 있는 유저에게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진심어린 말을 꺼냈다.
"님.. 너무 예뻐요..+ㅁ+"
대뜸 나의 고백을 받은 유저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언니는 [일랜시아]에서 머리를 바꾸기 위해서 ‘미용사’라는 직업을 가진 유저에게 돈을 주고 머리를 맡겨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패 확률도 있어서 실패하면 같은 돈을 내고 다시 도전해야 하고 무엇보다 미용실에서 미용사의 직업을 가진 유저가 접속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 언니는 내가 미용사에게 지불할 돈을 구할 때 까지 나를 기다려 주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들어와 얼마를 모았냐고 묻고 언니가 사냥을 해서 번 돈을 보태주기도 했다. 그렇게 돈을 다 모은 나는 언니의 단골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겼고, 몇 번의 실패와 도전 끝에 언니와 같은 양갈래 머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기쁠 줄 알았는데 눈물이 났고 가장 기뻐했던 건 언니였다.
나의 첫 이벨린은 그렇게 만났다. 지금은 아이디도 기억나지 않는 언니지만 언니의 머리스타일과 옷 그리고 언니의 다정한 말투가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적고 나니 문득 현실에서 처음 친구를 사귄 순간이 언제였을까 하고 떠올려봤는데 여러 순간들과 사람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이제 와서 누가 가장 그립냐 물으면 나는 [일랜시아] 속에서 만난 ‘야자수 머리를 한 언니’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다.
‘야자수’머리는 [일랜시아]에서 미용사 직업을 가진 유저만이 해줄 수 있는 머리스타일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체내의 근육이 점점 소실되는 병을 앓다 사망한 ‘마츠 스테인’의 온라인 게임 속 대화 기록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다. 나는 이 점이 흥미로웠다. 지금처럼 디스코드를 통해 음성통화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던 때는 모든 소통을 ‘텍스트’로 해야만 했다. 상대방의 말을 곱씹어 볼 수도 있고, 썼다 지울 수도 있는 그런 텍스트. 나는 오래 전부터 온라인 게임 속의 대화는 편지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잘 안 하게 되는 말도 게임 속에서는 하게 된다. ‘물리쳐버려’라는 말은 해당 맵에서, 해당 포즈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말이다
현실에서는 상대방의 말에 바로 대답해야 해서 가끔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할 때도 있고, 내 속마음과는 다른 말이 나갈 때도 있다. 그 때문에 오해를 사기 쉽고 말을 점점 포장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은 내가 상대방의 말에 답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려던 말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하려던 말을 썼다 지울 수도 있다. 그리고 내 말에 상대방이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는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좋았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또한 이벨린의 대화들을 음성(배우)으로 전달하고 있지만 이벨린이 진정으로 ‘스타라이트’ 길드원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 때 그의 언어는 텍스트로 전달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게임 속 커뮤니티 모두 텍스트를 통해 소통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게임 속 커뮤니티는 조금 더 독특한 점이 있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그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라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은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플레이했던 [일랜시아]는 전사계열, 모험가계열, 상인계열의 직업이 성장하기 위해서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며(퀘스트를 깨기 위해 다른 계열의 친구를 필수로 사귀어야 한다) 자연의 원소들을 모티브로 한 아이템들이 존재한다. 나는 다른 음식을 먹으면 필살기를 쓸 수 있게 되는데 유독 ‘초콜릿’을 먹으면 캐릭터의 체력이 깎이는 귀여운 세계관 설정(개발자의 말로는 초콜릿이 몸에 좋지 않아서 그렇게 설정했다고 한다)과 낚시를 하면 사람들이 바다에 떨어뜨린 귀걸이와 신발을 낚는 쓸데없는 디테일에서 느껴지는 낭만, 그리고 마을의 NPC(논플레이어 캐릭터)들이 유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감성이 좋았다. [일랜시아]에는 개개인이 좋아하는 요소가 다를지언정 이런 세계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셈이다. 그래서 게임 속에서 이미 철지난 기차놀이를 해도, 함께 보물섬 퀘스트를 깨거나 학교놀이, 병원놀이를 해도 유치하지 않다. [일랜시아]는 그렇게 사는 곳이니까.
우체국 직원이 체력을 올려주며 하는 말이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내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리고 게임 속 세상을 찍다 보니, 당연하게도 나와 그 곳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영화의 편집을 마치고 나서는 그 속에 있는 내가 보였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서의 이벨린은 마냥 길드원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다른 유저들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영웅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그는 때로는 감정적이고 남들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이 참 반가웠다. 결국 커뮤니티는 단순히 내가 속해있는 세상을 함께 나누는 곳이 아니다. 좋은 커뮤니티의 끝에서는 결국 ‘나’를 만나게 된다. 나는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찍고 나서 여러 이유로 [일랜시아]에 접속하지 않고 있는데, [일랜시아]에 접속하지 않고 나서 알게 된 점이 있다. 나는 ‘내언니전지현’이라는 아이디로 살아가는 내 모습을 참 좋아했었다는 것이다. 나는 ‘박윤진’보다 ‘내언니전지현’이 좋다. 현실과는 다른 게임 속에서의 내 태도를 가끔 그리워하기도 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상영을 마치고 수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일랜시아]에서 진정으로 사랑했던 건 그 속에 있는 나였음을 깨달아간다. 요즘 나는 그때의 나를 추억하고는 다시 살아갈 희망을 얻을 때가 많다. 지금 나에게 이벨린은, 그때의 나인 셈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서 이벨린은 게임 속 세상을 느낀다. 잔디를 만지기도 하고, 마을 풍경과 화창한 하늘을 눈에 담는다. 이는 이벨린이 현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것들을 대체했다기보다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세상은 이벨린이 현실에서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느낀 것이 아니다. 이벨린의 부모님은 이벨린의 게임 속 삶을 알기 전 이벨린이 우정, 사랑 등의 경험을 해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슬퍼했지만 이벨린은 온라인 게임 속에서 그 이상을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현실만을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훨씬 더.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스틸컷
번외
나는 <내언니전지현과 나> 이후로 대한민국 게임 역사를 정리하는 다큐멘터리 3부작의 연출을 맡게 되었고, 얼마 전 모든 편의 편집을 마쳤다. [일랜시아] 다큐멘터리를 찍고 여러 강연을 다니며 ‘이제 더이상 일랜시아만큼 좋아하는 게 없으니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고 걱정하던 나는 지난 3년간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깨달았다. 그래 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한민국 게임 역사 다큐멘터리 3부작 중 첫 번째 편인 <세이브 더 게임>이 공개됐다. 국산게임이 전무하던 80년대에, 불법으로 국내에 들어온 해외 게임만을 즐기다 마침내 국산게임을 개발해버린(!) 대한민국 1세대 게임 개발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 어디서 어떻게 공개될지는 모르겠다) 이 프로젝트는 이제 내 손을 떠났기에 나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26년 공개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대한 힌트는 이 원고에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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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진은 다큐감독이다.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와 <세이브 더 게임>(2024)을 찍었습니다. 평소의 나는 좋아하기 힘든데 게임 속 나와 다큐멘터리를 할 때의 나는 좋아합니다. 나를 좋아하는 건 평생의 숙제 같은 것이어서 저는 계속 다큐멘터리를 찍을 것 같아요.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