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문정현 신부 서각 전시회, “와서 보시오”

문정현 신부 서각 전시회, “와서 보시오”

문정현 신부가 지난해 8월 10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이어 온 서각 기도를 이달 20일에 마무함에 따라 평화바람이 서각전시회 “와서 보시오”를 열게 됐다.

[현장르뽀] 길위의 신부 문정현, 명동성당 서각기도 100일째

[현장르뽀] 길위의 신부 문정현, 명동성당 서각기도 100일째

김인자(기자) \’민주화 성지\’ 구실 못하는 명동성당 꾸짖는 문정현 신부 복음화 치중, 교회쇄신 안해 보수세력이 교회를 자기집처럼 명동성당을 바라보고 가파른 길을 올라서 오래된 본당 건축물을 감상하려면 높은 건물이라서 최소 20m는 떨어져서 고개를 뒤로 바짝 제치고 멀리서 한참을 봐야 한다. 명동성당에는 성도든, 관광객이든, 젊은날 추억의 장소이든, 80년대 민주화성지로써 기념장소이든 꽤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한다. 이들은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모를 11월 16일도 혼자 혹은 삼삼오오로 본당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본당 앞에는 을지로와 종로를 거쳐 청와대를 바로보고 양팔을 벌리고 서있는 예수석상이 약 5m높이로 서있다. 그 아래에는 나무에 칼로 성경구절을 새긴 서각 글들이 전시돼있다. “보아라 네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이 강을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발가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내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당신의 모든 것을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순종하셨도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본당마당을 넓히기 위해 쌓았을 축대 끝부분에는 등받이가 없는 나무 벤치가 몇 개있고 그 벤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헌정공연? 쑥스럽구만”

“헌정공연? 쑥스럽구만”

문정현 신부의 ‘헌정공연’은 그리 의아한 일이 아니었다. 인권재단 사람이 ‘가을의 신부, 길위의 신부’라는 타이틀로 문정현 신부 헌정공연을 한다고 나섰을 때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할 때가 됐다’라는 인식이 더 컸을 테다. 70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길 위에서 살아온 문정현 신부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다.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길위의 신부 문정현, 그가 8월10일부터 명동성당에서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문정현 신부는 이 기도를 “세상의 모든 아픔을 모아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는 심정”이라고 표현했다.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새기운)는 그의 명동성당 기도 소식을 접하면서, 그의 질타를 결코 가톨릭만이 아닌 한국 종교계 전체를 향해 던지는 광야의 소리로 받아들이며, 늦으나마 문정현 신부의 기도농성을 적극 지지한다. 문정현 신부는 자신이 기도 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으로 “지난여름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촉구하는 사제들의 단식기도 때, 서울대교구 관리국에서는 영업방해라며 가톨릭회관 앞 주차장에 설치한 기도처 천막을 강제철거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 대해 “서울대교구 교구청, 그리고 명동성당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행태는 바로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영향이라 믿는다”고 토로하면서, 4대강 사업 반대가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의 결정이었지만 정진석 추기경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고 정면 비판했다. 해외의 유수한 하천공학자들과 토목전문가들은 물론 다수 국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가공할 생태환경의 훼손과 실효성 등의 이유를 들어 한 목소리로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 더욱이 근래에는 이 사업이 사실상 ‘위장된 운하사업’이 아니냐는 주목할 만한 발언까지 등장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평화누리통일누리]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 10주년 기념집회가 열리던 날…

[평화누리통일누리]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 10주년 기념집회가 열리던 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요즘은 좀 빠르게 변한다고 해서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한다.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10주년! 광화문 열린 시민마당에 걸린 10년의 사진 전시물을 보니 그 시간들이 아주 빠르게 머릿속을 스친다. 10년 동안 참 많이 울었다. 매향리 농섬에서, 효순이와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사과를 받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기름진 평택 들판을 둘러보며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매월 둘째주 화요일이면 미 대사관 앞에 다시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되짚었다. 10년 투쟁의 역사를 써내려간 주역들이 다시 광화문 시민마당에 다시 섰다. 김용한, 추영배, 조주형, 심우근, 신종원. 그분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속에 남지만 그 중에서도 신종원 이장(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주민대책위 조직부장이었던 그는 현재 마을 이장이다.)이 미군에게 고향땅을 빼앗기고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 고향땅을 빼앗긴 농민이, 불평등한 한미동맹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이 어떤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대추리 주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끔 투쟁의 현장에서 신종원 이장을 보면 너무나 반가운데 어떻게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지 몰라 멋쩍은 웃음이나 손을 한번 잡는 정도이다. 그것은 평택 땅을 지켜내지 못한 나의 회한의 몸짓이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이 전시물도 보고, 서로 반가운 인사도 나누고 있다. 그동안 각 사안의 투쟁마다 앞장서 투쟁하셨던 주역들도 곳곳에 보인다. 적을 때는 50명이, 많을때는 400명이 집회에 참여했는데, 매달 만나다보니 모두들 친근함이 느껴진다. “조국의 자주통일 염원을 모아 폭우, 폭설에도 오직 한마음으로 10년을 함께 해주신 분들을 모시고 사회를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는 이야기로 사월혁명회 한찬욱 사무처장이 사회를 보았다. 제일 먼저 평통사 상임대표이신 문규현 신부님이 10주년 기념사를 하셨다. 문규현 신부님은 “10년 전 첫 집회를 연 날로부터 한달 한달 이어져 오늘로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파주 스토리 사격장에서, 매향리 폭격장에서, 효촌리 여중생 사고 현장에서, 평택 대추리에서, 군산과 직도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미군들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였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이 집회는 이어졌고, 오늘 집회는 이제 주한미군을 완전히 내보내고 한반도 평화통일 실현을 다짐하는 자리이다. 반미연대 집회를 10년간 지켜온 동지여러분! 모두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하셨다. 10주년 집회를 맞아 참가한 단체들도 훨씬 많았다. 한국진보연대 이강실 상임대표, 민주노동당 이영순 최고위원, 민주노총 황수영 통일위원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세 분 모두 더 많은 국민들과 함께 이 집회를 함께 해 나갈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하였다. 집회가 시작되고 좀 지나자 인천에 있던 회원이 “인천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좀 지나니 부천에 있던 회원이 “부천에도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울은 어떠냐?”고 묻는 전화가 왔단다. 아니나다를까 축사를 시작할 무렵부터 한두방울씩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지난 7월 26일 평화협정 실현한마당 뒤풀이가 생갔났다. 그때도 이곳에서 뒤풀이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소나기가 쏟아졌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밥말아 먹고, 막걸리와 빗물을 함께 마시곤 했다. 미리 회원들이 알려준 정보 덕분에 그나마 근처 편의점을 뒤져 우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참여했던 박상희 목사님은 “우리대신 하늘이 눈물을 흘려준 것이다”라며 좋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 왼쪽부터 신종원, 강찬석, 심우근, 조주형, 김용한, 추영배, 주병준. 반미연대집회 10년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희망의 노래 꽃다지가 축하 공연을 하였다. 잔잔한 노래에 맞춰 일제히 하얀색 우비를 입은 150여 참가자들이 한반도 모양의 피켓을 들고 흔들었다. 하얀 우비를 입으니 늙고 젊음이 없고, 여성 남성이 구분없이 모두 똑같은 모습, 똑같은 마음이었다. 이어 반미연대 집회 10년의 역사를 써내려간 주역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무건리 주민대책위 주병준 위원장은 10년동안 이 자리를 지켜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시작으로 “미군을 내보내야만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가 올 것이고 가능하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최근 오현지킴이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지만 오현리에 남은 주민들은 꿋꿋하게 투쟁할 것이다.”며 22일 진행될 중앙토지위원회 수용 재결 회의 저지 투쟁에 주민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매향리주민대책위 추영배 고문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 싸워 매향리에서 미군을 내보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매향리에는 미군이 버린 폭탄찌꺼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더 노력하여 매향리에서 그랬듯이 우리나라 땅에서 미군을 내보내고 해방세상을 만들자!”고 하였다. 전 SOFA개정국민행동 김용한 공동집행위원장은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하셨던 문정현 신부님은 ‘행동으로 보여주자’, ‘낮은 단계부터 만들어가자’고 하셨다. 낮은 단계인 SOFA투쟁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미군 철수투쟁까지 제기되고 있는데, 몇 년 후면 환갑이 되는데 미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전 공군차세대전투기 시험평가단장이었던 조주형 대령도 “이 자리를 지켜온 분들에 비하면 본인은 많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국방비의 절반이 무기구입에 사용되고, 구입되는 무기가 거의 대부분이 미국 무기다.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쓰이는 국방비가 악의 축인 미국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그 돈이 통일 비용으로 쓰여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과 뜻을 모아 일궈나가자”고 하였다. 여중생 압살사건 당시 효순, 미선의 언니들이 다니던 의정부 여고의 교사였던 심우근 선생은 “말을 하는 교사지만 이 자리에 계신 선생님들 앞에 서니 많이 떨린다. 미군들이 세워놓은 추모비 앞에서 추모를 하며 많은 분들이 안타까울 것으로 안다. 미군이 진정으로 여중생을 추모한다면 이 땅에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 가증스럽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두 여중생, 이 땅에서 미군으로 인한 피해가 두 여중생이 마지막이 되도록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국민들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워야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추모비 건립에 힘을 모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 반대 운동을 했던 건축가 강찬석 님은 “나는 원래 반미주의자가 아니고 건축가이며 문화재 보호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 반대 투쟁을 4년동안 하다보니 사람들이 나를 반미주의자라고 부른다. 열심히 싸웠더니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을 막아냈고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더 열심히 싸울 것이다.”라고 밝혀 참가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 당시 매번 반미연대집회에 참석해 왔던 평택주민대책위원회 신종원 조직국장은 “자기 땅을 빼앗기고 주민들이 살기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직접 찾아와서 봐 주었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한시적 공공근로를 통해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미군기지로 고향땅을 빼앗긴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려나가 줬으면 한다”고 하였다. 10년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많은 분들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이후 우리가 더 힘을 모아나가야 함을 느끼게 하였다. 마지막 발언을 하였던 신종원 이장님의 발언은 종속적인 한미동맹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10년이 눈보라와 비바람을 이겨낸 시간들이었다면 이제 이후 10년은 한반도에 불어올 회오리 바람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이겨내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발언자들은 하나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일요일 하루를 꼬박 부천평통사 회원들과 정성스레 박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박을 터트리는 상징의식을 하였다. 참가자들은 미국과의 한판 승부에 새로운 마음과 힘을 모아 나가자면서 오자미를 마구마구 던졌다. 박이 잘 안터지만 어쩔까 걱정했는데, 걱정대로 한참을 버티디가 박이 터졌는데, 사탕도 많이 넣어 두어서인지 대학생 친구들도, 어르신들도 좋아라 하셨다. 박에서는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라고 써진 현수막이 내려왔다. 뒤풀이에서는 민대협 대학생들이 율동공연도 하고, 대구, 부산, 광주 등 멀리서 참여한 분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하였다. 젊은 대학생들이 반미투쟁에 함께 하고 있으니 대견하고 든든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올 10년 안에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실현, 조국 통일 모두를 이루자는 결의를 하고 있다. 지난 10년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면 ‘비바람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일 것 같다. 이후 10년은 비바람보다 더 큰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폭풍우 뒤 다가올 평화로운 세상, 그 날은 땅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의 몸짓이 아니라 역사를 써내려간 사람들과 기뻐 얼싸안을 수 있는 날일 것이다.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냥 오지는 않을 것이다.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더 큰 확신으로 실천할 때 가능할 것이다. 10주년 반미연대 집회는 나의 마음을 다지는, 더 많은 동지들의 마음을 모으는 자리가 되지 않았을까?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주년을 맞는 우리의 결의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주년을 맞는 우리의 결의

1999년 10월 21일, 노근리 양민학살 및 조중필 피살사건 진상규명과 불평등한 한미SOFA 개정을 요구하면서 처음 시작한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가 만 10년을 맞았다. 반미연대집회는 이 땅의 모든 반미 사안이 다뤄지고 확산되는 반미투쟁의 산실이었다. 한미SOFA 개정운동, 조중필피살사건 등 미군범죄관련투쟁, 매향리폭격장 폐쇄투쟁, MD 저지투쟁, F-15K 도입반대투쟁, 여중생압사사건투쟁, 덕수궁터미대사관건립반대운동, 주한미군 전략적유연성 반대투쟁, 한미상호방위조약 개폐투쟁, 굴욕적 용산미군기지이전협상 저지투쟁 및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투쟁, 무건리훈련장확장 저지투쟁, 한미연합전쟁연습 반대투쟁 등 수많은 사안들이 반미연대집회를 통해 제기되고 확산되었다. 이 사안들은 하나같이 냉전과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형성된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주둔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며 주민의 생존권을 파괴하고 우리 국민의 고혈을 짜내는 문제들이다. 반미연대집회는 매향리미군폭격장 폐쇄투쟁 승리와 한미SOFA 일부 개정, MD 저지에 기여하고, 두 여중생의 부모님이 반미연대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여론을 불러일으켰으며, 대추리 현장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투쟁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반미연대집회를 통해 한미동맹을 폐기시켜야 한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대중의 반미자주의식 성장에도 기여한 것은 큰 성과라 할 것이다. 반미연대집회의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정권의 모진 물리적·법적 탄압과 이에 대한 처절하고도 끈질긴 저항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외교공관 100m 이내 지역 집회 금지라는 위헌적인 근거를 들어 경찰은 집회 참가자에 대한 고착과 폭행, 오지 격리조치, 연행과 구금을 일삼았다. 하지만 집회 참가자들은 결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멀리 내던져지면 늦은 시간에 다시 돌아와서 집회를 기어코 마무리했고, 연행과 구금에는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동여매거나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밤샘 농성을 벌이는 등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3년여에 걸친 강고한 저항과 법적 투쟁 끝에 우리는 마침내 집회의 합법성을 쟁취해 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광화문 KT 앞으로 옮겨 진행하고 있는 집회를 다시 가로 막았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법적투쟁으로 무력화시킴으로써 집회의 자유를 수호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권은 한사코 막으려 하고, 집회 참가자들은 기어이 성사시켜왔던 반미연대집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 미국의 패권을 영구화하느냐 아니면 민족 자주를 이루느냐하는 투쟁이 미대사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집회 개최 여부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곳은 반미자주투쟁의 최전선의 하나였으며, 그래서 반미투쟁의 성지라고 불렸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반미연대집회를 지키고, 이를 통해 대중의 반미자주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역사와 민족이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절실한 문제를 당면 과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를 이루고 자주적 통일을 성취하는 일이다. 지금 정세는 지체와 곡절을 겪으면서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평화군축과 통일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북미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이 본격화되면 북핵 포기와 미군철수, 한미동맹 폐기, 미국의 핵우산 제거 등이 논의될 것이다. 60여 년간 지속되면서 남북을 통틀어 주권 침해를 비롯하여 온 사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강요했던 분단과 정전체제를 마감할 수 있는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 반미연대집회 참가자들은 한반도의 지각변동이 예상되는 정세 속에서 지난 10년의 성과를 계승하여 새로운 10년의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늦어도 새로운 10년 안에 우리는 북미양국이 북핵 포기와 미국의 핵우산 철회를 교환하여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하고,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정전체제를 빌미로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내보내고 군축을 실현하여 공고한 평화체제를 이루며, 북미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여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마침내 조국통일의 탄탄대로를 여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근본적 과제 해결을 촉진하기 위해 군사주권을 빼앗기고 있는 작전통제권문제, 대북 선제공격적인 작전계획과 전쟁연습문제, 미군기지와 훈련장 확장문제, 미제무기도입과 미군주둔비용 부담문제, 미군범죄와 환경문제, 경제적 종속을 더욱 고착화하는 한미FTA문제 등에 대해서도 힘과 지혜를 모아 투쟁해 나아갈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부진 각오와 새로운 모습으로 반미연대집회를 더 크고 대중적인 집회로 만듦으로써 우리 사회에는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에게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일삼고 있는 미국에는 더욱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회로 만들어 나아갈 것이다. - 우리의 결의 - - 우리는 늦어도 향후 10년 안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한반도 비핵화, 조국통일을 모두 이뤄낼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며 주민 피해와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모든 미군과 미국 관련 사안에 대해서도 적극 투쟁해 나갈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반미연대집회를 더욱 대중적인 집회로 키워 우리나라를 자국 패권의 도구로 삼는 미국을 강력히 압박하는 집회로 만들어 나아갈 것을 결의한다! 2009. 10. 13.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10주년 기념 121차 집회 참가자 일동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년 개근, 변연식 공동대표를 만나다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년 개근, 변연식 공동대표를 만나다

처음 시작... 문정현 신부님이 군산미군기지 민항공기 활주로 사용료 문제 등으로 소파(SOFA)개정운동을 시작하면서 ‘미 대사관 앞에서 집회 한번 해 보자’고 각 단체에 제안할 때였어요. 1999년 10월에 오두희 선생, 박순희 대표, 천주교 성심회 수녀님들과 자통협(평통사)과 미대사관 뒤편에서 집회를 했죠. 당시에는 시내에서, 더구나 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한다는 게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라, 경찰들의 탄압이 엄청 났죠. 집회를 시작하자마다 모두 연행됐지요. 한번은 무척이나 추운 겨울이었는데, 길바닥이 얼음으로 덮혀 있었어요. 집회를 하려다가 모두 연행되어서 신설동 사거리에 내버려졌는데, 얼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문정현 신부님은 안경도 깨지고요. 정신을 추스리고 또 대사관 앞으로 와서 정리집회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다가 또 광화문 사거리까지 끌려서 밀려나고요. 집회 시작전부터 광화문 열린공원 입구를 경찰들이 가로막고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미리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빙 둘러싸여 고착을 당하고요. 그러던 중 2002년 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연행이 되었고, 문정현 신부님과 늦게 온 몇 몇만 남았어요. 신부님이 “잡혀간 사람들이 풀려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하시고, 결국 밤을 새워 새벽을 지나 다음날 오후까지 있었지요. 미대사관 근처라고 집회를 못하게 하니, (집회보다 더 강력한) 밤샘 농성을 해버린 것이죠. 그 뒤로도 몇 달을 더 고생했어요. 사람들이 잡혀가면 밤새워서 기다리고, 쇠사슬로 서로를 엮어서 연행에 저항하기도 했지요. 이런 저런 고생 끝에 집회 장소를 합법화할 수 있었어요. 투쟁하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일이지요. 반미연대집회 10년, 돌아보니 내가 바뀌었구나 문정현 신부님이 <불평등한소파개정운동본부>를 꾸리고 활동을 하시다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 자통협-평통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죠. 사실 그때가 개인적으로는 큰 수술을 받아서 집에서 누워있을 때였어요. 무기력하게 정체된 느낌으로 누워서, 오한이 오면 진통제로 버티고 있는데 이미 내 나이 중년을 넘고 있었죠. 이제 뭔가를 해야한다면, 평화를 위한 일, 분단 극복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딱 때가 맞아 떨어진 거죠. 집회 경험이 많지 않아서 반미연대집회 하면서 ‘원봉(원천봉쇄)’이라는 말도 처음으로 들어봤어요. 그러니, 경찰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벙하게 집회 참가 하러 갔다가 경찰들로 꽉 둘러싸이니까 어디 숨을 데도 없고, 너무 무서워서 천주교 후배들에게 ‘나 좀 사람들 가운데에 넣어줘’ 그랬다니까..(웃음) 반미연대집회 1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가장 변화된 점이 무엇이냐면 글쎄 난 잘 실감이 안나요. (잠시 생각) 그러고보니 나 자신이 제일 많이 변했네요. 10년동안.... 반미투쟁의 산실..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은 2002년 효순 미선이 투쟁때 시청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소파개정”을 외쳤을 때였어요. 그해 여름 우리 엄청 싸웠잖아. 초겨울에 미군들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지고, 동두천 미군부대 앞에서 경찰에 깔리면서 싸웠구요. 그날 우리 장도정 동지가 분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게 인상적이었죠. TV에도 나오고요. 그렇게 싸워서 온 국민이 촛불을 드는 것을 보니 3년간 광화문 공원에서 싸워온 게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거야. 그때 ‘한 3년 열심히 싸우니까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광화문 공원에서 소파개정을 요구하며 신부님들이 천막농성을 하는데, 대통령 후보들이 찾아오곤 했죠. 미국 관련 모든 사안들이 적어도 한번씩은 반미연대집회를 거쳐 갔어요. 집회가 하나의 통로가 된거야. 매향리 투쟁 같은 경우도 천주교 평화지기들하고 최종수 신부님, 김용한 선생, 자통협 사람들하고 집회에서 다달이 보면서 정붙이던 사람들이 매향리 현장에서도 엄청 큰 시너지를 발휘해서 투쟁했어요. 서로베르토 신부님도 그렇고.. 농로를 따라 경찰들과 싸워가면서 옷도 다 찢어지고 그러면서 매향리도 들어갔던거, 기총 사격 연습 현장을 목격하고, 농섬이 내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가니 해가 지더라구... 그때 거기서 자장면 시켜먹던 거, 주민들이 밥을 솥단지째 해 갖고 오던 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잊혀지지가 않아요. 제가 마티즈 차를 1999년 1월에 샀는데, 그것도 인연이었나 봐요. 사건 현장이 매향리, 평택, 동두천, 용산, 의정부 등 집에서 한두시간 거리니까 ‘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장으로 찾아가자’ 생각하고 막 찾아 다닌 거죠.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는 정보를 얻고 공부하는 자리이고, 박순희 대표(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가 표현대로 황금마차(마티즈) 타고 현장을 돌아다녔어요. 누가 얘기하던데, 제 차에 캠코더를 달아놨으면, 그대로 10년동안 투쟁의 역사를 기록했겠다고요. 매향리에선 앞뒤유리도 왕창 깨졌고, 용산에서 맥팔랜드 수사하라고 농성할 때는 이틀 연속으로 견인되기도 하고, 외교통상부 앞에서 차량 채로 경찰에 고착되어 피켓을 들었더니 신문 1면에도 나고 했죠. 쉽지 않은 10년, “영혼이 맑은 사람들” 10년이라니, 정말 쉽지 않아요. 매월 둘째주 화요일마다 집회를 연다는 것이... 물론 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나 민가협 엄마들의 목요집회도 있지만요. 아무튼, 정기적으로 열리는 게 중요해요. 매향리, 무건리, 대추리, 군산 등 미군의 피해 당사자들과 함께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연대라고 생각해요. 집회가 아니면, 이 사람들을 어디가서 만나겠어요? 천주교 신부님들, 수사님들, 성심회 수녀님들, 양비안네 수녀님, 임기란 어머님와 민가협 어머님들 너무너무 감사해요. 항상 열성적으로 참여해주시는 통일광장 선생님들도요. 집회 얘기를 하다보니, 평통사 사람들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10년을 이끌어 온 사람들(실무자)들의 진정성이 느껴져요.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저도 자연스레 평통사 일을 하고 있지만, 평통사 사람들을 만난 게 삶의 큰 기쁨이에요. 자랑스럽고요.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 붙어있고 함께 하죠(웃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해요. 지금은 경찰들과 막 옥신각신 안하고 평화롭게 집회를 하다보니까 그림을 더 잘 만들어야 하는 거죠. 용어도 쉽게 써서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게 하고, 피켓도, 상징의식도, 참여하는 사람들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앞으로도 재미있는 집회, 내용있는 집회를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거에요.

[이수호의 잠행詩간] 용산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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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엄마는 나에게 하느님을 들려주셨다

[용산 철거민 대참사] 애달픈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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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5개월째 냉동고에 누워계시고, 맏상주인 형님 이성연은 영안실을 지키느라 어머니 전재숙은 현장에서 경찰과 싸우느라 면회할 여유조차 없다. 색시 정영신이 새벽에 면회를 가고 서울시청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현장에서 경찰과 싸우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용산 철거민 대참사] 신부님이 그곳에 계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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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길 위의 신부님. 언제 저도 용산 현장에 나가 꽃으로 단장된 분향소에서 열사들 앞에 향을 피우고, 레아 호프의 바뀐 모습도, 예술포차도, 그리고 주위의 벽시나 벽화 등 예술인들이 만들어놓은 예술의 거리를 거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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