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지났다. 1908년, 미국의 방직공장 여성들이 “임금을 인상하라”,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선 지 딱 100년이 지났다.
1976년, 동일방직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지 30년이 지났다. 그리고 1985년, 구로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노동3권 보장하라”,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라”를 외치며 파업을 한 지 20년이 훌쩍 지났다.
시간은 이렇게 저렇게 흘러갔지만 2008년, 여성들은 또 다시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라”, “임금을 인상하라”,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녀들은 그저 100년 전에는 없었던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들은 여전히 화장실도 갈 수 없고, 점심시간에 안정적으로 밥을 먹을 수도 없는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5일 오후에 열렸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와 함께 하는 이야기 마당’에서 그녀들의 얘기를 들었다.
▲ '38 세계여성의날 100주년 투쟁기획단'은 5일 오후 6시부터 병원노동자희망터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와 함께 하는 이야기 마당'을 열었다. |
화장실도 못가고, 밥도 못먹고 일하는 그녀들 이야기
“일주일에 5만 원을 받아요. 그것 가지고 매일 점심을 사서 먹으면 남는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출근할 때면 일주일 치 밥을 종이컵에 나눠서 담아 와요. 그걸 냉동실에 넣어 놓고 매일 하나 씩 데워 먹죠. 얼른 가서 환자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뭐 차려놓고 먹을 것도 없어요. 그냥 김치 하나랑 먹는 거죠. 먹을 장소도 마땅치 않아요. 배선실이라고 환자보호자들도 와서 쉬고 하는 곳이 있거든요. 거기 앉아서 먹어요. 그런데 걸핏 하면 환자보호자들한테 민원이 들어오죠. 간병인들이 자리를 안 비켜 준다는 거예요. 문제제기요? 매년 계약하는데 민원이 많이 들어오면 병원에서 재계약을 안 해주죠. 환자보호자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 정금자 공공노조 의료연대 서울지역지부간병인분회 분회장 |
간병인으로 일하는 정금자 씨는 오늘도 환자보호자들로부터 들어온 민원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전 좀 나은 편이네요”라며 보육노동자 이슬 씨가 입을 연다.
“아이들이 12시부터 점심을 먹는데, 저희도 아이들하고 같이 밥을 먹어요. 갑자기 응가를 하고 싶다고 하는 애들이며, 먹기 싫은 반찬이 나왔다고 던져 버리는 애들, 심지어 토하는 애들까지 있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이런 상황에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이제는요 언제 또 먹겠냐 싶어 입 한 가득 음식을 넣고 씹으면서 애들 똥도 닦아주고, 토한 것도 치워요. 원장 선생님은요. 선생님들 점심 식비가 천 원으로 책정되어 있으니까 그 만큼만 먹으면 되지 않겠냐고 해요”
화장실 가는 문제하면 뉴코아-이랜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얘기가 빠질 수 없다.
“처음 판매대에 섰을 때는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그냥 닫고 갔어요. 다행히 운 좋게 안 걸렸죠. 내 옆에 있던 언니는 방광이 안 좋았어요. 여자들 애기 낳고, 나이 들면 방광이 안 좋아 지자나요. 그 언니 얼굴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울컥 나와요. 언니가 너무 힘들어서 화장실에 갔는데 옆에 있던 정직원이 손님들 다 있는데서 왜 지금 화장실에 가느냐, 그냥 좀 참으라고 면박을 주는 거예요. 언니가 너무 창피해서 그냥 나가버리기도 했어요. 하루 종일 화장실도 못가고, 다리에는 핏줄이 다 터지고...” 뉴코아 강남점에서 일했던 이인숙 씨의 눈에는 조용히 눈물이 고였다.
“저는요, 아이용 변기 있잖아요. 그걸 이용해요” 이슬 씨가 다시 말문을 연다. “보육 교사들은 아직 젊어서 그런지 출근할 때 한번, 퇴근할 때 한번 화장실에 가는 걸로 끝내요” 보육 시설에 어른용 화장실이 있는 경우는 30%에 불과하다고 한다.
“저는 돈만 싹 챙겨서 옆에 있는 화장실로 가요” 서초구에서 노점을 한다는 박두선 씨가 입을 열었다. “노점상들이 노점을 차릴 때 제일 먼저 보는 게 어디에 화장실이 있나 하는 거예요” 누가 물건을 집어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박두선 씨는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 예요. 내가 없을 때 손님이 오면 알아서 먹고 돈을 꼭 남기고 가시더라구요”라며 입가 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남자를 보조하기 위해 돈 버는 거라고?
화장실도 맘대로 못가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데 왜 그녀들은 일을 하러 거리로 나와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요즘 물가가 너무 비싸서 남자 혼자 버는 돈으로 살수 없으니 여자가 반찬 값 정도는 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하고, 애들 학원비 벌러 나오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 한원순 공공노조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 덕성여대분회 분회장 |
“처음에는 첫째 아들이 야구를 해서 남편 월급으로는 아이 교육을 시킬 수 없더라구요.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아이 아빠가 갑자기 큰 병을 앓게 돼서 제가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이인숙 씨의 경우다.
“남편이 아프고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일을 하기 시작했죠. 원래 독일에 간호원으로 가려고 했거든요. 예전에 이런 일 있었잖아요. 그래서 간호 공부를 했었는데 결국 가지는 못했죠. 어쨌든 남편이 아프고 나니까 예전에 배웠던 걸로 간병인이 되었죠” 정금자 씨의 얘기다.
“저희 집에는 딸만 다섯이예요. 제가 스스로 벌어먹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죠” 기륭전자에서 일했던 최은미 씨다.
그녀들은 반찬값을 벌러 나온 것도 아니었고, 애들 학원비만 벌려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은 여성이 일하는 것은 그저 남편을 ‘보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금을 작게 주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그녀들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가족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노동자였다. 이것을 정부는 ‘일·가족 양립’이라는 멋있는 말로 치장하고 있다. 그저 여성들을 저임금으로, 비정규직으로 내모는 것임에도.
“찍 소리도 못하던 그녀들” 세상과 싸우다
그녀들은 싸우고 있는 노동자다. 낮은 임금을 당연히 여기며,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세상에 맞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요구하고, 일한 만큼 돈을 받고, 불합리한 노동조건에 “이건 아니야”라고 지르고 나선 여성노동자들이다.
“관리소장이라는 사람이 군인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매일 집합을 시켜요. 그놈의 집합. 줄도 딱딱 맞춰서 서야 했어요. 그렇게 3년을 일하다 보니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노동조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씩 만나갔어요. 노동조합 만드는 거 학교에서 알면 큰 일 나잖아요. 그래서 입이 제일 무거운 사람부터 한 사람 씩 만났어요. 비오는 날 우산 쓰고 길에 서서도 만나고... 관리소장이라는 사람한테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고 싶었어요.(웃음) 총학생회도 만나고, 민주노총도 만나고 해서 유인물도 돌리고, 집회도 하고 했더니 제가 학교에서 제일 유명인사가 된 거 있죠. 그리고 3일 만에 관리소장이 나갔어요. 우리는 계속 완승이예요. 이제 집합도 없고, 계약서에 있는 대로 시간 딱 딱 맞춰서 일하고, 점심시간도 제대로 쓰고...” 덕성여대에서 미화원 노조를 만든 한원순 씨의 무용담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 최은미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
“같은 라인에 있던 언니가 잠깐 복도에 나오래요. 나는 내가 뭐 잘못했나 하고 쭈뼛쭈뼛 나갔더니 그 언니가 노조 한 번 만들어보지 않을 래 했어요. 그 전에 같이 일하던 언니들이 출산휴가도 못 쓰고, 애들 졸업식에도 못가고, 제사도 못가고 하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같이 해봐요 라고 했어요. 2005년 7월 5일, 분회장님이 라인에 올라가서 선동하고, 저는 문 앞에서 관리자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어요. 엄청 떨렸었는데... 다행히 관리자들은 안 들어 왔어요” 3년이 넘는 싸움을 하고 있음에도 최은미 씨의 목소리에서는 힘과 의지가 가득했다.
그녀들이 싸움에 나서고 나서 변한 것은 노동조건 뿐 아니었다. 그녀들은 당당한 여성이, 엄마가, 아내가 되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그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런 마음을 자신들의 아이들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길 바란다.
“제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에 시부모님을 모두 모시고 살았거든요. 집에 문제가 생기면 여자들은 조용히 하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어요. 근데 노조 활동을 하고 나니까 아닌 건 아니라고 지르게 되더라구요. 가만 있는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한 거죠. 이전 하고 비교해 보면 내 마음 속에는 응어리가 없어요. 속이 너무 편해요. 작년 5월 5일에 아이한테 선물도 못 사주고 너무 미안해서 노조 사무실에 데리고 갔어요. 사람들 움직이는 거며, 얘기하는 걸 듣고 있다가 아이가 자기 학교에서도 학급 회의를 하는데 다양한 의견이 나오면 그 얘기를 잘 모아서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는데 이랜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엄마가 끝까지 싸워서 꼭 이겼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부듯하던지...”
이인숙 씨가 이제는 맘대로 “지른다”라는 말에 정금자 씨가 맞장구를 친다. “여자면 찍 소리도 못하고 집에서 애나 키우고 시집살이나 하면서 살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가정이 어려워지고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지금은 남편이 찍 소리 못해요.(웃음) 그리고 시작한 노조활동, 노동운동은 내 평생에 가장 값진 일이예요. 너무 신나고, 내 삶의 보람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해요. 여자라고 집에만 있으면 안돼요. 훨훨 날아다녀야 해요”
“투쟁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무용담을 털어놓던 한원순 씨도 “노조 활동하고, 외부 회의도 나가다 보니까 이제 내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몇 사업장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정부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일은 나 만의 일이 아니고 내 아이들의 일, 내 자녀들의 미래를 위한 일이예요. 이제 아이들은 비정규직으로 밖에 취직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내가 싸우는 일이 더 의미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덧붙였다.
여성들이 일을 하고, 노조를 만들고, 투쟁을 하는 일은 남성들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보조’에서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 그럴까.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은 여성상이라고 떠받치는 ‘현모양처’를 깨버리고 할 말 다하고, 하기 싫은 건 아니라고 말하는 ‘기 센 여자’로 변하는 과정이라 그럴까.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그녀들이 ‘당당해’ 지는 과정이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만들어가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그녀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투쟁해서 너무너무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