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다. 위 글은 12년 전인 1997년 전농동에서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싸우던 철거민 박순덕 씨가 18m 철탑 위에서 떨어져 사망한 그날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2006년 5월부터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싸움을 벌인 용산4구역 철거민들이 한강로변 건물 옥상에 망루를 쌓은지 채 25시간만의 살인진압 과정에서 6명 불에 타 숨졌다. 테러와 맞서는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망루 꼭대기로 몰린 철거민들은 경찰특공대의 등장에 공포에 질렸고 불이 났다. 망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4명의 철거민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살인진압을 피해 망루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다가 끝내 숨졌다.
12년이 지나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현장에 갔다 온 김종률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백동산 용산경찰서장이 서울지방경찰청에 경찰특공대 투입을 요청하고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최종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김종률 의원은 “촛불 때부터 강경진압을 지시해 왔던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진두지휘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철거의 역사는 길고도 질기다. 지금은 서강대교 밑에 풀만 무성한 밤섬은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의도보다 인구가 많이 사는 섬이었다. 당시 여의도는 말이나 키우는 곳이었다. 밤섬엔 40여 세대의 주민 150여명이 사는 섬이었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집권한 직후 김현옥 서울시장이 밤섬이 홍수때 한강 범람의 주범이라며 다이너마이트로 섬을 모두 폭파해 버렸다. 사라진 섬 위로 다시 모래톱이 쌓여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당시 서울시는 홍익대 옆 산비탈로 밤섬 주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80년대 초엔 전두환 정권이 88올림픽에 방해가 된다며 상계동 주민들을 무더기로 내쫓았다. 주민들은 겨우내 언 땅을 파고 비닐을 깔고 거적을 위에 덮고 이주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세월이 흘러 2005년 농민집회에서는 전용철 씨가 경찰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2006년 포항에선 하중근 씨가 경찰에 맞아 사망했다. 얼마 전 법원은 전용철 씨에 대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하중근 씨 사건은 재판 진행중이다. 그럴 때마다 경찰은 요구에 못 이겨 재발방지를 약속하지만 지켜진 적은 없다.
철거민 투쟁에선 ‘깡패’라 불리우는 철거전문 용역직원의 폭력은 일상이 됐다. ‘도시및환경정비법’에 따라 재개발조합의 조합원 절반만 찬성하면 내려지는 ‘합법적’인 관리처분에 따라 강제철거는 시기를 가리지 않는다. 최소한의 인간 생존권을 위해 한겨울 철거는 못하도록 국무총리령으로 못박은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는 이들에게 휴지조각이다.
빠른 재개발을 위해 건설사는 철거전문 용역직원을 고용해 강제철거한다. 시간이 돈이니까. 깡패들의 폭력에 경찰은 눈을 감거나, 아니면 용산 사건처럼 먼저 나서서 철거를 자행한다.
뉴타운으로 지정된 상도동. 지난해 10월 상도 4동에는 건설회사에서 고용한 용역직원들이 밀어닥쳤다. 사람이 살던 집 세 채는 그날 모두 사라졌다. 집안에 소화기를 뿌리며 등장한 용역직원들은 지붕을 넘어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오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날 30여 명의 철거민이 병원에 실려갔다. 상도5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같은 달 용산 5가에선 두 아이의 엄마가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 건설사가 업무방해로 신고했다는 이유였다. 남은 두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은 없었다.
이런 폭력사태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했던 청계천 일대 철거과정에서도 반복됐다. 지난 2003년 11월 30일. 그때도 겨울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경찰과 공무원, 용역직원 등 1만8천여 명을 동원해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노점상 700여 명을 강제로 몰아냈다.
"겨울철 강제철거가 금지 되어 있음에도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을 몰아붙인 건설자본에 의한 살인이며, 생존권과 주거권을 위해 저항하는 철거민들에게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해 강제진압을 자행한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다" -용산철거민살인진압대책위 성명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