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읽기의 혁명2(손석춘,개마고원,2009.11.5,280쪽) |
사회과학 교과서 속 지식을 넘어
저자 손석춘은 혁명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전선을 교란시키는 ‘노빠’는 아니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노무현 집권 5년 동안 부익부 빈익빈은 커져갔다. 고졸과 대졸 사이 학력간 임금격차도 더 커졌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노무현의 경제정책은 급속도로 변했다”고 문을 열었다.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과 삼성의 오랜 관계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 속에서 노무현의 실패가 유시민 식 해석의 실패가 아니라 나라를 바라보는 통치 철학의 부재라는 더 깊은 곳에서 자라왔다고 단언한다. 그 주장은 저자 특유의 꼼꼼한 ‘신문읽기’로부터 나온다. 그의 주장은 거리에 선 투쟁에서 깨달은 살아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르크스 레닌의 교과서를 달달 외워서 나온 박제화된 지식도 아니다.
철학을 전공했던 저자는 경제기사를 읽어야 신문이 보인다고 말한다. 저자 스스로도 지독히 열심히 신문을 읽는다.
성장주의에 함몰했던 노무현
조선일보 경제데스크 박정훈이 조선일보 2003년 7월16일자 칼럼에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은 일단 끝난 듯하다”는 사뭇 용감한, 하지만 전혀 사실과 다른 주장으로 성장정책을 촉구한 바로 그날 노무현 대통령은 ‘2만 달러 시대 위한 CEO 간담회’를 열었다. 노무현의 경제정책 전환은 집권 다섯 달 만인 2003년 7월에 확연히 바꿨다. 대선 후보 경선때 ‘분배 중심’에서, 대선 후보가 된 뒤 ‘성장과 분배 동시 추구’로, 다시 당선 뒤 ‘성장 중심’으로 변질됐다. 그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주창하던 시점에 수도권의 30대 주부가 생활고에 어린 세 자녀와 함께 고층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저자는 노무현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조선일보가 강조한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는 실제로 왔지만 부익부 빈익빈은 되레 심화됐다. 애초 삼성 이건희 회장이 제기한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라는 이데올로기가 신문의 여론화에 힘입어 마침내 분배를 강조하며 출범한 참여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되는 과정은 우리가 신문읽기에서 깊이 성찰할 대목이다.
삼성과 노무현의 긴밀한 관계
많은 독자들의 짐작 이상으로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삼성과 긴밀했다. 노무현과 삼성을 연결하는 고리는 삼성의 2인자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이다. 이학수는 노무현의 부산상고 1년 선배다. 2003년 2월 노무현 참여정부 인수위원회에 삼성경제연구소의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400여 쪽 분량의 방대한 보고서가 제출됐다. 삼성전자 사장이 첫 정통부 장관으로, 2005년엔 삼성경제연구소 전무가 국정원 최고정보책임자로, 홍석현은 주미대사로 기용됐다. 노무현은 임기 중 터진 X파일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며 묻어버렸다. 국민 세금으로 국정홍보처를 통해 한미FTA의 당위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국정홍보처는 이명박 정부 들어 없어졌지만 진보진영을 기웃거리다가 거기 들어가 한미FTA를 역설하던 수많은 인사들은 지금도 민주당 의원 보좌관 등으로 기생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표면적으로만 노무현은 독과점 신문과 ‘감정적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신문읽기에는 철학이 없었다. 독과점 신문들과 감정적으로 격한 갈등을 벌이면서도 중요한 국정 방향과 특히 경제정책에선 독과점 신문들이 설정한 의제를 그대로 따라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정파적 신문읽기가 노무현에 그친 게 아니라 노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들로, 다시 개혁적 성향의 네티즌들로 퍼져갔다.
과연 신문이 본디 신성한 기관일까? 역사적 진실은 전혀 다르다. 세상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신문은 경제적 요인, 더 장확하게는 상업적 요인과 직결되어 있었다. 신문이 상공인들의 상업정보 판매 상품으로 출발한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세계 신문사에서 대중매체로 처음 선보인 신문은 1833년에 창간한 <뉴욕 선>이다. <뉴욕 선>은 19세기 중반부터 본격화한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했다. 미국이 멕시코를 침략할 때 사설(1847년 10월22일치)가 대표적이다. “멕시코인들은 정복당하는 데 철저히 익숙하다. 우리가 가르쳐줄 단하나 새로운 교훈은 우리의 승리가 피정복자에게 자유와 안녕과 번영을 안겨줄 것이라는 점”이라고 했다.
언론은 태생부터 상업적이다.
민중에 기반을 둔 신문은 1837년 당시 민중들이 모은 정기구독 예약금으로 창간한 영국의 <노던 스타>가 대표적이었다. 물리적 탄압 없이 민중언론의 힘을 약화시킬 방법을 고심하던 상공인들이 착안한 게 신문구독료 대폭 인하와 함께 신문광고다.
4800만 인구에 2400만 개의 펀드계좌가 있는 나라에서 ‘전 국민 성공시대’를 공약한 부자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자연스러움을 넘어 필연이다.
동아일보는 2009년 2월 26일 8면에 <“대졸초임 최대 28%까지 삭감”>이란 기사를 실었다. 한국의 대졸 신입사원 연봉이 일본보다 400만원이나 많다는 사실을 담은 표도 실었다. 기사는 “이번 기회에 임금 체계의 거품을 과감히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기사가 옮긴 ‘전경련의 보도자료’는 기초적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전경련이 비교한 일본 후생노동성의 대졸 초임은 초과근로수당, 특별급여를 뺀 정액급여다. 한국은 상여금을 포함한 월 임금총액이다. 똑같은 정액급여 기준으로 보면 우리 2007년 대졸 초임은 138만원으로 일본에 견줘 24만원 적다. 더구나 전경련은 이미 공표된 2008년 통계가 아니라 2007년 일본 경단련 통계를 인용했다. 예외적으로 낮았던 2007년 환율(100엔에 790원)을 적용해한국 대졸 초임을 높였다. 2008년말 환율(100엔에 1394원)을 적용하면 일본 대졸 초임은 288만원으로, 우리나라 142만원의 갑절에 이른다.
민주노총이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함께 기자간담회를 열어 한국의 대졸 초임이 전경련 주장과 달리 일본보다 낮고 오히려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밝혔지만 ‘정정보도’를 낸 신문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의 대졸 초임이 일본보다 높다는 왜곡을 진실로 여기고 있다.
독립적이지 않았던 <독립신문>
한국 언론은 처음 선 보일 때부터 진실과 거리가 있었다. <독립신문> 등 개화파가 주도한 신문들은 당시 제국주의 외세의 진실을 독자에게 알리는 데 실패했다. 더 정확히 외세 쪽에 가담했다. 19세기 말 조선 곳곳의 의병을 당시 발행하던 신문들은 ‘의병’이라고 보도하지 않았다. <독립신문>은 의병을 ‘비도’라고 보도했다. 심지어 장렬히 전사한 의병 이름 뒤에 ‘놈’자를 서슴지 않고 붙였다. 개화파들의 국제정세 인식이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의 기세에 눌려 1896년 1월1일 단행한 단발령을 유생이나 의병이 무장봉기로 좌절시키자 문명의 개화를 포기하는 조선 백성과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독립신문>은 서구 문명을 지나치게 열망하다 보니 열강의 식민주의를 수용하고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예로 영국의 인도 지배나 영국과 독일의 아프리카 지배 때문에 이들 식민국가가 발전했다는 논리까지 펴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경제가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는 뉴라이트 계열의 새로운 친일파 세력과 하등 다르지 않다. <독립신문>의 사상가였던 윤치호는 “조선이 어차피 강대국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면 영국에 종속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자신의 일기에 썼다.